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포위
지금 이곳에는 경찰이 파악한 명단에는 없는 인질이 두 명 있다. 그중 한 명은 가짜 인질이었다.
다른 한 명은 나강인이 권총을 들이대자 화들짝 놀라 외쳤다.
“저, 전 아닙니다!”
“뭐가 아닌지를 설명해.”
“그, 그게….”
“총에 맞으면 되게 아프다더라. 난 맞아본 적이 없지만, 내 총에 맞은 놈들은 많이 아파 보이더라고.”
파랗게 질린 남자가 눈알을 굴렸다. 나강인이 말했다.
“보다시피 내가 시간이 없어. 3초 주지. 하나.”
“유, 유나린 교수님을….”
“음?”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이곳을 점령한 용병들은 유나린이 누군지 모른다. 그들은 유나린이 평범한 의사라고 생각하고 따로 관리하지 않았다.
나강인이 총구를 더 들이밀며 물었다.
“왜? 납치하려고?”
총알이 튀어나오는 동그란 구멍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남자가 얼른 설명했다.
“아, 아닙니다. 스카우트하려고 따라다닌 겁니다.”
그 말을 그냥 믿어줄 수는 없다.
“너 소속이 어디냐?”
“명함이 있습니다! 지금 꺼내겠습니다!”
남자가 옷깃을 열고 손가락 끝으로 지갑을 꺼냈다. 한국인이라면 주머니에 손을 쓱 집어넣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외국인이네?”
“예? 예.”
남자가 조심스럽게 명함을 내밀었다. 나강인이 명함을 확인했다.
“오메가테크?”
“잘 모르시겠지만, 미국 회사입니다. 저희가 여러 분야를 연구하는데, 저희 회사 연구소에 유나린 교수님을 초빙하고 싶어서….”
“오메가테크가 의사 출신 생화학자를 왜? 분야가 다르잖아.”
“예? 어? 우리 회사를 아십니까? 하긴. 저희가 업계에서는 유명한 회사죠. 첨단 무기나 로봇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하, 하하.”
“웃지 말고.”
“예!”
나강인이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스칼렛 켈리가 받았다.
- 어머. 강인 씨. 오늘은 다른 이유 없이 순수하게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겠죠?
“그 회사에서 유나린 박사를 스카우트할 계획이 있습니까?”
- 어? 그걸 강인 씨가 어떻게 알았어요?
나강인이 명함에 적힌 이름을 말했다.
“스카우트 담당자 이름이 다니엘 최?”
- 나 지금 소름 돋는 거 알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
나강인이 다니엘 최의 사진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스칼렛에게 보냈다. 그런 후에 물었다.
“이 사람 맞아요?”
- 제시카. 이 사람이 다니엘 최 맞아?
스칼렛의 친구이면서 비서인 제시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맞아. 진짜 어떻게 알았대?
- 입이 가벼워서 정보를 막 흘리고 다닌 거 아냐?
- 귀국시켜서 탈탈 털어봐야겠다.
나강인이 물었다.
“맞나 보군요.”
- 네. 우리 직원 다니엘 최가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나중에 직접 물어봐요.”
나강인이 전화를 끊고 다니엘 최에게 말했다.
“신분은 확인했습니다. 오메가테크 직원이 맞군요. 유 박사를 스카우트하려던 것도 사실이고.”
다니엘 최는 당황했다.
“저기, 지금 누구랑 통화를….”
“그거야 곧 알게 되겠….”
갑자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돌발상황 발생! 유나린 박사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바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총소리도 들렸다. 총탄이 벽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젠장!”
나강인이 유나린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그가 복도 쪽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경고했다.
- 소음으로 적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벽 너머로 적의 위치가 보였다. 복도 안쪽 직선 방향이었다.
- 적의 사선에 노출됩니다!
나강인은 달리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복도 앞을 점프로 통과했다. 통과하면서 복도 안쪽을 재빨리 확인했다.
가면을 쓴 사람이 유나린을 왼팔로 잡고, 오른손은 앞쪽을 겨누고 있었다. 나강인과 적의 눈이 마주쳤다.
적이 방아쇠를 당겼다. 나강인은 복도 앞을 높은 점프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총탄이 신발 끝을 스쳤다.
- 적의 반응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요원님이 점프로 복도 앞을 통과하는 걸 적이 예상했다면, 총에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위험했습니다.
나강인은 반대쪽으로 착지해 벽에 등을 기대며 발끝을 보았다. 총알이 스친 자리가 살짝 찢어져 있었다.
“이 신발은 영화 소품인데 저 새끼가.”
-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지인아. 저놈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냐?”
- 부상자와 유나린 박사가 있던 곳 반대편 복도에서 접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 저놈이 있는 걸 몰랐지?”
- 아까는 소음을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놈이 유나린을 잡을 때까지는 왜 몰랐는데? 너의 소음 기반 위치추적능력을 믿으라며?”
- 조금 전 총격전 도중에 요원님의 귀에 설치된 독립형 보조 모듈이 외부 소음을 감소시켰습니다. 총성으로부터 청력을 보호하는 조치입니다.
그 독립형 보조 모듈은 음성 수집 장치가 아니다. 게다가 외부 소음 감소 기능은 AI 전지인이 막지 않으면 자동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AI 전지인은 나강인과 오감을 공유한다. 소리도 나강인의 귀를 통해 듣는다.
독립형 보조 모듈이 외부 소음을 감소시키면 AI 전지인이 듣는 소리도 줄어든다.
“그 기능 덕분에 총격전 속에서도 대화할 수 있다며.”
- 외부 소음을 차단해도, 저와의 대화는 내부에서 음성을 전달하는 방식이므로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소리는 외부 소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싸우는 동안 그놈이 밖으로 나와서 유나린에게 접근하고 뒤를 잡았다? 총소리는 유나린이 저항하다가 한 발 발사한 거고? 당연히 빗나갔을 테고.”
- 그렇게 추정됩니다.
“보통 놈은 아니네.”
- 적의 소음을 감지했습니다. 적이 움직였습니다.
AI 전지인이 적의 위치를 홀로그램으로 계속 보여주었다. 적이 복도 안쪽으로 이동했다. 유나린도 적에게 끌려갔다.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구출 대상이 양쪽에 생겼어. 로비에 세 명. 그리고 유나린과 부상자.”
- 유나린 박사부터 구해야 합니다.
“양쪽 다 구해야지.”
어쨌든 먼저 구출할 쪽을 선택하긴 해야 한다.
“로비 쪽을 먼저 전멸시키면 유나린을 인질로 삼은 놈은 궁지에 몰리게 돼. 궁지에 몰린 쥐는 선을 넘기 쉬워. 같은 패거리가 로비에서 인질들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야 저놈도 살 궁리를 하지.”
로비 쪽에 붙잡혀 있는 인질은 세 명이다.
“로비에 있는 놈들은 지금 당장 인질을 해치진 않겠지.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상황에서 인질을 죽이면 그놈들에게 좋을 게 없으니까.”
- 유나린 박사를 납치한 놈의 전투력이 다른 용병들보다 월등합니다. 그놈이 더 위험도가 높습니다. 그놈부터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이 중간 지점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해.”
- 맞습니다. 이곳이 제대로 방어되어야 요원님이 후방에서 습격당하지 않습니다.
나강인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간단한 개인정보를 확인했다.
나강인이 그중 네 사람을 골라 손으로 한 명씩 가리키며 지시했다.
“권총 한 자루씩 챙기고, 책상 뒤에 자리 잡고 방어해요.”
나강인이 지목하지 않은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예? 우리가 싸우라고요?”
“싫으면 그냥 항복하고 다시 인질이 되든가.”
“아니, 이봐요. 소속이 어디신데….”
재빨리 권총을 챙긴 다른 직원이 얼른 말했다.
“알겠습니다. 로비에는 세 놈만 있으니까 총은 우리가 더 많습니다. 우리끼리 방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지목되지 않은 사람이 다시 항의했다.
“왜 저 직원들만 권총을 주는 건데요? 나도 총 줘요!”
“총은 쏠 줄 알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요. 그럼 저 사람들은요? 한국에서 총을 쏴봤을 리가….”
“군대를 현역으로 갖다 온 사람들만 골랐습니다만?”
“아….”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그런데 여긴 도대체 정체가 뭐지? 왜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불만이 많지?”
강남 자칼 사건 때 카페에서 만난 손님들은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팔성테크 창고에서 대전차미사일을 노린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권총을 다룰 자신이 있는 사람만 총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묘하게 따지는 게 있고 항의도 있었다.
“이 회사 뭐야?”
- 총권도 훈련생 박순기가 준 자료에는 이 회사에 관한 건 빠져 있었습니다.
나강인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권총을 챙긴 남자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저놈들에게 잡혀 있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무슨 일을 하든, 총알이 알아서 피해 가는 거 아니면 닥치고 총 잡아요. 괜히 나서서 싸울 생각 하지 말고 방어나 철저히 해요.”
“예! 아, 그런데 다친 직원이나 손님은 어떻게….”
“손님은 내가 구출할 테니까.”
나강인이 구석을 보았다. 직원들의 가방이나 스마트폰 같은 개인 물품이 그쪽에 쌓여 있었다.
“유나린 박사의 가방이 어느 겁니까?”
***
나강인이 중간 지점에서 용병 넷과 총격전을 벌이기 조금 전에, 박순기가 건물 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야?”
지금 이곳에는 한 부서만 와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부서의 경찰이 다가와 물었다.
“저곳에 협상하러 들어간 분 말입니다. 혹시 당한 거 아닐까요?”
“에이. 설마요. 총소리가 안 들렸는데요.”
“무기가 꼭 총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놈들에게 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네? 총이 아니면 어떻게 나 사범님을 상대해요?”
“예?”
“이 상황에서 이상한 농담을 하시네.”
“아니. 그게 무슨….”
갑자기 건물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대기하던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현장 지휘관이 다급히 외쳤다.
“젠장! 병력 위치로 이동해! 저격수들은 상황 보고해! 민간인 통제 확실히 해! 아직 무슨 일인지 외부에 알리지 마!”
버스에서 대기하던 경찰특공대 병력이 뛰어나갔다. 형사들도 주변 통제를 위해 움직였다.
박순기도 빠른 걸음으로 현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속보로 걷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그가 불평했다.
“이 상황에 누가 전화야?”
박순기의 팀원이 따라가면서 말했다.
“형님. 윗분들이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었을 겁니다.”
박순기가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안 받을 수도 없고. 도대체 누구야?”
박순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세요? 제가 지금 바쁘니까 정식 절차….”
-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박순기는 나강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깜짝 놀랐다.
“헉! 나 사범님? 무슨 문제입니까? 붙잡혔습니까? 혹시 총에 맞으신 겁니까? 지금 그 총소리는 뭡니까?”
- 놈들의 중간 거점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좀 있었습니다. 이놈들이 총을 쏘네요?
박순기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래서요?”
- 몇 놈 잡고 인질도 몇 명 구출했습니다.
박순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다행입니다. 그럼 문제가 생겼다는 건….”
- 정문 로비에 인질이 세 명 잡혀 있습니다. 절대로 정문으로 진입하지 마세요. 놈들의 준비가 꽤 탄탄해서, 무력으로 진입하면 인질 세 명은 죽습니다.
“헉!”
박순기는 현장 지휘관에게 달려갔다.
“자, 잠깐만요! 대기! 대기!”
그는 현장 지휘관에게 방금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했다.
현장 지휘관이 도로 물었다.
“그러니까 인질 중에는 총에 맞은 사람이 없다는 거지? 협상하러 들어간 그 사람이 맞은 것도 아니고?”
“그렇죠. 우리 요원이 쉽게 총에 맞는 분은 아닙니다.”
“그럼 이제 어쩌자는 건데? 총소리가 났으니까 여기 상황이 곧 알려질 거야. 저대로 놔둘 수는 없잖아.”
박순기가 휴대폰으로 나강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놈들의 권총 몇 자루를 빼앗아서 여기 직원들에게 지급해 방어선을 쳤습니다. 이제 로비에 있는 놈들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아! 놈들을 포위하셨습니까? 그럼 양쪽에서 압박하면 되겠군요.”
- 내가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구급차도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시키고.
박순기가 긴장했다.
“예? 혹시 부상자가….”
-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칼에 맞은 사람이 있더군요.
“설마 유나린 박사가 찔렸습니까?”
- 아닙니다. 박사는 지금부터 내가 구하러 갑니다.
“예? 구하러 가다니요?”
- 이놈들은 딱 봐도 용병인데, 그중에 전투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놈이 박사를 납치해서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박순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범님. 유나린 박사는 절대로 다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안전하게 구출해야 합니다.”
- 구하러 가는 내 걱정도 좀 하시죠?
“예? 나 사범님 걱정을 왜 합니까? 유나린 박사를 데려간 놈은 한 놈이라면서요?”
- 됐고요. 여기서 잡은 놈들 얼굴 사진을 보낼 테니까, 누군지 좀 알아봐요.
“즉시 조사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박순기의 스마트폰으로 얼굴 사진 몇 장이 들어왔다.
정보 분석팀은 지금 저 건물을 점령한 놈들이 누군지 알아내려고 뛰어다니는 중이다.박순기는 그 사진들을 즉시 분석팀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