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02화 (202/411)

202. 시계탑 앞 벤치

나강인이 한국대학교 시계탑 앞에서 말했다.

“지인아. 이 학교는 공부를 잘해야 올 수 있는 곳이야. 그런데 내가 여길 다녔다. 그게 무슨 뜻이겠냐?”

- 요원님의 평소 행동을 보면, 잔디 깔아주고 입학하신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눈치챘냐? 이 학교 잔디는 내가 다 깔고 들어왔어.”

- 과거가 기억나셨습니까?

“어? 농담 아녔어?”

- 당연히 농담이었습니다.

“우리 지인이는 너무 사람이 됐다. 나를 너무 놀려.”

- 제가 성장한 겁니다.

나강인이 유나린 박사를 교수실에서 만났다.

유나린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철인기공 쪽에서 연락받았어요. 특수 설계팀 팀장님이시라고요?”

나강인이 유나린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못 알아보시는군요.”

“네? 혹시 어디 세미나에서 뵌 적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냥 잠깐 스치듯이 만났던 것뿐입니다.”

유나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강인의 얼굴을 아무리 봐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그런 식으로 정보를 흘리면 유나린 박사가 요원님을 알아볼 위험이 있습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이렇게 모르는 채로 지나가는 것도 괜찮겠지.”

- 당연합니다.

나강인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철인기공의 정직원은 아니고 프리랜서로 설계팀 일을 돕고 있습니다.”

“네? 제가 듣기론 팀장님이 오신다고….”

“팀원들은 다 정직원인데 팀장인 저만 외주입니다.”

유나린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가 아는 교수 중에도 그런 식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머. 이렇게 젊으신데 실력이 대단하신가 봐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대단한 겁니다.

“어디 유나린 박사님만큼 대단하겠습니까? 하하하.”

유나린이 웃었다.

“에이. 아니에요. 저는 하던 연구도 완전히 말아먹었어요. 이제 이 일도 그만하려고 하는데요.”

유나린이 연구를 그만둔다는 말은 권수연이 피시방에 찾아와서 이미 했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그 연구가 안 되면, 다른 연구를 하셔야죠.”

“음…. 가끔 들여다보던 다른 연구 중에서 철인기공이랑 연결될만한 건 없어요. 그 회사는 군과 경찰용 장비를 만드는 곳이잖아요. 저는 분야가 많이 달라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지금은 다르지만, 미래의 장갑병용 강화복은 철인기공의 현재 사업과 연관이 많습니다.

“그건 너무 먼 미래 이야기잖아. 2082년에는 철인기공이란 이름의 회사가 없다며.”

- 요원님이 개입하셔서 그 회사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않게 막았으니까, 이제는 2082년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유나린에게 말했다.

“철인기공은 적어도 지금은 유 박사님의 연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네? 연구비 문제로 방문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회사가 유 박사님의 연구를 지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지원하는 겁니다.”

“네?”

“철인기공이 절차만 대행합니다. 모든 연구비는 제 주머니에서 나갈 겁니다.”

유나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뭘 좀 잘못 알고 오셨나 보다. 제 연구는 직장인이 월급을 모아서 해결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에요.”

“철인기공에서 만드는 제품 중에 제가 개발해서 라이센스를 준 게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돈을 투자할 겁니다. 충분하진 않겠지만, 연구를 계속하실 정도는 될 겁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럼 철인기공에서 월급을 받으려고 일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나강인이 뭘 개발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한두 푼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이해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연구가 실패 판정을 받은 건 아시죠?”

“물론 압니다.”

“그런데 왜….”

“그 연구에서 파생된 인공 근육 연구가 있더군요.”

“아. 그거요. 재미있어서 좀 들여다보던 거예요.”

“그 연구를 지원하겠습니다.”

유나린은 철인기공의 연락을 받았을 때보다도 더 혼란스러웠다.

“이해가 안 가요. 인공 근육은 그냥 잠깐 본 거예요. 그리고 그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성공하실 겁니다.”

“전 자신이 없는데….”

AI 전지인의 초기 메모리에는 유나린이 2027년 노벨상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나강인이 장담했다.

“대성공해서 노벨상을 타실 겁니다.”

유나린은 깜짝 놀랐다.

“어머?”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얼마 전에도 그런 말을 해준 분이 있었어요.”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진짜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주고 이 학교에 입학했습니까? 지난번에 변장한 상태에서 한 말을 또 하셨습니다.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제안을 철회하십시오.

나강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 그래요?”

유나린은 방긋 웃었다.

“그런 말을 해주는 분이 또 계셔서 저 지금 무척 행복해요. 최근에 제 연구는 망했고 저도 거품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힘이 많이 나네요.”

“휴우. 다행입니다.”

“왜 안도의 한숨을….”

“힘이 나면 인공 근육을 연구하실 테니까요. 안심되네요. 하, 하하.”

“그렇다고 한숨까지….”

나강인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하실 거지요?”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노벨상을 탈 거라고 응원해준 분도 계시고…. 아! 팀장님 말고 다른 분이 계세요. 두 분이나 그런 말을 해주시니까 힘내볼게요. 물론 노벨상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요.”

“그럼 구체적인 연구비 지원 방안을 논의해볼까요?”

“네. 물론 논의하다가 의견이 서로 다르면 없던 일이 되겠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

협의는 삼십 분만에 끝났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비 지원은 철인기공을 통해서 진행할 겁니다. 모든 서류작업도 철인기공이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왜 직접 안 하시고요?”

“제가 좀 바빠서 서류처리까지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알아서 대행해주면 일이 편해집니다.”

“아. 그렇겠네요.”

“그럼 전 이만.”

나강인이 가볍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유나린은 혼자 남아서 두 팔을 쭉 폈다.

“역시 난 연구가 천직인가보다. 뭔가 다시 하려고 하니까 힘이 나네.”

그녀는 자리를 정리한 후에 밖으로 나갔다. 오늘따라 날씨도 좋았다.

권수연이 지나가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교수님. 오늘은 표정이 되게 밝아 보이세요.”

“응.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거든.”

권수연이 손뼉을 쳤다.

“어머. 진짜요? 잘됐다!”

“갑자기 연구비가 생겨서, 안 할 수가 없어.”

“연구비요? 어디서요?”

“연구비는 철인기공이라는 회사에서 나오는데, 실제 돈을 내는 분은 따로 있어. 비공개로 하기로 해서 이름을 말해줄 수는 없고. 미안.”

“에이. 괜찮아요. 제가 누군지 듣는다고 아는 것도 아닌데요.”

유나린이 물었다.

“그러는 넌 표정이 왜 이렇게 밝아?”

권수연이 생긋 웃었다.

“친구가 오늘 학교에 놀러 와서 커피 마시러 가요.”

“친구? 나도 끼어도 돼?”

권수연이 즉시 대답했다.

“안돼요!”

유나린이 웃었다.

“친구가 남자구나? 잘 놀다 와.”

***

나강인은 학교 시계탑 앞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지인아. 만약에 전쟁터에서 인공 근육을 구했다고 가정하면, 네가 의수나 의족을 만들 수 있을까?”

- 2082년이라면 최소한의 기능을 가진 대용품 정도는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유나린 박사의 연구가 성공해서 인공 근육이 손에 들어온다면?”

- 대용품조차 만들 수 없습니다.

“어째서?”

- 현재와 2082년 사이에는 60년의 기술 격차가 존재합니다.

“넌 낙후된 지역의 옛날 기술도 잘 활용하잖아. 지금 시대의 해킹 기술도 잘 쓰고, 다리미가 없으면 철판을 펴서 옷을 다릴 정도로 응용력도 좋잖아. 그런데 그건 왜 안돼?”

- 사람의 신경 신호를 인공 근육에 전달하는 부품의 제작 기술을 모릅니다.

나강인이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 문제가 있네. 어딘가에 그 기술을 개발한 회사가 없을까?”

- 관련 정보를 조사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너 요즘은 우리 임무는 제쳐놓고 영화나 드라마에 심취해 있더라. 그러니까 모르지.”

- 같이 보셨잖습니까?

“드라마가 재미있더라고.”

권수연이 시계탑 앞에 도착해 나강인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강인아!”

나강인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커피 마시러 가자.”

- 버블 밀크티를 추천합니다.

“아이스 달고나 카페라테 마실 거다.”

- 그것도 맛있습니다. 제일 큰 사이즈를 추천합니다.

“쟤가 사는 건데 당연하지.”

***

스칼렛 켈리가 한국에 들어왔다. 친구이자 비서인 제시카도 함께였다.

스칼렛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홈. 스위트 홈.”

“너 미국 사람이야.”

“우리 할머니가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하시는지 알아?”

“너희 할머님은 평소에도 한국에 자주 오시잖아. 지금도 한국에 계셔.”

“응? 우리 할머니가 어디 있는지를 왜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아?”

“너 오늘 한국 들어오는 거 아시고 전화하셨더라. 들어오면 끌고 오래.”

“우리 제시카가 할머니의 스파이였어!”

“내가 스파이면 이걸 말해주겠니?”

“할머니 피해 다녀야겠다. 만나면 또 잔소리하실 거야.”

“오늘 스케줄 중에 어디부터 갈 거야?”

“가까운 데부터 가야지.”

***

유나린이 난처한 얼굴로 거절했다.

“오메가테크의 스카우트 제의는 고마운데요. 저는 여기서 해야 하는 연구가 있어요.”

스칼렛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구요? 그건….”

옆에서 제시카가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하시던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난 것으로 알아요.”

유나린이 손을 흔들었다.

“아. 그 연구가 아니라 다른 거 할 거예요.”

“어떤….”

“짬짬이 연구하던 걸 본격적으로 하는 건데요. 아직 공개하긴 좀 그래요. 이제 막 시작하는 거라서요.”

“연구비가 바닥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미 그녀의 연구는 실패하고 연구비도 바닥났다는 소문이 업계에 퍼졌다. 그래서 오메가테크는 지금이 그녀를 스카우트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스카우트 작업을 위해 보냈던 직원이 인질 사건에 휘말렸다. 그래서 스칼렛은 그 직원을 본사로 복귀시키고 직접 찾아왔다.

두 사람이 이 일 하나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 건 아니지만, 제시카는 이번 스카우트가 성공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아니었다.

유나린이 웃었다.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분이 계셔서요.”

제시카가 머리를 굴렸다.

‘어디서 선수를 쳤을까?’

그녀는 문득 나강인이 스칼렛에게 전화했던 일이 생각났다.

‘두 번이나 유나린 박사에 대해 물었지. 설마? 에이. 말도 안 돼. 하는 일이 전혀 다르잖아.’

스칼렛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냥 대놓고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이 나강인?”

유나린은 깜짝 놀랐다.

“앗! 알고 계셨어요?”

“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 알겠네요. 나강인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이렇게 선수를 치네.”

제시카가 속삭이는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역시 나강인이야. 언제나 예상한 것 이상을 하잖아.”

“잘하는 게 많은 건 알았는데, 우리 분야까지 손댈 줄은 몰랐어. 아니, 우리 쪽 일을 뭘 안다고 이런대?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방해하나?”

“어떻게 할 거야?”

제시카의 질문은 유나린에게 더 좋은 스카우트 조건을 제시할 거냐는 의미였다.

스칼렛이 고개를 흔들어 아니라는 뜻을 전한 후에 유나린에게 말했다.

“나강인 씨와 먼저 약속을 했는데 제가 나중에 와서 조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이번에는 유나린이 물었다.

“근데요. 나강인 씨를 잘 아시나 봐요? 저는 그분을 오늘 처음 만나서요.”

스칼렛은 멈칫했다.

“오늘 처음 만났다고요?”

“네.”

나강인이 킬러와 용병들을 쓸어버리고 유나린을 구출할 때, 그 현장에 오메가테크의 직원도 있었다.

스칼렛은 복귀한 직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요원이 변장한 나강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나강인이 현장에서 직원의 신원을 확인할 때 스칼렛과 통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나린은 나강인이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

스칼렛이 실실 웃었다.

“그러시구나. 처음 보는구나. 으흐흐.”

“네? 왜 그렇게 웃으시는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재미있는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호호호. 오호호호!”

***

스칼렛과 제시카는 한국대학교 시계탑 앞 벤치에 앉았다.

스칼렛이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야.”

“뭐가?”

“이 대학 연구소에서 계속 연구한다잖아. 경쟁 회사에 스카우트된 게 아니니까 그게 어디냐.”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연구비를 대는 사람도 경쟁사가 아니라 나강인이잖아. 더 잘됐지.”

제시카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강인 씨는 전투 전문가잖아.”

“유명 무술감독이기도 하지.”

“어느 쪽이든 유나린 박사의 연구와는 관계가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연구비를 지원하는 거지? 그리고 연구비는 어디서 나왔지? 부자는 아니라고 아는데?”

“나도 그게 궁금해.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스칼렛이 나강인을 생각하고 툴툴댔다.

“오늘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는데.”

“선약이 있다는데 어쩌겠어.”

“아니, 그래도…. 내가 보자고 했으면 그 선약을 미뤄야 하는 거 아냐?”

“나강인 씨가?”

“하긴. 그럴 인간이 아니지.”

“노는 건 내일 하고 오늘은 일이나 열심히 해.”

스칼렛이 한국에 유나린만 만나러 온 게 아니다. 다른 스케줄도 있다.

제시카가 물었다.

“유나린 박사와 이야기가 너무 빨리 끝나서 철인기공과의 약속까지는 시간이 남아. 어떻게 할까?”

스칼렛이 시계탑 앞 벤치에서 일어났다.

“가까운 카페에 가서 시원한 커피라도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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