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협상 전문가
나강인이 손가락을 하나 흔들었다.
“안쪽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경찰 요원 박순기가 태블릿 PC에 들어 있는 자료를 보여주었다.
“저희가 파악한 정보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그 자료에는 건물 도면과 예전에 찍힌 내부 사진, 인질로 잡힌 사람들의 간단한 개인정보 등이 있었다.
유나린 박사는 AI 전지인의 초기 데이터에 노벨상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 외에는 AI 전지인이 반응하는 이름이 없었다.
“이 사람들이 다입니까?”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범인들에 관한 정보는 없군요.”
박순기가 설명했다.
“예. 저희가 모습을 확인한 건 세 놈인데, 셋 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오는 도중에 얼굴을 노출한 적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주변 CCTV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무장은요?”
“세 놈 다 보란 듯이 권총을 허리에 꽂고 있더군요.”
“무력시위군요. 함부로 쳐들어오면 인질은 다 죽는다는 뜻이겠죠.”
“맞습니다. 다른 놈들도 비슷한 수준의 무장을 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위험한 곳에 나 혼자 비무장으로 들어가라는 거네요?”
당황한 박순기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죠? 윗분들도 참 너무하시지. 대신에 저희가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나 사범님의 정보를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부려먹고요?”
“그건….”
“이번 한 번만 한다고 위에 확실히 전달하시죠. 앞으로는 직접 해결하세요.”
“알겠습니다.”
나강인은 건물 내부 도면을 빠르게 넘기며 작게 말했다.
“지인아. 자료 모아서 3D로 만들어.”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모든 도면과 사진 정보를 조합해 내부 상황을 구성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반투명 건물이 스르륵 나타났다. 그가 들어가야 할 건물의 내부 집기까지 모두 표현되어 있었다.
- 일부 집기는 위치가 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안에 들어갔을 때 바뀐 게 있으면 실시간으로 수정해.”
- 알겠습니다.
그가 저 건물에 진입하려면 준비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순기 씨. 제가 지금 영화를 찍다 와서 변장한 상태인데, 이게 대충 한 거라서 벌써 무너지고 있어요. 손을 좀 봐야 합니다. 협상 전문가로 변장해야 하니까 40살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변장에 필요한 도구를 구해주시죠.”
박순기가 얼른 대답했다.
“영화사만큼은 아니지만 저희도 기본적인 도구는 있습니다.”
“좀 빌리겠습니다.”
“전부 다 쓰셔도 됩니다.”
***
나강인은 거울 앞에 서서 붓과 펜으로 변장을 수정했다. 헤어스타일은 굳이 바꿀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박순기는 맞은편에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나강인이 변장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변장술이 정말…. 진짜 40살처럼 보입니다. 잠깐 손댔다고 나이가 어떻게 그렇게 확 변합니까?”
“다른 사람을 보고 40살쯤의 얼굴이라고 판단할 때 흔히 인식하는 특징만 골라서 그려줬으니까요.”
“쉬운 일처럼 말하시네요?”
“설명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어쨌든 변장 속도가 정말 엄청나게 빠르십니다. 나 사범님은 왜 이런 것까지 잘하십니까?”
“손재주가 좀 있어서요.”
그가 변장을 마치고 옷을 내려다보았다.
“옷은 정장이니까 겉옷만 벗고 이대로 가도 되겠고….”
“겉옷을 벗으시게요?”
“촬영 현장에서 바로 왔잖습니까? 이거 영화 소품입니다. 찢어지면 물어줘야 합니다.”
“예?”
“놈들이 요구한 건요?”
다른 요원이 커다란 크로스백을 들고 다가왔다.
“놈들이 요구한 햄버거와 생수입니다. 응급 치료 키트도 같이 넣었습니다.”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치료 키트요? 누가 다쳤습니까?”
박순기가 대답했다.
“놈들이 요구한 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소독약과 항생제, 붕대, 간이 봉합 도구를 모아서 넣었습니다. 혹시 인질 중에 부상자가 있을지 몰라서요.”
“유나린 박사가 다쳤을까 봐?”
“만약을 대비한 것뿐입니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5년 후에 노벨상을 탄다는 말은, 그 연구가 이미 완성됐거나, 늦어도 한두 해 안에는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설사 미완성이라 해도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는 성과가 나왔겠지?”
- 그렇습니다.
“정부에서 특별대우할만하네.”
마지막 말은 평소처럼 말한 덕분에 박순기도 들을 수 있었다.
박순기가 물었다.
“나 사범님도 유나린 박사에 대해 잘 모르시면서 왜 아는 척을….”
“이 일 안 받을까 보다.”
박순기가 즉시 말을 바꾸었다.
“나 사범님의 전투력보다 더 대단한 건 정보 분석능력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드린 자료만 보고도 감이 오셨나 보죠.”
“변장도 끝났고 가방도 챙겼으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붙잡힌 사람들에게 좋을 게 없으니까요.”
***
나강인이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건물의 모든 창문은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그 창문 중 하나에 작은 동그라미를 쳤다.
- 적이 블라인드 틈으로 외부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나강인이 다가가자 건물 현관이 살짝 열렸다. 안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한국에 총이 왜 이렇게 많이 돌아다니냐? 이래도 되냐?”
- 총기 모델을 확인했습니다. 글록 26 반자동권총입니다.
“익숙한 총이네? 가평에서 대전차미사일을 훔치려던 놈들이 갖고 있던 거잖아.”
- 글록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베스트셀러입니다. 팔성테크 창고를 습격한 놈들과의 연관성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건 외국 이야기지. 한국은 마트에서 총을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잖아. 똑같은 무기 밀매업자가 팔아먹었을 거야.”
- 타당한 추측입니다.
가면을 쓰고 권총을 손에 쥔 사람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어디 소속이야? 경찰 협상팀?”
“햄버거 배달 왔다. 비켜라.”
AI 전지인이 적의 권총에 표시를 띄웠다.
- 총기를 탈취해 적을 제압하시겠습니까?
“우린 지금 인질을 구하러 가는 거다. 내부 상황파악이 먼저야.”
나강인이 정문을 통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시야 한쪽에는 건물 내부 구조가 반투명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다.
그런데 내부 상황은 그 홀로그램 3D 도면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AI 전지인이 차이점을 실시간으로 수정하며 보고했다.
- 내부 집기 상당수가 예상과 다른 위치로 옮겨져 있습니다.
홀로그램 도면에 그려진 집기의 위치가 빠르게 변했다. 수정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잠깐 위에서 보자.”
홀로그램 도면이 회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보니까 집기 배치 상태가 말이야. 경찰특공대가 진입했을 때 방어할 수 있는 형태네?”
- 경찰의 빠른 돌입은 방해하면서 방어에는 유리한 배치입니다.
“이걸 이렇게 배치한 놈은 아마추어는 아니겠어.”
-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의 솜씨입니다.
AI 전지인은 집기의 위치만 확인한 게 아니다. 가면을 쓴 놈들의 모습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입구에 있던 놈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썼다. 그런데 다른 놈들은 코끝부터 눈과 이마를 가리는 가면을 사용했다. 입과 턱은 모두 노출된 상태였다.
“자기들끼리만 알아보려고 저런 가면을 썼겠지. 목격자 정보로 몽타주를 만들려 해도, 입 모양만 본 것만으로는 그릴 수 있는 게 없으니까.”
- 적이 입과 턱의 모양으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면, 가면을 빼앗아 적으로 위장하는 작전은 쓰기 어렵습니다.
“저놈들은 그것까지 대비한 거야.”
나강인이 가면을 쓴 놈들의 홀로그램 영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번에는 얼굴이 아니라 총기 파지법을 살폈다.
“손 주변만 모아봐.”
반투명한 손 영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저놈들이 총을 잡는 자세가 중구난방이네? 같은 부대 느낌이 아니다.”
- 용병일 수 있습니다.
“여길 점령한 놈들은 모두 용병이라고 가정하자. 그중에 거점 방어 전문가가 최소한 한 명은 있어. 그놈은 특수부대 출신 용병이겠지.”
그가 이곳에 들어온 건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있는 인질은 세 명.”
세 사람은 로비 바닥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세 명은 한 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었다.
- 인질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세 명은 특공대가 진입했을 때 장애물로 쓰려고 여기 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안쪽에 있겠지.”
권총을 손에 쥔 용병이 다가왔다. 입구를 지키는 놈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밥은 가져왔냐? 거기 내려놔.”
나강인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용병이 권총을 겨누었다.
- 적이 요원님을 조준했습니다. 제압을 제안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면 그때 말해.”
용병이 말했다.
“가방 열어봐. 거기서 무기가 나오면 인질이 하나 죽는 거야.”
로비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나강인이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햄버거와 생수가 가득 들어 있었다.
“햄버거 배달 왔다니까.”
용병이 인질에게 손짓했다.
“어이. 너. 와서 세 개씩 가져가.”
여자 인질이 다가와 햄버거와 생수를 하나 꺼냈다.
“위에 있는 거 말고 밑에 있는 거.”
그녀가 안쪽으로 손을 넣어 다른 햄버거를 꺼냈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강인이 인질에게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이상한 거 안 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겨, 경찰이시죠?”
나강인은 조금 전에 경감 특채 제의를 받기는 했지만 거절했다. 그래도 그를 이곳에 투입한 건 경찰이다.
그는 용병들이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예. 여러분을 무사히 구출하기 위해 저놈들과 협상하러 왔습니다.”
용병이 여자 인질에게 말했다.
“뭘 떠들고 있어? 가져가서 하나씩 먹어.”
인질이 햄버거와 물병을 가져가 다른 두 사람에게 나눠준 후 하나씩 먹었다. 여자 인질은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잘 먹는 사람은 있었다.
용병은 햄버거를 먹는 인질들을 보면서 말했다.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인질부터 죽는 거야.”
햄버거를 먹고 물을 마시던 남자가 기침을 터트렸다.
“쿨럭. 쿨럭. 켁켁.”
로비에 있던 모든 용병이 권총을 나강인 쪽으로 조준했다.
햄버거를 가져가라고 한 용병이 물었다.
“뭐야? 이상한 게 들어 있어? 약이냐?”
“아, 아닙니다. 목에 사레가 들려서….”
“사레가 뭐야? 독이야?”
“그게 아니라, 놀라서 음식이 목에 걸렸습니다.”
나강인이 용병에게 제안했다.
“이건 저 앞에 햄버거집에서 산 거다. 물은 편의점에서 샀고. 의심스러우면 다른 사람들도 먹게 하든지.”
“그럴 생각이다.”
다른 용병이 나강인의 몸수색을 했다. 무기나 무전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강인은 몸수색을 예상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가져왔다.
용병이 그에게 말했다.
“가방 들고 따라와.”
나강인이 로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용병과 인질 여러 명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용병들은 권총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허리춤에 꽂아놓았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인질을 찾았습니다. 숫자가 일치합니다. 얼굴을 비교해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허공에 미리 파악한 인질의 신상 정보가 주르륵 떴다. 파란색으로 빛나는 작은 명함이 각자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명함 속에는 간단한 신상 정보와 얼굴 사진이 있어서, 나강인이 직접 비교해볼 수 있었다.
그 개인 신상 정보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박순기를 통해 입수했다.
-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중 두 명은 명함의 색이 붉은색이었다. 신상 정보가 없어 내용은 비어 있었다.
- 경찰이 제공한 신상 정보에 없는 사람을 두 명 발견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정보가 없을까? 경찰의 정보가 부실했거나, 아니면 인질이 아니겠지.”
-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용병은 인질 중 한 명을 시켜 햄버거를 나눠주게 했다. 용병이 아니라 인질들만 햄버거를 받았다.
용병이 인질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다들 먹어.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그래야 약이 들어 있는지 알지.”
인질들은 불안한 얼굴로 햄버거를 먹었다.
나강인이 내부를 둘러보았다. AI 전지인은 정보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홀로그램 3D 도면을 실시간으로 수정했다.
“그런데 유나린이 없네?”
- 파악된 인질 중 유나린을 포함한 두 명이 없습니다.
“왜 따로 관리하는 거지? 정체가 노출됐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 놈들에게 물어보면 역효과가 납니다. 유나린이 고가치 인질임을 감춰야 합니다.
“알아.”
용병이 가방을 뒤집어 나머지 햄버거를 책상 위에 쏟았다. 그런데 가방에서 햄버거 외에도 작은 상자가 하나 더 나왔다.
용병이 즉시 나강인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용병도 그 움직임에 반응해 권총을 잡았다.
“이건 뭐지? 무슨 장치냐?”
나강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응급 치료 키트. 치료용 약품과 치료 도구가 들어 있다. 확인하고 싶으면 열어봐.”
용병이 권총을 겨눈 채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후에 햄버거를 나눠준 인질에게 지시했다.
“네가 열어봐.”
인질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잡았다. 그가 나강인을 보며 물었다.
“저기, 선생님. 이거 진짜 폭탄 아니죠?”
“아니라니까요. 괜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총잡이들이 겁먹고 뒤로 물러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