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섭외
스칼렛이 물었다.
“그러니까 나강인 씨가 의수의 구조 설계를 하고.”
대용품의 기본 구조는 AI 전지인이 알고 있다.
“우리 회사는 신호 전달을 맡고, 인공 근육은 유나린 박사가 개발한다? 삼자협업을 하자는 거네요?”
“그렇죠.”
“나강인 씨의 구조 설계 능력이야 드래곤 플레이트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그건 괜찮은데….”
제시카가 끼어들었다.
“나강인 씨. 이건 말이 안 되는 제안이에요.”
“오메가테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기술을 활용하면 맡은 부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그걸 해결하는 데도 예산은 들어가요. 우리는 주식회사예요. 실패가 확실한 연구에 예산을 쓸 수는 없어요. 인공 근육에 특화된 구조 설계는 우리가 재활용하기 힘들 테고요.”
스칼렛도 생각이 같았다.
“맞아. 내가 아무리 나강인 씨를 좋게 봐도 이건 아니지. 콩쥐도 물항아리 구멍을 막아줄 두꺼비는 있었는데, 이건 그냥 구멍이잖아.”
나강인이 말했다.
“두 사람은 되게 부정적이군요. 오메가테크는 기술 투자에 돈을 많이 쓰는 회사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뭔가 가능성이 보일 때 이야기죠. 그런 수준의 인공 근육은 지금 기술로는 만들 수 없어요. 이 협업은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요.”
나강인도 무작정 요구하는 건 아니다.
“대신에 드래곤 플레이트를 미국에서도 생산하시죠.”
“네?”
“개인 맞춤형 설계도면도 만들어주고, 생산 과정에서 철인기공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도 도와주겠습니다.”
스칼렛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시카가 얼른 스칼렛의 팔을 잡았다.
“정신 차려. 드래곤 플레이트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제품이야.”
“그치만 실패해도 개발비로 쓴 돈이랑 드래곤 플레이트 수익이랑 똔똔은 되지 않을까?”
“그야….”
“길게 가면 결국은 수익 쪽이 더 많아질 것 같고, 우리가 맡은 기술은 잘만 응용하면 다른 데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러면 협업이 망해도 우리는 손해가 아닌데?”
“응용이 가능해?”
“높은 확률로?”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난 찬성.”
스칼렛은 신은하가 가지고 있는 드래곤 플레이트가 생각났다.
그녀가 입꼬리를 조금 올리며 나강인을 쳐다보았다.
“내 전용 드래곤 플레이트는 선물로 줄 거죠?”
“선물이라니요?”
“신은하 씨는 하나 받았던데?”
“알겠습니다.”
“진짜요?”
나강인이 대안을 제시했다.
“스칼렛의 체형을 제일 먼저 스캔해서 설계할 테니까, 직접 만들어요.”
“네? 직접이요?”
“오메가테크의 장비가 내 것보다 좋다고 전에 그렇게 자랑했으니까, 알아서 만들어 입으면 되겠군요.”
스칼렛이 발끈했다.
“아니, 누구는 직접 만들어주고 난 왜 내 손으로….”
제시카가 옆에서 쿡쿡 찔렀다.
“그거라도 받아. 한국에 출장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기 싫으면.”
“아. 그런가?”
스칼렛이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딜!”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강인이 말했다.
“의수의 기본 설계는 네가 해줄 거고, 오메가테크가 맡은 부분도 네가 튜닝하면 완성품이 생각보다 빨리 나오겠지?”
AI 전지인이 불평했다.
- 저만 부려먹으십니다.
“인류의 미래에 보탬이 되자며.”
- 일은 제대로 할 겁니다. 불평도 하는 겁니다.
“유나린 박사의 인공 근육이 2027년에 노벨상을 타려면, 기술 개발은 이미 끝났어야 하잖아?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작이야. 그게 무슨 말이겠냐?”
- 우리 미래는 망한 겁니까?
“연구를 시작하면 순식간에 성공한다는 거지.”
AI 전지인이 다른 의견을 냈다.
- 유나린 박사는 절박함이 다릅니다. 요원님이 구해준 덕분에 유나린 박사는 팔이나 다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절박함은 부족하겠지만, 대신에 돈이 더 많이 들어가잖아. 네 기록의 유나린 박사는 없는 돈을 긁어모아 어렵게 연구했을 거야. 예산을 기록보다 더 많이 투입하면 결과는 더 빨리 나오겠지.”
***
이튿날 스칼렛이 유나린 박사를 다시 찾아가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유나린이 물었다.
“일이 잘못돼도 오메가테크가 금전적으로 손해 보는 건 없네요?”
“그건 유나린 박사님도 마찬가지죠?”
“네. 맞아요. 그런데 이러면 나강인 씨는요?”
“자기가 알아서 하겠대요.”
“결국 제 연구가 실패하면 나강인 씨만 손해 보는 거네요?”
“강인 씨는 유나린 박사님이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데요?”
“그분이 왜 이렇게까지 저를 믿으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그게 궁금해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러다 유나린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나강인 씨는 도대체 누구세요? 어떻게 철인기공에 이어서 오메가테크까지 움직인 거예요?”
스칼렛이 씩 웃었다.
“아. 그러니까 나강인 씨의 정체가 궁금하시다?”
스칼렛도 그게 궁금하다.
“안 가르쳐줄 거예요.”
“네?”
“오호호홋!”
***
나강인도 유나린 박사를 다시 만나기 위해 한국대학교로 찾아갔다.
그는 시계탑 앞을 지나가면서 시계를 슬쩍 보았다. 시계탑의 시계는 고장 난 채로 멈춰 있었다.
나강인이 유나린을 만나 말했다.
“유 박사님의 연구를 더 지원하려고 제가 일을 좀 늘렸습니다.”
원래는 철인기공에서 받는 로열티를 연구비로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메가테크에서도 돈이 들어온다.
“연구비 아끼지 말고 팍팍 쓰시죠.”
AI 전지인이 말했다.
- 팍팍 쓰기엔 여전히 모자란 돈입니다.
“물론 대기업 연구만큼 연구비가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원래 쓰려던 것보다는 더 쓰시라고요.”
유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원래라니요? 인공 근육 연구는 나강인 씨가 먼저 제안해서 하는 건데요?”
- 우리 요원님은 입이 너무 가볍습니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연구하는 그 ‘원래’는 이제 없습니다.
“예산을 아끼지 말라는 거죠. 응원합니다.”
“네. 고마워요. 그런데 인공 근육을 사용한 의수는 어느 정도 수준을 목표로 개발하시는 거죠?”
나강인은 AI 전지인이 말한 대용품 의수를 기준으로 삼았다.
“자기 손발처럼 쓸 수 있는, 물론 진짜 손발만큼은 아니지만, 익숙해지면 비슷하게는 쓸 수 있는 그런 의수를 원합니다.”
유나린이 방긋 웃었다.
“그런 제품이 나오면 정말 좋겠어요. 꼭 성공하고 싶네요.”
“그 의수의 핵심은 인공 근육입니다.”
“부담도 되고요.”
“유 박사님의 연구는 대성공할 거라니까요.”
“저를 너무 많이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유 박사님이 본인을 과소평가하는 겁니다.”
***
나강인은 유나린과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려면 다시 시계탑 앞을 지나가야 한다.
시계탑 앞에서 AI 전지인이 갑자기 말했다.
- 백한수려 직원을 발견했습니다.
화장품 회사인 백한수려는 피부재생 화장품 재료로 VTX-13이란 물질을 개발했다.
그런데 그 물질은 특정 조건에서는 강력한 폭발물로 바뀐다. 그건 개발한 사람들조차 몰랐었다.
그 물질을 옮기던 차가 도심에서 폭발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 대참사를 마침 근처에 있던 나강인이 막았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물질인지도 알려주었다.
하마터면 회사가 망할 뻔한 백한수려는 화장품 CF에 나강인을 무술감독으로 참여시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때 회사 쪽 담당자가 홍보팀 백미소였다.
백미소도 나강인을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나강인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는 사람을 만나러요. 그러는….”
- 백미소입니다.
“백미소 씨는 여기 무슨 일입니까?”
“산학협력 때문에 왔어요.”
- 백미소는 홍보팀 직원입니다.
“홍보팀에서요?”
“연구소는 기술을 협력하고, 우리는 그 협력 과정과 결과를 홍보하죠.”
“아아.”
백미소는 나강인이 화학 천재라고 믿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강인을 연구원으로 스카우트하는 임무를 그녀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녀는 나강인이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무술감독이라는 걸 안다.
‘그런 사람을 우리 회사로 스카우트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건 괜찮잖아?’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나강인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커피가 맛있는 카페가 있습니다.”
- 먼저 마시자고 한 사람이 사라고 하십시오. 연구비 지출이 너무 커서 우리는 지금 한 푼이 아쉽습니다.
“사는 김에 디저트도 사시죠.”
“네?”
백미소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맛있네요.”
“커피 맛집입니다.”
백미소는 굳이 회사일 이야기를 꺼내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강인 씨는 연예계에서 활동하니까.’
그녀가 공통 주제를 생각해냈다.
“저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잘 안됐어요. 저보다 얼굴이 예쁜데 연기까지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인이 됐군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낙하산이죠.”
“어? 낙하산이었습니까?”
“네? 모르셨어요?”
“일을 잘하시길래 당연히 그냥 직원인 줄 알았습니다.”
백미소가 이번에는 활짝 웃었다.
“진짜요? 고마워요.”
커피를 그리 오래 마시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둘 다 같은 주차장에 차가 있었다.
백미소는 나강인의 오래된 차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어머? 연예계에서 꽤 잘나간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네? 역시 그 세계는 한 줌의 최상위권만 배가 부르구나.’
그녀는 포기했던 다른 일에 욕심이 생겼다.
‘이러면 화학 천재 나강인을 우리 회사로 스카우트할 수 있겠는데?’
그녀는 조금 전에 카페에서의 분위기를 생각했다.
‘분위기가 괜찮았으니까 장난처럼 제안하는 게 낫겠지?’
그녀가 나강인의 차를 과장된 동작으로 쳐다본 후에 다시 그녀의 차를 보았다. 그런 후에 가볍게 웃으며 차 열쇠를 나강인을 향해 던졌다.
“제 차 타세요. 그냥 가져도 돼요. 전에 신세 진 거….”
나강인이 열쇠를 가볍게 받은 후에 도로 던졌다.
당황한 백미소가 두 팔을 휘저으며 겨우 열쇠를 받았다.
“왜, 왜요?”
“됐습니다. 난 내 차가 익숙하고 편해서.”
“그래요?”
그녀가 나강인의 차를 다시 보았다. 단종된 지 오래된 차였다.
‘어쨌든 돈이 없는 건 맞지? 그러니까 커피랑 디저트를 내가 사게 했겠지?’
그녀가 본론을 슬쩍 꺼냈다.
“혹시 우리 회사에 와서 화장품을 연구할 생각 있어요? 오신다면 과장급 대우를 약속할게요.”
나강인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런 연구는 할 줄 모릅니다만?”
백미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럼 VTX-13 사건 때 보여준 능력은 뭔데? 화학 천재인 거 다 아는데 아닌 척하네.’
“농담을 잘하시네요. 그럼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라도 생각이 바뀌면….”
나강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통화 좀.”
“네. 받으세요.”
나강인이 전화를 받았다. 변형찬 감독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강인 씨. 장소 섭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 내일 연구소 촬영을 위해 섭외한 장소가 저쪽 사정으로 취소됐어요.
연구소 장면에는 액션이 들어간다. 액션 일정을 바꾸려면 나강인과 이야기해야 한다.
- 다른 장소를 섭외할 시간은 없고, 다른 촬영 일정도 다 픽스되어 있어서 난감해졌습니다. 일단 내일 촬영은 빼고 나중에 어떻게든 해볼까 합니다.
“음. 연구소라…. 잠시만요. 제가 좀 알아보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고 홍보팀 직원 백미소에게 제안했다.
“지금 제가 참여하는 영화에, 지난번에 갔던 백한수려 연구소를 촬영장소로 쓸 수 있을까요? 그러면 영화에 백한수려 연구소 간판이 그대로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만.”
“네? 영화요?”
백미소가 나강인이 연예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하는 일을 다 아는 건 아니다.
“운명의 창이라는 영화인데, 손태민 감독님….”
“앗! 천만 감독 손태민! 로맨스의 마술사 손태민!”
“잘 아시네요?”
“배우가 꿈이었다니까요. 저 그분 로맨스 영화 진짜 좋아해요.”
“그 감독님의 제자인 변형찬 감독님이 찍는 영화입니다.”
“아. 제자요.”
백미소가 살짝 실망했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잠깐? 나강인 씨가 참여하는 영화?’
“그러면 무술감독을 맡으셨겠네요?”
나강인은 복경산 장군과 부장 배역도 맡았지만 주로 하는 건 무술감독이다.
“그렇죠.”
“그 영화에도 우리 CF 같은 명품 액션이 나오나요?”
“많이 나오죠.”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연구소는 언제 쓰실 건데요?”
“내일?”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요. 얼마든지 쓰세요.”
“그걸 백미소 씨가 결정해도 됩니까?”
“들어가서 보고는 해야죠. 그런데 나강인 씨의 부탁이라고 하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나강인 씨가 그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회사 경영진과 VTX-13 핵심 개발자 절반은 교도소로 직행했을 테니까요.”
“설마 그랬겠습니까?”
“마침 내일은 휴일이니까 실내 촬영할 때 연구소 내부를 찍으셔도 돼요. 물론 보안구역은 안 되지만, 연구하는 곳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어요.”
“딱 좋네요.”
“그런데요.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저도 그 영화에 출연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