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나비효과
나강인이 권수연의 앞에 앉아서 물었다.
“유나린 박사가 뭘 연구했는지 알고 싶어.”
권수연은 나강인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유 박사님은 천재야.”
“네가 더 천재다.”
AI 전지인도 같은 생각이다.
- 제 초기 메모리에는 유나린 박사보다 권수연의 정보가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권수연이 지금 나이에 사망했는데도 그렇습니다.
권수연과 유나린은 완전히 다른 분야를 연구한다. 그런데 그녀는 평소에 유나린과 서로의 연구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사이다. 그러다 보니 대략적인 개념 정도는 충분히 설명할 지식이 있었다.
권수연이 신나서 10분 동안 설명한 후에 물었다.
“이제 알겠지?”
나강인의 눈동자는 이미 8분 동안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하나도 모르겠다.”
권수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설명한 건데….”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쉽게 설명했단다. 넌 좀 알겠냐?”
- 요원님과 저의 지적 수준은 비슷합니다. 요원님이 들어도 모르는 건 저도 알기 어렵습니다.
“넌 빠르게 읽을 건 잘하니까 혹시나 했다.”
- 고속 리딩은 제가 잘하긴 합니다.
“어쨌든 수연이는 유나린이 뭘 연구하는지 잘 알아. 거기다 이라미드 태양전지를 개발할 정도로 우수한 과학자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대답할 수 있겠지.”
나강인이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를 질문했다.
“수연아. 만약 유나린 박사님이 그 연구에 성공하면, 5년쯤 뒤에 노벨 생화학상을 탈 수 있을까?”
권수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천재라며. 그럼 연구가 대성공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 장르가 안 맞아. 그 연구가 대단한 건 맞는데, 노벨상하고는 상관이 없어.”
AI 전지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초기 메모리에는 유나린 박사가 2027년 노벨 생화학상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강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유나린은 기존에 하던 연구로 노벨상을 타는 게 아니야. 다른 게 있어.”
- 저에게는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
나강인은 며칠 전 사건 현장에서 유나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주력으로 연구하는 건 하나지만, 다른 것들도 조금씩 보고 있다고 했잖아.”
나강인이 권수연에게 물었다.
“유나린 박사가 따로 들여다보는 연구에 대해서도 알아?”
“어머. 넌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아는구나?”
“원래 연구에서 파생된 게 몇 개 있는데, 그건 머리 식히느라 잠깐씩 보는 정도야.”
“어떤 연구인지 설명 좀 해줘 봐.”
“나도 간단하게밖에 몰라.”
권수연이 그녀가 아는 걸 이야기했다. 파생 연구는 세 가지가 있었다.
권수연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AI 전지인이 말했다.
- 유나린 박사가 2082년에도 사용되는 방식의 인공 근육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2082년에는 인공 근육이 있어?”
- 몇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유나린 박사의 연구는 그중 한 가지 타입과 유사합니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연아. 밥 먹고 있어. 난 잠깐만.”
나강인이 고정석으로 돌아온 후에 팔을 들어보았다.
“혹시 내 팔을 유나린이 만들었냐? 이거 기계 팔이야? 어쩐지 힘이 세더라.”
- 요원님이 받은 신체 강화 시술은 인공 근육이 아닙니다. 인공 근육에 사용된 기술이 신체 강화 시술에 일부 응용되기는 했습니다만, 요원님의 팔은 사람의 팔입니다.
“혹시나 했다.”
- 기계로 만든 팔은 때가 밀리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구분하실 줄 알았습니다.
“됐고. 그럼 인공 근육은 어디에 쓰는 건데?”
- 유나린 박사가 연구하는 건 모터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 근육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 그 인공 근육을 사용하면 신체결손 환자의 의수와 의족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어? 의수?”
“2082년의 의수와 의족은 사람의 신경 신호를 인공 근육에 전달해 움직이는 방식으로 동작합니다. 모터 방식보다 훨씬 더 움직임이 자연스럽습니다.”
“유나린이 인공 근육 연구에 성공해서 그런 의수가 만들어지면, 노벨상을 타는 건 일도 아니겠구나. 이 연구가 진짜였어.”
AI 전지인이 말했다.
- 권수연의 말에 의하면 유나린은 인공 근육 연구를 머리 식히는 용도로만 생각했습니다. 5년 후에 노벨상을 타려면 이미 성과가 상당히 나와 있어야 합니다.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어차피 기존 연구는 실패했잖아.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겠지. 그리고 이것 하나만 팠겠지.”
나강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유나린이 이걸 연구했는지 알 것 같다.”
- 저는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블랙 사이드와인더에게 점령됐던 그 연구 지원 재단 말이야. 넌 유나린이 원래는 그곳에 가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한 일의 영향으로 방문 날짜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 그게 타당한 추측입니다.
“아니야. 그날 그곳에 유나린은 어차피 갔을 거야. 내가 과거에 한 일의 나비효과로 그날 간 게 아니야.”
- 요원님이 나서지 않았으면 유나린 박사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없었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야. 대신에 거기서 손이나 다리를 잃었겠지.”
그는 두목이 갖고 있던 수류탄이 생각났다.
“내가 먼저 잡지 않았다면 그놈들은 결국 경찰특공대와 싸웠겠지. 그러다 킬러의 수류탄이 터지면서 유나린이 다리를 잃었을 수도 있어.”
-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만약 유나린이 그 상황이 되면, 다시 예전처럼 걷게 해줄 고성능 의족 기술이 얼마나 간절하겠냐? 그런데 마침 그걸 만들 수 있는 인공 근육 연구를 손댄 게 있네? 그래서 가진 걸 다 쏟아부어서 그걸 연구하고, 화려하게 성공하는 거지.”
- 타당한 추론입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유나린은 인공 근육 연구로 노벨상을 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나린은 안 다쳤잖아.”
나강인이 유나린을 무사히 구출했다. 경찰특공대와 킬러 조직의 전투도 없었다. 수류탄도 터지지 않았다.
“이제 유나린은 다리가 멀쩡하니까, 굳이 인공 근육 연구를 할 리가 없잖아.”
나강인이 머리를 긁었다.
“이러면 나비효과 맞네.”
- 요원님이 유나린 박사를 너무 멀쩡하게 구출해서, 인류의 미래가 어두워졌습니다. 어서 유나린 박사의 다리를 어떻게든 하십시오.
“넌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하고 그러냐. 그런 짓 하면 유나린이 ‘내 다리 내놔’ 하면서 쫓아올 거야.”
-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설득이라도 하십시오.
나강인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유나린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고 치자. 다른 회사가 그 연구에 투자할까? 다들 유나린의 능력을 원하는 거지, 하고 싶은 걸 하게 두려는 건 아니거든. 연구가 실패한 후에야 접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 요원님의 의도가 매우 수상합니다.
“눈치챘구나? 그 연구비를 댈 사람이 나밖에 없어.”
- 그 연구가 인공 근육 연구라는 건 추정일 뿐입니다.
“어차피 배팅해야 한다면, 난 유나린의 인공 근육 연구에 하려고. 그리고 말이야.”
나강인이 씩 웃었다.
“원래 역사에서 유나린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걸 연구했겠냐? 이미 연구비로 집도 날렸다는데. 아마 여기저기서 겨우 긁어모은 돈으로 했겠지. 그러니까 투자금이 생각보다 많이 안 들 수도 있어.”
- 다시 생각해 보니 가성비가 참 좋은 투자입니다.
“우리 지인이는 말을 참 잘 바꾼단 말이야.”
- 불리한 상황에서는 전술적 후퇴도 필요합니다.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냐.”
AI 전지인은 말만 잘 바꾸는 게 아니다. 말을 돌리는 것도 잘한다.
- 2082년에는 인공 근육이 군사용으로도 사용됩니다.
“군사용? 부상자 재활?”
- 장갑병의 강화복에 사용됩니다.
“장갑병이 뭐야?”
- 방어력이 높지만 무거운 장갑을 몸에 두르고 중기관총을 개인화기로 사용하는 병사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대형 방패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탱커?”
- 그렇습니다.
“강화복을 입는 것보다 아예 나처럼 신체 강화 시술을 받는 게 더 낫지 않나?”
- 요원님이 받으신 군용 신체 강화 기술은 엄격히 제안된 조건에서 시술되며 위험부담도 큽니다.
“위험부담이라…. 내가 2082년에 이걸 왜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동의를 받고 한 거여야 할 거다. 아니면 그냥 콱… 엎을 방법이 없네?”
- 지금 시대에는 엎을 대상도 없습니다.
“난 지금 내 몸이 마음에 드니까 관대하게 넘어가야겠다.”
나강인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만. 너 혹시 강화복용 인공 근육을 만드는 법은 알아? 그걸 알면 유나린의 연구를 빨리 성공시킬 수 있잖아.”
- 당연히 모릅니다. 그건 전장에서 재료를 조합해 대충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혹시나 했다. 어쨌든 그 기술의 원래 목적은 재활 치료용이지?”
- 그렇습니다.
“그럼 됐어. 돈 땡겨서 투자하는 보람이 있잖아.”
***
나강인은 이튿날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을 만났다.
이태성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드래곤 플레이트의 미래 수익을 담보로 잡히겠다고요?”
“그럴 테니까 로열티를 미리 달라는 거죠.”
이태성이 머리를 굴려 손익계산을 했다.
“돈을 미리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금액 정도가 빠진다고 해서 우리 회사에 문제가 생기진 않으니까요.”
누군가가 영화 ‘햇살 좋은 날’을 개봉하지 못하게 해 THO 엔터를 파산시키고, 그 여파를 이용해 철인기공의 경영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나강인이 참여하면서 영화가 정상적으로 개봉하고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바람에 그 일은 완전히 무산됐다.
철인기공은 누구 짓인지 자체적으로 조사했지만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대신에 철인기공은 그 일을 교훈 삼아 운영자금을 충분히 쌓아두었다. 유사시에 현금을 추가로 확보할 수단도 넉넉히 마련했다.
게다가 나강인은 일시불로 전액을 달라는 게 아니다. 요청할 때마다 요청한 만큼 미리 지급해달라는 것이다. 그 정도는 철인기공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드래곤 플레이트의 라이센스를 은행에 맡기고 대출을 받는 것보다는, 우리 회사를 통하는 게 저도 좋지요.”
장점은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이러면 나강인 씨가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를 지금보다 많이 해서 대출금을 빨리 갚으실 수도 있겠군요?”
나강인이 개인 맞춤형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도면을 새로 만들어 넘겨줄 때마다 철인기공의 양산형 모델도 늘어난다. 그런데 그는 요즘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빠서 설계도는 가끔 하나씩 만든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설계도를 두 배로 공급하겠다고 제안하십시오.
나강인이 큰소리쳤다.
“당연히 공급량을 늘려야죠.”
이태성이 활짝 웃었다.
“당연히 대출해드려야죠. 원래 그러려고 했습니다. 하하하.”
“다행이네요. 헬멧은 안 꺼내고 해결돼서.”
이태성의 눈이 번쩍 빛났다.
“네? 헬멧이요? 혹시 드래곤 플레이트의 헬멧 버전도 있습니까?”
“드래곤 헬멧이라고 있긴 있는데 말이죠.”
“그럼 그것도 저희가 만들겠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풀 페이스 헬멧이라서 용도가 안 맞습니다.”
드래곤 플레이트에 각국 정부의 주문이 몰린 건, 방탄성능이 우수하면서 옷 속에 입어도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얇기 때문이다.
그런데 풀페이스 헬멧은 각국 정부 고위층이나 비밀요원이 머리에 쓰고 다닐 수가 없다. 머리에 쓰는 방탄 헬멧은 이미 많다.
이태성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요. 모자 형태면 딱 좋은데.”
AI 전지인이 말했다.
- 권총탄 한 발 정도는 모자 형태로 만들어도 막을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그거 만들 시간에 드래곤 플레이트를 더 만드는 게 연구자금 확보에 유리해.”
- 알겠습니다.
이태성은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출은 왜….”
“아는 사람이 하는 연구에 투자 좀 하려고요.”
이태성은 나강인이 공학 천재라고 생각한다. 그가 눈을 반짝였다.
“혹시 그 연구가 우리 업계와 관계가 있으면, 저희도 투자를 좀 할까요? 나강인 씨가 이렇게 나올 정도면 보통 연구는 아닐 것 같은데요.”
“어….”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 철인기공이 연구비를 낸다면 요원님이 돈을 땡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강인이 이태성을 보며 말했다.
“최근에 유나린 박사를 만났는데요.”
“아! 유나린 박사!”
“아시는군요.”
이태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이런. 저희하고는 분야가 완전히 다르네요. 하, 하하.”
“유나린 박사의 연구에 투자하려고요.”
이태성이 난감한 얼굴로 말렸다.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유나린 박사의 연구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연구는 실패했죠. 그래서 다른 연구를 좀 밀어줄까 합니다. 새 연구는 승산이 있어 보여서요.”
이태성이 다시 관심을 보였다.
“그건 또 어떤 연구입니까?”
“인공 근육 연구입니다.”
이태성인 이번에는 난감이 아니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건….”
이태성이 말을 멈추고 머리를 굴렸다.
‘인공 근육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겨우 이 정도 연구자금으로?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자인 나강인 씨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유나린 박사의 인공 근육 연구는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가시적인 성과가 나왔습니까?”
“머리 식히는 용도로 잠깐 들여다본 정도라니까, 연구된 건 거의 없겠죠.”
“아….”
이태성은 투자할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그런 무모한 일에 도대체 왜 투자하시는 겁니까?”
“유나린 박사가 해낼 거라고 믿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