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물리 협상 II
유나린 박사는 37살이다. 나강인은 40살쯤으로 보이게 변장하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녀가 권총 부품을 조립하는 나강인을 보며 생각했다.
‘나랑 몇 살 차이 안 날 것 같은데?’
다른 것도 궁금했다.
‘결혼은 했을까?’
그녀가 나강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요원님은….”
이 상황에서 결혼했냐고 물어보면 너무 뜬금없을 것 같아서 재빨리 질문을 바꾸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강인이 조립된 권총의 슬라이드를 앞뒤로 몇 번 움직여 소리를 확인하다가 유나린을 돌아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만?”
“궁금해서 그러죠. 저도 경찰에 아는 분들이 있어서 그쪽에 물어보면 이름 정도는 다 나와요.”
“그거야 알아서 하시고.”
나강인은 방금 용병 셋을 잡았다. 권총도 세 자루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유나린에게 맡겼다.
그는 권총 두 자루를 챙긴 후에 말했다.
“여기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조용히 따라와요. 나랑 가까이 있어도 위험하니까 넉넉히 떨어져서.”
유나린이 탁자 위를 돌아보았다.
“저 환자는요?”
칼에 찔린 직원이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이미 기절한 상태라서 그들의 대화를 듣지는 못했다.
“어차피 여기는 약이나 도구가 부족해서 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저놈들을 빨리 잡아야 부상자도 병원에 빨리 갑니다.”
나강인이 문에 다가가 귀를 대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밖에 누가 있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주변 소음을 수집했습니다. 문 주변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 들리면 바로 이야기해.”
나강인이 문을 슬쩍 열었다. 그래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가 유나린에게 물었다.
“혹시 손거울 있습니까?”
“네? 가방에 있는데, 가방을 아까 빼앗겨서….”
나강인이 문밖으로 쓱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 요원님은 제 소음 기반 위치추적능력을 더 신뢰하셔야 합니다.
“넌 실수를 자주 하잖아.”
- 자주는 아닙니다. 아주 가끔 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이기는 하다만.”
그는 복도를 보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인질들과 용병들의 현재 위치 파악되냐?”
AI 전지인이 중간에 거쳐온 지점의 상황을 홀로그램 3D 도면으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도면 위에는 사람 형태의 윤곽선이 여러 개 있었다.
- 인질은 파란색, 용병은 빨간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인질의 위치는 조금 전 목격 당시와 변하지 않았다고 가정했습니다. 용병은 위치를 이동했을 수 있습니다.
적의 숫자는 네 명이었다. 넷 다 붉은색 윤곽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선이 굵어졌다.
- 적이 발생한 소음을 분석해 한 놈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위치는 기존과 같습니다. 다른 셋은 예상 위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음…. 놈들이 이러고 있으면 말이야.”
나강인은 부상자가 있는 사무실로 도로 들어갔다. 유나린이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인식 교란이 좀 필요해서요.”
그는 방금 잡은 세 놈 중에서 제일 말을 많이 한 용병의 가면을 벗겼다. 그가 그걸 얼굴에 쓰며 말했다.
“다른 세 놈도 제자리에 있으면 일이 편할 텐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가면이 코와 눈만 가리고 있습니다. 적이 요원님의 입과 턱을 보고 동료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습니다.
“눈치채는 시간이 단 몇 초라도 늦어지면 돼.”
그는 적이 입고 있는 겉옷도 벗겨서 걸쳤다.
“이놈이 나랑 덩치가 비슷하니까, 어깨 형태도 비슷하게 내 체형을 조금 조정하자.”
- 어깨 근육의 수축과 이완 상태를 미세 조정하겠습니다.
그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고 한쪽이 살짝 기울어졌다.
“입 모양.”
- 조정했습니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훑으며 말했다.
“헤어스타일도.”
AI 전지인이 손의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분석해 허공에 나강인의 현재 머리 모양을 띄웠다. 기절한 용병의 모습도 같이 보여주었다.
“조금 다르네?”
- 조정하려면 로션이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응급 치료 키트의 약 중에서 연고를 꺼냈다.
그가 유나린에게 물었다.
“이 연고를 머리에 바른다고 머리카락이 빠지진 않겠죠?”
“네? 글쎄요? 그 연고는 두피에 닿지 않게 머리카락에만 바르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는 연고를 로션 대신 사용해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나강인이 유나린에게 물었다.
“이제 뒤에서 보면 저놈하고 비슷합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똑같지는 않지만 꽤….”
나강인은 권총 한 자루에서 탄창을 빼내고, 빈 권총은 서랍에 넣었다. 그는 탄창을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권총 한 자루만 허리춤에 꽂은 후에 말했다.
“다시 움직입시다. 내 뒤에 바짝 붙으면 위험하니까, 넉넉히 떨어져 있어요.”
유나린이 권총을 꽉 쥐었다.
“알았어요.”
“다시 말하는데, 그 권총은 쏘라고 준 거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위험해도 절대로 쏘면 안 됩니다.”
“네. 절대로 쏘지 않을게요.”
“유나린 씨가 위험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쏴요.”
그는 사무실을 나와 유나린을 복도에 남겨두고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목소리는 이 가면을 쓰고 있던 그놈 목소리로 변조해.”
- 알겠습니다.
나강인이 중간 지점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곳에는 네 명의 용병이 있었다. 적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
나강인은 적에게 가면을 쓴 앞모습을 잠깐만 보여준 후에 뒤로 돌아섰다. 이제 적들은 나강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용병들의 현재 위치가 예상과 일치합니다.
나강인은 어깨의 자세를 용병과 비슷하게 조정한 상태다. 여기에 익숙한 목소리까지 더하면 적을 속일 수 있다.
그가 뒤돌아선 상태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인질이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 협상하러 온 놈이 지금 인질을 살려보겠다고 난리다. 저놈도 의사란다.”
그 목소리는 말을 많이 하던 용병과 거의 비슷했다. 어깨도 비슷하게 처졌다. 헤어스타일도 큰 차이가 없었다.
용병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넌 왜 혼자 온 거야?”
나강인이 뒤돌아선 상태로 계속 말했다.
“협상하러 온 놈이 인질 옆에서 안 떨어지려고 하니까 그러지. 그래서 말인데.”
나강인이 양손을 들어 용병들이 볼 수 있게 했다. 그가 두 손을 다 앞쪽으로 흔들며 말했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봐. 나한테 진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까.”
중간 지점에 있던 용병 넷 중에 셋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한 놈이 인질들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강인이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모여보라니까? 진짜 좋은 아이디어야.”
AI 전지인이 보여주는 홀로그램 영상에는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현재 위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다. 뒤쪽 제일 멀리 있던 놈이 그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문제가 생겼다. 마지막에 움직인 놈이 너무 느렸다. 먼저 움직인 놈은 벌써 나강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 용병이 물었다.
“뭔데 그래?”
나강인은 시간을 더 끌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옆으로 다가온 용병이 나강인의 입과 턱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어? 너 왜 얼굴이….”
나강인이 옆으로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들켰네?”
여기는 외부와 통하는 정문 로비가 아니라 건물 안쪽 공간이다. 이 장소에는 외부와 연결된 창문이 없다. 외부에서 공격한다면 로비와 달리 대응할 시간이 조금은 있다.
그래서 다들 권총을 허리에 꽂아놓았지 손에 쥐고 있지는 않았다.
나강인의 옆에 온 용병은 이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즉시 허리춤의 권총을 잡았다.
나강인이 그러는 적의 목에 왼손을 콱 박아넣었다.
“켁!”
적이 목을 잡으며 고꾸라졌다. 나강인은 즉시 뒤로 돌아섰다.
용병 셋은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당황했다. 그들의 혼란에 빠진 표정은 가면으로 가렸는데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용병은 조금만 움직이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나강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적이 다급히 권총을 꺼냈다.
그는 다리를 쭉 뻗어 적의 턱을 향해 돌려차기를 날렸다.
턱을 걷어차인 용병은 몸이 휙 돌아가며 그 자리에 무너졌다.
둘을 잡았는데 아직 둘이나 남았다.
그는 적을 찬 후에 점프했다. 허리와 다리를 굽혔는데도 머리카락이 천장을 스칠 정도로 높이 뛰었다.
또 다른 용병은 권총을 막 뽑은 상태였다.
그는 공중에서 적의 양쪽 어깨를 두 발로 콱 찍으며 착지했다.
강력한 힘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용병은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강인이 체중을 실어 짓밟을 때 적의 몸에 강한 타격이 들어갔다. 적은 그 충격 때문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케….”
나강인이 무너진 적의 어깨를 발판삼아 마지막 놈을 향해 점프했다.
마지막 놈은 거리가 조금 멀었다. 사람을 밟고 뛰는 점프로는 거기까지 갈 수 없었다.
나강인은 공중에서 몸을 거꾸로 회전하며 책상 위를 두 손으로 짚었다가 두 팔로 책상을 밀며 다시 뛰었다. 마치 체조 선수가 마루 위를 뛰는 것 같았다.
적이 겨우 뽑은 권총으로 나강인을 조준했다.
AI 전지인이 적이 조준한 방향을 직선으로 표시했다.
나강인이 너무 빨리 움직였다. 적의 사격 예상 방향과 나강인은 한참 떨어져 있었다.
나강인의 손에는 방금 책상을 짚을 때 잡은 가위가 있었다.
- 가위를 투척하면 적이 사격하기 전에 제압 가능….
갑자기 AI 전지인의 경고가 바뀌었다.
- 인질 사이에서 적대 반응 감지!
AR 렌즈에 변화된 상황이 시각 정보로 표시됐다. 붉은색 경고 표시가 주르륵 떴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옆을 돌아보았다.
인질 중 한 명이 칼을 서둘러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칼날의 예상 궤적이 나왔다. 그 자세로 칼을 급하게 뽑으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에 칼날이 닿는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가짜 인질을 향해 가위를 던졌다. 칼을 꺼내던 놈의 어깨에 가위가 날아가 푹 박혔다.
“으악!”
적이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렸다.
나강인은 공중을 날아 다른 책상에 착지했다.
문제가 생겼다. 나강인이 가짜 인질을 제압하는 동안 마지막 용병이 권총 조준을 마쳤다. 적의 예상 사격 궤도가 그의 몸과 겹쳐졌다.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경고했다.
- 적 쏩니다!
적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총탄이 튀어나와 나강인을 향해 날아갔다.
나강인이 책상 위에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총탄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뒤쪽 벽에 박혔다.
나강인은 지금 책상 위에 있다. 인질들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덕분에 빗나간 총탄에 맞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강인이 용병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건 실패했다. 이미 총소리가 났다.
나강인이 책상 위에서 몸을 뒤로 젖혔다가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점프하며 권총을 뽑았다.
적이 다시 나강인을 향해 사격했다. 조준이 꽤 정확했다.
적이 어디를 조준했는지 아는 나강인은 왼손으로 책상을 잡으며 하체를 위로 번쩍 들었다. 적의 총탄이 그의 허리 아래쪽 공간을 지나갔다.
나강인은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섰다. 팔과 허리를 똑바로 펴자 발이 천장에 닿았다.
그는 거꾸로 선 상태로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적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으악!”
나강인이 다리를 움직여 천장을 걸으며 몸을 다시 회전시켰다. 그는 책상 옆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착지했다.
나강인이 똑바로 서서 적을 향해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총탄이 적의 반대쪽 어깨도 뚫었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로비의 적이 이곳의 이상 상황을 감지했습니다.
“총소리가 여러 번 났는데 모르면 이상하지.”
원래 계획은 총을 쏘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총소리 없이 싸우는 소리만 나면 로비에서는 이곳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총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으면, 시끄러운 소리가 좀 나도 사람을 패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나강인이 용병의 목소리로 로비에 있는 놈들을 속이고, 이곳과 같은 방법으로 그놈들을 유인해 처리하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짜 인질 때문에 적이 총을 발사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러면 로비에 있는 적은 인질부터 붙잡을 게 뻔하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로비의 소음을 분석했습니다. 적이 인질들을 제압했습니다.
“젠장.”
계획이 틀어진 건 인질 사이에 섞여 있던 가짜 때문이다.
나강인이 어깨에 가위가 박힌 가짜 인질에게 다가갔다.
“이 새끼 뭐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놈도 여기 직원입니까?”
직원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서류 상담 때문에 왔다고 했습니다.”
“오늘 처음 왔습니까?”
“아니요. 저번에도 와서 인사는 하고 갔는데….”
“그때 내부를 정찰하고, 오늘은 인질 사이에 숨었겠네. 그런데 그러면.”
경찰이 파악한 인질 명단에 없는 사람은 두 명이다. 한 명은 방금 칼을 꺼내다 날이 두 개 달린 가위가 어깨에 박혔다.
나강인이 명단에 없는 다른 한 명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그럼 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