190. 유나린
나강인이 경찰차 뒷좌석에서 물었다.
“저한테 경례는 왜 하셨습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경찰이 뒤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정부 요원 아니십니까?”
“어….”
데리러 온 사람이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박순기가 일부러 숨겼다는 뜻이다.
나강인은 총권도 수강생 민영희가 생각났다. 그녀는 정부와 민간의 일을 다 하는 프리랜서 요원이다.
나강인이 적당히 둘러댔다.
“프리랜서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어쨌든 지금은 정부 일을 하러 가시는 거잖습니까?”
나강인은 아직 무슨 상황인지 듣지 못했다.
“그렇…죠?”
경찰차는 마포구에 도착했다.
나강인이 차에서 내렸다.
총권도 수강생 박순기가 달려왔다.
“나 사범님. 근처에 계셔서 다행입니…. 누구세요? 아니, 저 사람들. 데려오라는 분이 아니라 어디서 아저씨를….”
나강인이 말했다.
“접니다. 이건 영화 촬영 때문에 변장을 한 거고요.”
“네?”
박순기가 나강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헉! 진짜 나 사범님이시네요? 와. 요즘 영화 분장 정말 쩝니다. 아주 다른 사람이 되셨어요. 그럼 종로에는 촬영 때문에 계셨던 겁니까?”
“예. 오전 촬영을 마치고 쉬던 중입니다.”
“휴우. 다행입니다. 종로가 아니라 집 근처에 계셨으면 헬기를 보낼 뻔했습니다.”
나강인이 주변을 쓱 보았다.
AI 전지인이 허공에 간단한 정보를 띄우며 보고했다.
- 주차된 버스에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차량에서도 정복 경찰들을 발견했습니다. 주변에 배치된 사복 요원들도 확인했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비공개로 해결해야 하는 사건입니까?”
“역시 나 사범님. 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하셨군요.”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릅니다.”
박순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인질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디서요?”
박순기가 태블릿PC를 꺼내 그 지역 지도를 띄우고 그중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단층 건물입니다. 이 장소에서는 직접 보이지는 않습니다. 무장한 놈들이 그 건물에 있던 사람들을 억류했습니다. 저희는 주변 건물에 저격수를 배치했습니다.”
지도에는 저격수가 배치된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AI 전지인이 지도상의 한 지점을 지적했다.
- 봉쇄 진형에 사각이 있습니다.
나강인이 그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도 저격수를 배치하시죠. 무장 병력도 이쪽에 대기하고요. 적이 인질과 함께 이 방향으로 강행 돌파를 시도하면, 이쯤에서 일반인들과 섞이게 됩니다. 그럼 일이 더 커질 텐데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박순기가 무전으로 그 정보를 전했다.
나강인은 무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을 비공개로 해결하려 합니까?”
“범인들이 총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도심 한복판에서 놈들과 총격전이라도 벌어지면 여론이 심각…. 어?”
박순기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올해에 발생한 총격전은 거의 다 나 사범님이 개입하셨네요?”
“그중에 제가 일으킨 사건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알죠. 당연히 압니다. 그 사건들은 어쩌다 보니 나 사범님이 말려들었다가 해결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이번처럼 어쩌다 보니 말려든 겁니다. 그동안도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이해가 확실히 되네요.”
나강인이 지도를 보며 말을 돌렸다.
“시민들이 불안해하지 말라고 비밀 작전을 하는 겁니까? 그냥 경찰특공대를 투입하는 게 정석일 텐데요?”
박순기가 머뭇거렸다.
“어. 그게요. 이거 대외비인데….”
“도와달라면서요?”
박순기가 작은 소리로 설명했다.
“인질 중에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만약 인질이 구출되기 전에 이 사건이 공개되면, 그 인물이 누군지 알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놈들도 자기들이 누굴 잡고 있는지 알게 되겠죠.”
“그럼 그 인질의 목숨이 위험해지겠군요. 놈들이 한 명에게 관심을 집중하면 구출하기는 더 어렵고요.”
“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개 작전은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대책은요?”
“저희 쪽 협상 전문가가 놈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들고 비무장으로 들어가 대화할 겁니다. 그놈들이 배가 고픈지 햄버거를 요구하더군요.”
“협상 전문가의 역할이 크군요.”
“그렇죠. 그래서 나 사범님을 모셔왔습니다.”
나강인이 눈을 껌뻑였다.
“예?”
“도와주십시오.”
“난 전투 전문가이지 협상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
합동수사본부도 이 사건에 발을 담갔다.
합수부가 인질 구출 작전에 끼어들게 된 건 나강인 때문이다.
합수부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강인이 작전에 참여할까?”
경찰 간부가 대답했다.
“우리 경찰 소속 총권도 수강생이 현장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설득해보라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시죠.”
다른 정부 부처 간부가 물었다.
“그냥 경찰특공대를 투입해서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범인들은 다 잡을 수 있겠죠. 대신에 인질들이 죽겠지만요. 중요 인물은 사망 확률이 더 높고요. 그거 다 누가 책임질 겁니까?”
“어차피 지금 준비한 작전도 실패하면 인질이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도 이쪽이 승산이 훨씬 더 높습니다.”
합수부장이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나강인 때문에 야근을 참 많이 한다고 불평했지요?”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지요.”
“그런데 이번 일을 겪어보니까 알겠습니다. 그때마다 나강인이 없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어…. 그건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일이 해결된 뒤에 연락을 받아서 머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건이 먼저 터지는 걸 당해보니까 눈앞이 정말 캄캄하네요.”
“이번에는 야근해도 좋으니까 나강인이 우리와 같이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예? 아니, 본부장님. 그거야 그렇지만 왜 또 야근을….”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
박순기가 상황을 설명했다.
“어차피 협상으로 해결할 상황이 아닙니다. 놈들이 아무 탈 없이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걸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면, 비슷한 인질범죄가 증가할 테니까요.”
“범인들을 풀어준 경찰 고위층도 줄줄이 모가지일 테고요.”
“그렇죠. 그렇다고 공개 작전으로 전환하면 작전의 위험부담은 커지고 인질의 생명도 위험해집니다.”
나강인은 박순기가 뭘 원하는지 안다.
“그러니까 나보고 협상 전문가인 척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놈들을 제압해 달라?”
박순기가 미안해했다.
“혼자 맨손으로 들어가서 총기로 무장한 놈들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없겠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임무입니다. 범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음식을 요구했을 겁니다.”
박순기가 나강인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 사범님은 그동안 그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셨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건들은 이번처럼 우연히 말려들었던 것뿐이라니까요.”
“위에서는 이 작전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사범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더군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나 사범님에게 총권도를 배우고 있으니까 더 잘 알죠.”
“제가 민간인이란 건 아시죠?”
“알죠. 민간인 신분으로 국제용병단, 해적단, 무장강도단, 기타 등등 참 다양하게 많이 잡으셨죠. 잘 압니다. 그래서 윗분들이 나 사범님을 경감으로 특채하겠다고….”
나강인이 특채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됐습니다. 정시 출퇴근은 체질에 안 맞아서요.”
“예. 저도 윗분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위에서는 그래도 이야기라도 꺼내보라고 지시해서 그냥 말만 해본 겁니다.”
“어쨌든 저는 민간인입니다.”
“물론이죠. 그래서 부끄럽지만… 도와주십시오. 저희 쪽에서 아무리 분석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난감하네요.”
나강인도 도움이 되고 싶긴 하다.
그가 작게 말했다.
“뒤에서 조언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왔는데 말이야.”
- 전투 요원은 거절하고 작전 조언자 역할을 제안하십시오. 더 좋은 작전을 제안하면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그러려면 정보가 필요하잖아. 뭘 알아야 새로운 제안을 하지.”
정보를 가진 사람은 눈앞에 있다.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말했다.
“일단 현재까지 파악한 자료 다 주시죠. 상황파악부터 하고 나서 이야기하게.”
***
공지현이 촬영이 한창인 건물로 돌아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신은하가 발견하고 물었다.
“왜 그래?”
“은하 언니. 조금 전에 밖에서 우리 선생님을 봤는데요.”
“강인 오빠?”
“네. 근데 경찰차가 막 달려오더니, 경찰 아저씨가 내려서 선생님께 경례하는 걸 봤어요.”
“어?”
“진짜 이상하죠?”
“그래서 그다음에는?”
“네?”
“설마 그 경찰차를 탄 건 아니지?”
“타고 어디로 가시던데요?”
신은하는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했다.
“이 오빠가 또!”
“네? 또요?”
“아냐. 알면 다쳐. 넌 모르는 게 나아.”
그녀가 구석으로 가서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강인이 잠시 후에 받았다.
- 왜?
“지금 어디셔?”
- 순기 씨를 만나고 있다.
“박순기 씨? 왜? 뭐 도와달래? 경찰의 일은 경찰이 해결하라고 해!”
- 그냥 조언이나 좀 하는 거야.
“진짜지? 진짜 조언만 할 거지? 또 총 쏘면서 싸우는 그런 일 아니지?”
- 오후 촬영 전까지는 돌아갈 거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신은하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되게 수상한데….”
수상하지만 찾으러 갈 수가 없다. 조감독이 그녀를 불렀다.
“신은하 씨. 준비하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지금 가요.”
***
박순기가 태블릿PC에 들어있는 자료를 불러내 나강인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놈들이 점령한 건물의 도면입니다. 놈들의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최소 세 명에서 최대 열 명까지 보고 있습니다. 무기는 반자동권총을 확인했습니다.”
“놈들은 왜 저기 갇힌 겁니까?”
“건물 내부 비상경보장치가 작동했습니다. 저희가 걱정하는 중요 인물도 비상 호출장치를 썼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들어 박순기를 보며 물었다.
“중요 인물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 그게….”
“도와주려면 정보가 필요합니다만?”
박순기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과학자입니다.”
“분야는요?”
“생화학입니다. 의사 면허도 있습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요원님도 의사 면허가 있으시면 우리가 불법 수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의대를 가시지 그랬습니까?
“너 지금 내가 이 일을 받을 거 같으니까 시비 거는 거지?”
- 아닙니다.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정부에서 왜 보호하는 겁니까?”
“저도 그것까지는 잘…. 훌륭한 과학자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는 게 별로 없으시군요.”
“그쪽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박순기가 태블릿PC에 서류 한 장을 띄웠다.
“제가 가진 정보는 이게 다입니다.”
그 서류에는 중요 인물의 이름과 나이, 사진, 간단한 약력 정도만 적혀 있었다.
“유나린. 나이는 서른일곱. 직업이 한국대 교수네요?”
AI 전지인이 반응했다.
- 유나린 박사의 정보를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응? 언제?”
- 2027년에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겨우 5년 뒤에?”
의문이 들었다. 2027년의 정보는 지금 세상의 인터넷을 뒤져서는 알아낼 수 없다.
“그런데 그 정보가 왜 네 초기 데이터에 들어있어?”
- 유나린 박사는 한국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며 과학 분야에서는 최초 수상자입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AI 전지인이 권수연의 이름을 아는 건, 그녀가 남길 예정인 업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라미드 태양전지는 2082년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다.
“과학 분야 최초 노벨상 수상이면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 정도는 채우겠네.”
- 그렇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AI 전지인의 초기 데이터에 이름이 들어있다.
“그래서 유나린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으로 노벨상을 타는데?”
- 모릅니다.
“응?”
- 자료가 없습니다.
“과학 분야의 수상자라며?”
- 제가 가진 정보는 그게 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상황은 그거구나. 목차는 아는데 내용을 몰라.”
- 목차라도 아는 게 어디입니까?
“그건 그렇다.”
나강인이 유나린의 정보를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5년 뒤에 유나린 박사가 노벨상을 탄다는 건, 오늘 사태는 무사히 극복한다는 소리잖아. 내가 나설 필요가 없겠는데?”
- 아닙니다. 나서셔야 합니다.
“왜?”
- 요원님이 그동안 해결한 사건들이 현재 세상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좀 자세히 말해봐.”
- 유나린 박사의 연구에는 영향이 없겠지만, 하필 오늘 저 건물이 점령될 때 저곳에 있는 상황에는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원래는 유나린이 지금 저 장소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오늘 죽을 일도 없고, 5년 뒤에는 노벨상을 타게 된다?”
-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놈들에게 붙잡혀 인질이 됐잖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그럼 구해야겠네?”
- 물론입니다.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말했다.
“유나린 박사 때문이 아니라, 저기 갇힌 사람들을 살려야 하니까 도와는 드리겠습니다.”
초조해하던 박순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나 사범님! 믿고 있었습니다.”
“믿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박순기 씨는 다음부터 이런 일을 직접 해결할 수 있게 특훈에 들어갈 거고요.”
“알겠…. 예?”
박순기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나 사범님? 아니, 안 그려서도….”
“다른 분들도 훈련 강도를 높여야겠네요. 요즘 좀 널널하게 수업을 한 것 같군요. 반성하겠습니다.”
“아. 그럼 저 혼자만 당하는 게 아니니까 좀 낫네요. 하,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