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사고
백미소는 연구소를 촬영장소로 제공하는 대신에 그녀가 영화에 출연하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 영화에요?”
“저 연기 배운 여자예요.”
그녀는 아까 카페에서 원래 꿈은 배우라고 말했다.
“제 연기력이 좀 부족할 수도 있지만, 대신에 홍보실 직원 역할 같은 실생활 연기는 자연스럽게 할 자신이 있어요.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요.”
“어….”
“나강인 씨의 액션에 저도 끼워주면 더 좋고요.”
백한수려의 스포츠 화장품 CF와 다른 회사의 음료수 CF는 명품 액션으로 호평을 받았다. 둘 다 나강인이 액션을 맡았다.
“저 그때 CF 촬영 현장에서 엄청 감동했거든요. 영화나 드라마 쪽에는 나강인표 액션이란 게 있다면서요? 저도 꼭 경험해보고 싶어요. 소원이에요.”
“경험 삼아 하는 단역이라면 감독님하고 이야기해보죠.”
나강인이 변형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구소 섭외했습니다. 백한수려의 화장품 연구소입니다.”
- 네? 백한수려의 연구소요? 아니, 방금 전화 드렸는데 그걸 어떻게 벌써….
“그런데 저쪽에서 조건이 하나 있다는군요.”
나강인이 백미소의 조건을 그대로 전했다.
변태민이 얼른 대답했다.
- 그게 뭐 어렵겠습니까? 대사는 몇 줄밖에 못 주지만, 내일 주인공 주변에서 같이 뛰어다니는 건 괜찮습니다. 물론 액션은 강인 씨가 해결해줘야 하지만요.
“그럼 그 조건으로 하죠. 내일 하루 연구소를 촬영 장소로 제공하겠답니다.”
- 내일이면 스케줄까지 완벽하군요!
나강인이 전화를 끊고 통화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런 후에 말했다.
“그럼 내일 뵙죠. 구체적인 스케줄 협의는 영화사에서 연락할 겁니다.”
백미소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나강인 씨를 만나면 좋은 일만 생기나 봐요.”
“어….”
좋은 일은커녕 국제용병이나 해적의 공격을 받은 스칼렛 같은 사람도 있다.
신은하는 이제 총탄이나 독가스를 겁내지 않는다. 그 정도 위험은 익숙하단 이유에서다.
나강인이 말했다.
“백미소 씨가 운이 좋은 거겠죠.”
***
이튿날 영화 촬영팀이 경기도에 있는 백한수려의 연구소에 도착했다.
스태프들은 연구소의 규모를 보고 감탄했다.
“이야아. 원래 찍으려던 곳보다 여기가 훨씬 더 큰데요?”
“건물도 더 있어 보인다.”
변형찬 감독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원래 구상하던 그림하고 비슷해서 더 좋습니다.”
촬영감독이 물었다.
“나강인 무술감독은 이런 곳을 도대체 어떻게 섭외했을까요?”
“그러게요. 강인 씨는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라니까요.”
주연배우 신은하와 김유찬도 현장에 도착했다.
김유찬이 감탄했다.
“이야아. 강인 씨가 변 감독님 전화를 받자마자 여길 섭외했다던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강인 오빠가 이 회사 CF에 무술감독으로 참여했었어요. 그때 연락처라도 받았나?”
그녀가 그때 담당자였던 백미소를 쳐다보았다.
“설마 둘이 그동안 연락하고 지낸 건 아니겠지?”
백미소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백한수려 홍보실 대리 백미소입니다. 제가 오늘 촬영 지원을 맡았어요.”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회사 화장품을 꾸준히 발라서 예쁜 거예요.”
“예?”
“그런데 나강인 씨는….”
“아니, 제가 눈앞에 있는데 왜 강인 씨부터 찾습니까? 하하하.”
“네. 실제로 봐도 잘생기셨네요. 나강인 씨는 아직 안 오셨나요?”
김유찬은 찔러봐야 씨도 안 먹힌다는 걸 깨달았다.
“강인 씨는 분장하러 갔는데요.”
백미소는 살짝 놀랐다.
“네? 분장이라니요? 나강인 씨도 영화에 출연해요?”
옆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미소를 쳐다보던 신은하의 표정이 갑자기 확 풀어졌다.
“어머어. 모르셨나 보다. 장소가 바로 섭외되길래 자주 연락하는 줄 알았는데.”
“네? 그건 어제 한국대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제안받은 건데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런 우연!”
“네?”
“아니에요. 강인 오빠도 우리 영화에 출연해요.”
“나강인 씨는 무술감독님 아니세요?”
“연기 진짜 잘하는데 그것도 모르셨구나. 오자마자 찾으시길래 그 정도는 아시는 줄 알았죠.”
김유찬이 신은하의 팔을 쿡쿡 찌르며 작게 말했다.
“야. 겨우 섭외한 장소인데 왜 담당자한테 그래? 살살해. 살살.”
“살살 하잖아요. 내가 껌 안 씹은 게 어디야.”
나강인이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분장을 마친 상태였다.
신은하가 씩 웃으며 나강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복경산 부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백미소는 나강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백미소예요. 오늘 복경산 부장님의 부하직원 역할을 맡았어요. 잘 부탁드려요.”
“백미소 씨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하는군요.”
“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요.”
신은하가 김유찬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꺄하하하! 봐봐! 전혀 못 알아보잖아!”
“야. 아프다.”
김유찬이 손으로 등을 만지며 설명했다.
“이분은 나강인 씨잖아요.”
“네에? 이분이요?”
“특수분장을 하니까 많이 달라 보이죠?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백미소가 나강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감탄했다.
“와아. 우리나라 특수분장 기술력이 장난 아니네요.”
“그 특수분장을 나강인 씨가 직접 했습니다.”
“네에?”
신은하가 옆에서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자랑했다.
“메이크업 실력도 쩔어서, 내가 스케줄이 급할 땐 같은 동네에 사는 강인 오빠를 찾아가요.”
“아. 좋겠…. 아, 아니에요.”
신은하가 활짝 웃었다.
“당연히 좋죠. 안 받아본 사람은 몰라요.”
***
백미소는 김유찬이나 복경산 부장을 따라다니는 직원 역할을 맡았다. 갑자기 추가된 배역이라 대사는 몇 줄밖에 없다. 대신에 오늘 촬영에서 카메라에 얼굴은 자주 나온다.
VTX-13를 개발한 팀의 팀장도 촬영장에 나타났다. 그는 연구소 안내를 맡았다.
그는 나강인을 보자마자 달려와 인사했다.
“아이고. 나강인 씨. 다시 뵈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개발팀장이 나강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웃었다.
“이렇게 분장하시니까 진짜 부장님 같습니다. 하하하.”
개발팀장의 옆에서 백미소가 물었다.
“특수분장을 했는데 나강인 씨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내가 원래 사람 얼굴을 잘 알아봐요.”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요원님의 변장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드물게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침투 작전 상황이라면 우선 제거 또는 회피 대상입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우린 지금 전투가 아니라 영화 찍으러 왔다.”
- 저도 뭔가 하는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말해봤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된 지인아. 어차피 오늘 촬영은 네가 많이 도와줘야 해.”
영화 촬영이 시작됐다.
변형찬은 배우들의 연기를 한 번에 몇 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찍고 잘 편집해서 완성품을 만드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가 손태민에게 배운 그 방식은, 설계만 제대로 하면 촬영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먼저 평범한 장면부터 촬영했다. 나강인의 촬영 순서는 앞쪽에 있었다.
그가 복경산 부장으로 분장하고 백미소에게 말했다.
“박미소 대리. 졸리지?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백미소는 박미소로 성만 바꿔서 나왔다. 그녀가 대사를 쳤다.
“회사 일인데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죠.”
그건 평소에도 하던 생각이라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 대사를 말하고 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나강인이 말했다.
“그렇게 박 대리가 몸을 갈아 넣어서 일하면 회사는 돈을 더 많이 벌겠지? 그러면 좋은 건 사장님밖에 없어.”
“네?”
변형찬 감독은 백미소를 출연시키기 위해 원래는 없던 대사를 추가했다. 어젯밤에 그녀에게 쪽대본이 이메일로 전달됐다.
그녀는 오늘 촬영장에 와서, 나강인의 대사가 수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녀의 대사는 너무 짧아서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바뀐 대사가 이런 것인 줄은 몰랐다.
백미소는 화장품회사 백한수려의 사장 백선철의 딸이다.
그녀의 뒤쪽으로 보이는 연구소 외벽에는 ‘백한수려’ 네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카메라에는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이 그대로 찍혔다.
백미소의 대사는 이제 없다. 그런데도 그녀가 애드립을 쳤다.
“월급 받았으니까 일해야죠.”
복경산 부장이 웃었다. 그녀의 애드립이 다음 대사로 이어질 때 어색하지 않았다.
“월급 받은 만큼은 해야지. 그냥 그만큼만 해. 그 이외에는 박미소 대리를 위해 살아. 아. 윗분들에게는 내가 이런 말 했다고 하지 마. 나 또 욕먹어.”
백미소는 복경산의 대사를 듣고 추측했다.
‘내가 어떻게 말할 건지 이미 예상하고 쓴 대사구나!’
복경산 부장이 앞으로 걸어갔다. 백미소가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변형찬이 외쳤다.
“오케이!”
스승인 손태민이나 제자인 변형찬은 컷과 오케이를 구분해서 쓴다. 컷은 제대로 찍힌 경우와 NG가 난 경우 모두 사용하지만, 오케이는 마음에 들게 찍혔을 때만 쓴다.
변형찬이 다가오며 말했다.
“백미소 씨는 연기가 처음이라더니 잘하네요. 하하하.”
그녀가 항의했다.
“대사가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어요. 영화에 이 씬이 나가면 회사에서 제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요?”
백미소가 속으로 생각했다.
‘날 출연시켜달라고 한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이런 대사를 넣었나? 내가 아빠 딸인 걸 알고?’
변형찬은 백미소가 사장 딸인 걸 모른다. 그가 웃었다.
“대신에 당황한 모습이 정말 잘 찍혔어요. 그 표정을 찍고 싶었거든요. 흐흐.”
“네? 아. 그래서였군요. 난 또.”
“그 대사를 한 사람은 백미소 씨가 아니라 나강인 씨인데, 그래도 정 부담스러우시면….”
그녀가 얼른 물었다.
“대사를 바꿔주시나요?”
변형찬이 뒤쪽에 보이는 연구소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저 회사 이름은 CG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회사 이름만 고쳐드릴까요?”
백미소가 생각했다.
‘이 장면이 나가면 아빠가 뭐라고 할 텐데…. 아니야. 나강인 씨가 직접 대사를 쳤으니까, 뭐라 할 사람은 우리 회사에 없겠지.’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었더니 첫 영화 촬영이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뇨. 그냥 이대로 가 주세요. 제가 아는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보면 되게 재밌어하겠네요. 호, 호호.”
촬영이 계속 이어졌다. 제일 많이 연기하는 사람은 주연배우 김유찬이었다.
일반 에피소드가 어느 정도 끝났다. 이제 액션을 찍어야 한다.
사람들의 눈에 기대가 서렸다.
오늘은 이 연구소에 마스크를 쓴 괴한들이 침입했다가 김유찬에게 발각되어 싸우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나강인은 머리카락을 다시 세팅하고 가면을 챙겼다.
백미소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복경산 부장이 왜 연구소로 쳐들어오는 거예요?”
“대본을 다 받지는 않았나 보네요?”
“저는 오늘 촬영분만 받았죠.”
“난 지금은 복경산이 아니라 침입자 대역입니다. 가면은 같은 얼굴이 여러 번 나오면 안 되니까 쓰는 거고요.”
“아! 그럼 오늘은 그 녹색 쫄쫄이는 안 입으시는 거예요?”
CF 촬영 때는 녹색 쫄쫄이가 필요했다.
“뭘 기대한 겁니까?”
백미소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혹시나 했죠.”
“그런 거 안 나옵니다.”
전투 장면 촬영이 시작됐다.
현대가 배경일 때는 전투가 별로 없다. 오늘 찍는 건 그 몇 개 없는 전투 장면 중 하나다.
연구소에 침입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쓴 가면의 디자인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옷은 대놓고 달랐다.
변형찬 감독이 백미소에게 말했다.
“두 가지만 명심해요. 첫째. 박미소 배역은 이 전투 도중에는 대사가 없어요. 놀라서 지르는 짧은 비명 정도만 허용돼요.”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내가 컷이나 오케이라고 하면 그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요. 잠깐 끊었다가 이어서 촬영할 건데, 다시 카메라가 돌아갈 때 혼자 순간 이동하면 안 되니까.”
“네!”
촬영이 시작됐다.
김유찬이 연구소 직원 몇 명을 데리고 전진했다. 그중에는 백미소도 있었다. 그녀는 김유찬을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얼굴을 수시로 비추었다.
‘대사는 없지만 이러는 것도 되게 좋다.’
그러다 가면을 쓴 침입자들과 마주쳤다. 나강인은 제일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먼저 나강인이 김유찬을 향해 돌진했다. 손에는 삼단봉을 들고 있었다.
김유찬은 무기 대신에 쓰려고 주워온 대걸레 자루를 마치 검처럼 들었다. 그걸 본 백미소는 살짝 당황했다.
‘어? 저거 영화 소품이 아니라 우리 비품인데? 저건 진짜 나무로 만든 막대기잖아. 소품 담당자가 실수를….’
갑자기 김유찬이 대걸레 자루를 나강인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나무로 만든 봉은 나강인을 때리면서 박살 났다.
나강인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날아갔다.
“으악!”
김유찬의 뒤쪽에서 그 모습을 본 백미소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녀는 눈앞에서 촬영 사고가 터졌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