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팬
오메가테크 사장 스칼렛은 제시카와 함께 시계탑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앗! 나강인이다!”
나강인은 카페에 먼저 와서 아이스 달고나 카페라테를 마시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권수연은 평범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스칼렛이 당장 그쪽으로 걸어가 따졌다.
“아니, 나강인 씨! 이러기 있어요? 나랑은 만날 시간이 없다더니! 여기서 이럴 시간은 있으면서!”
나강인이 권수연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다고 했을 텐데요?”
“그러긴 했지만!”
권수연은 스칼렛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대박! 진짜 스칼렛 켈리야!”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알아요?”
“팬이에요!”
“응? 내가 아이돌도 아니고 무슨 팬?”
“저번에 내셔널 머신 인텔리전스에 기재된 논문 봤어요. 지난달에 실리콘밸리에서 강연하신 영상도 봤고요. 그거 보고 진짜 감동했어요!”
“훗. 그쪽으로 팬이구나.”
스칼렛이 나강인을 돌아보며 머리카락을 뒤로 휙 넘겼다.
“나강인 씨. 봤어요?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한국에도 내 팬이 있다고요.”
“아, 예.”
그녀가 더 자랑하려고 권수연에게 물었다.
“혹시 이 학교에 다녀요?”
“네. 박사과정이요.”
“어머. 고생할 때다. 근데 나 때는 연구하느라 바빠서 이렇게 남자하고 커피 마실 시간도 없었는데.”
“네? 그 정도로 바쁘진 않은데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스칼렛 켈리는 제 초기 메모리에 이름조차 없습니다. 유나린은 노벨상 수상경력으로 권수연에게 비벼는 볼 수 있지만, 스칼렛은 권수연에 비하면 듣보잡입니다.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스칼렛이 여긴 어쩐 일로?”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남아서 커피나 한 잔 마시러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딱 마주쳤네요? 운명인가?”
“운명 아니고 우연이니까 커피 마시다 가요.”
제시카가 커피를 주문한 후에 다가왔다.
“스칼렛. 없어 보이게 이러지 마.”
“응? 내가 없어 보여?”
“많이.”
“쳇.”
나강인도 한마디 했다.
“내가 지금 친구랑 있습니다만?”
“알았다고요. 다들 나만 가지고 뭐라 그래. 그럼 내일 봐요.”
제시카와 스칼렛이 다른 자리로 간 후에 권수연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스칼렛 켈리를 어떻게 알아?”
“오다가다 몇 번 우연히 엮였어.”
“선약 이야기는 뭐야? 내일 본다는 건 또 뭐고?”
“스칼렛이 오늘 한국에 들어온다면서 저녁때 잠깐 보자더라. 난 너랑 먼저 저녁 약속을 했잖아. 그래서 거절했지.”
권수연이 배시시 웃었다.
“강인아. 스칼렛 켈리 같은 유명인사보다 내가 더 중요하구나?”
AI 전지인이 말했다.
- 오늘은 권수연이 페넬로페에서 저녁밥을 사는 날입니다. 스칼렛 켈리보다 페넬로페의 요리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커피 다 마셨으면 들어가라. 저녁때 보자.”
“응!”
***
오메가테크 사장 스칼렛 켈리가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이 만났다.
이태성이 물었다.
“드래곤 플레이트의 공급 계약을 맺고 싶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라이센스 생산을 원해요. 미국에서요.”
이태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는 굉장히 고난도 작업이라서….”
“개인 맞춤형과 양산형이 있다는 건 알아요. 맞춤형 설계도가 나올 때마다 양산형 모델이 늘어난다는 것도 알고요.”
철인기공의 양산형 드래곤 플레이트는 체형이 맞는 사람만 살 수 있다. 맞는 양산 모델이 없어도 주문할 수는 있지만, 그 경우는 적당한 모델이 나올 때까지 예약 상태로 대기해야 한다.
스칼렛이 제안했다.
“철인기공의 양산형 모델을 우리도 라이센스로 생산하고, 거기에 추가로 우리가 원하는 모델을 설계해야죠. 맞춤형을 주문할 VIP는 우리도 많으니까요.”
드래곤 플레이트를 먼저 주문한 곳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주문한 열 개는 딱 맞는 맞춤형은 아니다. 대상자의 신체를 철인기공에서 정밀 측정한 게 아니라, 그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측정한 데이터를 보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에서도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드래곤 플레이트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라서 한국 정부의 주문은 우대해서 처리해주고 있다.
그 외에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주문은 들어왔다.
하지만 처음 주문한 동아시아 국가와 한국 정부의 물량을 처리하기도 바빠서, 다른 나라의 맞춤형 주문은 많아야 하나 정도 나갔다. 그 하나조차 못 받은 곳은 양산형이라도 구입했다.
스칼렛이 말했다.
“미국에도 철인기공의 기존 양산형과 비슷한 체형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체형도 많아요.”
“한국과 미국은 식생활과 문화가 완전히 다르니까 체형도 다르긴 하겠죠.”
이태성은 예전부터 오메가테크와 협업하고 싶었다. 만약 스칼렛이 다른 조건을 걸었으면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싶을 만큼 협업을 원한다.
스칼렛도 그런 사정은 눈치채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제안이 통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이태성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곤란한데요.”
“네? 왜요?”
“설계도면이 요즘 뜸하게 나와서, 저희도 주문받은 걸 다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메가테크만 우대하면 다른 국가에서 항의가 들어올 겁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요? 신은하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입고 있는 걸 분명히 봤거든요? 연예인에게 만들어줄 정도면 제작에 여유가 있는 거 아닌가요?”
“아. 그거는….”
이태성은 어떻게든 오메가테크와 협업하고 싶다. 그가 머리를 굴렸다.
‘나강인 씨가 앞으로 공급량을 늘려준다고 했으니까….’
“제가 설계팀장과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이리로 오라고 하시죠. 같이 이야기하게.”
“지금 외부에 있어서요. 잠시만요.”
이태성은 나강인과 통화하기 위해 회의실을 나갔다.
제시카가 스칼렛에게 말했다.
“느낌이 이상해.”
“이야기가 잘 되고 있는데 뭐가?”
“왜 본부장이 팀장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느낌이 들지?”
“응?”
“설계팀장이 외부에 있는 것도 이상해. 회사에서 설계에만 매달려도 부족한 상황인데.”
잠시 후에 이태성이 돌아왔다. 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 저녁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는군요.”
스칼렛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 내일 저녁에는 제가 스케줄이 있어서요. 다른 시간을 잡아주세요.”
“예? 내일 저녁때 두 분과 만날 약속을 이미 잡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난 내일 저녁에 나강인 씨를 만나는데.”
“그러니까요.”
“예?”
“아….”
이태성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약속을 잡았다고 해서,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뭘….”
“드래곤 플레이트 개발팀장이 나강인 씨입니다.”
스칼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모르셨습니까? 나강인 씨에게 듣기로는, 이미 작업실을 보고 갔으니까 눈치챘을 거라던데….”
“나강인 씨의 작업실…. 보긴 봤죠.”
그곳에 좋은 장비가 많이 있는 건 봐서 안다. 하지만 그건 개인이 살 수 있는 장비 중에서 좋은 것이다. 오메가테크의 장비는 차원이 다르다.
“나강인 씨가 거기서 하는 건 알바라고 들었는데….”
이태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알바는 아니고, 외주 설계입니다. 나강인 씨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개발했으니까요.”
스칼렛은 더 크게 당황했다.
“네? 어?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제시카도 놀라서 눈만 깜빡이다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우리가 아는 나강인 씨는 최강의 전사이면서 연예계에서도 활동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연구 개발을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이태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나강인 씨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아는 나강인 씨는 공학 천재입니다.”
***
스칼렛과 제시카는 차에 탄 후에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칼렛이 말했다.
“제시카. 나 한국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아.”
“나도. 우리가 알던 나강인은 빙산이 일각인가 봐.”
멍하니 있던 스칼렛은 뒤늦게 다른 것도 깨달았다.
“앗! 잠깐만. 유나린 박사도 나강인이 먼저 채갔잖아!”
“그랬지. 연구비까지 줘가면서 우리가 스카우트 못 하게 막았지. 그 돈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드래곤 플레이트를 팔아서 번 돈이구나.”
“신은하가 입고 있던 드래곤 플레이트는 나강인이 만들어준 거겠지?”
“설계는 개발자 본인이 직접 하면 되고, 제작은 그 공방에 있는 장비를 써서 했겠지.”
“나는?”
“응?”
스칼렛이 발끈했다.
“나한테는 왜 선물 안 하는데?”
제시카가 스칼렛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내일 저녁때 직접 물어보든가.”
“그럴 거야.”
스칼렛 덕분에 정신이 돌아온 제시카가 차를 출발시켰다.
스칼렛이 옆자리에서 툴툴댔다.
“양파도 이만큼 까면 다 없어졌겠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그러게. 흥미가 생기네.”
“뭐야? 제시카! 내 거니까 넘보지 말지?”
“스칼렛.”
“왜?”
“네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오늘 보자고 했다가 까인 거 생각 안 나?”
“야. 팩트로 맞으니까 더 아프다.”
***
나강인은 유나린을 설득하려고 학교에 간 김에 권수연도 만나 커피를 마셨다. 그는 그 후에 혼자서 제작 거점으로 돌아갔다가, 저녁 좀 늦은 시간에 레스토랑 페넬로페로 갔다.
권수연은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서 자기 차를 몰고 왔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권수연은 삼각별이 달린 수입차를 탔고 나강인은 연식이 오래된 국산차를 탔다.
권수연은 몸이 아플 때 나강인의 차를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오래된 차의 엔진 소리가 좋지 않다는 걸 안다.
그녀가 주차장에서 나강인의 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빠한테 말하면 차 한 대 정도는 바로 뽑아줄 텐데. 수술실에서 네가 보조해줘서 그런지 아빠가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시더라고.”
나강인이 이정호 과장과 함께 수술했다는 건 권수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됐어. 새 차는 다시 손보는 게 귀찮아.”
“응? 새 차인데 손을 왜 봐?”
나강인은 이 차의 내부에 방탄판을 두르고 엔진 출력 부스터까지 달아놓았다. 차의 프레임도 직접 보강했다. 다른 장비도 몇 개 추가했다.
나강인은 틈틈이 이 차의 방어력과 기능을 보강했다. 차의 전투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졌다.
단점은 겉보기에 오래됐다는 것과 차가 무거워져서 엔진 소리가 나빠진 것, 그리고 기름을 많이 먹는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만약 새 차를 사면 지금까지 한 그 많은 강화 작업을 그대로 다시 해야 한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적이 이 차를 얕잡아보면 그만큼 방심하게 됩니다. 그 위장 효과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나강인도 같은 생각이다. 그가 권수연에게 말했다.
“난 이 차가 편해.”
두 사람은 건물 7층에 있는 레스토랑 페넬로페에 들어갔다.
직원이 나강인을 보고 영업용이 아니라 진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나 감독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어머. 감독님 맞잖아요.”
이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자칼 일당에게 붙잡혔을 때 구하러 온 사람이 바로 나강인이다. 그래서 이곳 직원들은 나강인에게 특히 더 친절했다.
나강인과 권수연이 자리에 앉았다.
이 레스토랑은 따로 음식을 주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날의 메뉴는 레스토랑에서 정한다. 서비스도 레스토랑 마음대로 나간다.
권수연이 먼저 나온 음식을 맛보며 말했다.
“여기 진짜 맛있다.”
“맛있지.”
AI 전지인도 이 레스토랑을 좋아한다.
- 여기 요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습니다.
권수연이 말했다.
“그거 알아? 여기 사장님이 오규철 셰프래. 방송에 자주 나오는 그분 말이야.”
“어. 알아.”
“내가 전에 아플 때 밥을 거의 못 먹었잖아. 그때 그분 방송을 봤는데, 너무 맛있어 보이는 거야.”
사장이면서 대표 셰프인 오규철이 서비스 요리를 가지고 다가오다가 그 말을 들었다.
그가 요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실제로 드셔 보니까 어떠세요?”
“앗! 오규철 셰프님! 팬이에요!”
“고맙습니다.”
나강인이 툴툴댔다.
“넌 어떻게 보는 사람마다 다 팬이냐?”
“오늘은 그런 분들만 보네?”
오규철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강인 씨는 요즘도 바쁘세요?”
“더 바빠질 예정입니다.”
드래곤 플레이트의 생산량을 늘리려면 설계에 시간을 더 써야 한다.
“이런. 그러면 안 되는데….”
오규철은 나강인을 가면 셰프에 다시 출연시키고 싶다. 담당 피디는 매일 전화해서 아쉬운 소리를 한다. 방송국 윗선은 피디를 닦달하고 시청자들의 출연 요구도 강하다.
권수연이 물었다.
“어머. 오 셰프님. 강인이하고 아는 사이세요?”
“그럼요. 아주 잘 알죠.”
권수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셰프님 보면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말씀하시죠.”
“방송에 나온 그 로봇 가면 셰프는 어떤 분이세요? 제가 그 디저트를 진짜 너무 먹어보고 싶어서요.”
“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