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구내식당 II
화장품회사 백한수려의 홍보실 대리 백미소도 식사를 받았다.
그녀가 식판을 들고 돌아섰다. 촬영팀은 넓은 구내식당 한쪽을 이용했다.
나강인과 김유찬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 테이블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녀가 그쪽으로 걸어가다가, 배우들만 볼 때는 못 본 것을 이제야 보았다.
‘어머.’
나강인은 하나하나 맛을 음미하며 밥을 먹었다. 먹는 모습이 정말 맛있어 보였다.
그녀의 입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전문 출장요리 업체까지 불렀는데도 반응들이 평범해서 실망했는데, 저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도 있구나.’
그녀가 만든 요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백미소가 그 테이블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런 후에 나강인에게 인사 삼아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으세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우리나라에 SAH 엔터 구내식당보다 나은 곳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먹어본 구내식당 중에서 최고입니다.
이곳은 평소에는 이렇게 좋은 밥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 나온 요리는 전문 출장요리 업체 사람들이 구내식당 직원인 척하며 고급 식재료를 충분히 써서 만든 요리다.
나강인이 왼손 엄지를 세웠다.
“역시 남이 만든 요리가 제일 맛있습니다.”
백미소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맛있게 드신다. 그거 어떻게 조리했는지 알려달라고 주방에 말해볼까요?”
두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자마자 백미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살짝 당황했다.
“왜 그렇게들 보세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김유찬이 설명했다.
“나강인 씨에게 요리를 가르쳐준다고 하셔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오해했다.
“아! 강인 씨는 요리를 못 하시는구나.”
“예?”
“하긴. 연예계 활동으로 바쁘실 테니까 요리를 직접 할 시간이 없겠네요.”
김유찬이 웃었다.
“나강인 씨는 연예계 활동은 별로 안 해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요. 오늘 제가 본 게 있는데요. 그 엄청난 액션을 순식간에 찍게 해주는 사람이 왜 일이 없겠어요.”
백미소는 나강인이 잘나가는 무술감독이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나강인 씨를 찾는 곳이 엄청 많겠죠.”
김유찬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찾는 곳은 많은데 그걸 다 거절하거든요. 강인 씨는 연예계 활동을 거의 안 해요.”
“네? 지금 이 영화에 참여하셨잖아요.”
“이 영화는 나강인 씨하고 개인적으로 친한 제가 주연을 맡았고요. ‘햇살 좋은 날’의 조감독님이 감독으로 데뷔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나강인 씨가 특별히 참여하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가요. 무술감독이 영화를 안 하면 그냥 백수…. 아!”
그녀는 한국대학교에서 본 나강인의 오래된 차가 생각났다.
‘그래서 차를 바꿀 돈이 없는 거였구나.’
“연예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줄 알았어요. 연기도 되게 잘하시던데….”
“잘하죠. 얼굴은 내가 더 잘생겼지만, 강인 씨는 액션이 되고 연기도 되는데 배우를 안 하네요.”
“잠깐만요. 오늘은 복경산 부장님으로 연기하셨잖아요.”
그때 백미소는 복경산의 부하직원 역할을 맡았다.
김유찬이 설명했다.
“그건 원래 그 배역을 맡기로 한 배우가 교통사고로 발가락이 부러지는 바람에, 땜빵으로 출연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좋습니다만. 하하하. 아. 이런 말을 하면 다친 분한테는 예의가 아니겠네요.”
나강인은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하지 않고 먹는 데 집중했다.
그는 요리의 맛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먹었다. 밥 한 톨, 고기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먹은 후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있게 잘 먹었다.”
- 오늘 여기 오길 잘했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었더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나강인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후식으로 디저트 먹을 사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도 소식을 듣고 손을 들었다. 김유찬은 손을 너무 높이 들어서 몸까지 일으킬 기세였다.
백미소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구내식당에서 후식도 준비한 걸 보셨나 보다. 오늘 과일이 맛이 참 좋….”
김유찬이 위로 들었던 손을 얼른 앞으로 내밀어 백미소의 말을 끊었다.
“잠깐! 그거 아닙니다!”
“네?”
“우리가 원하는 후식은 강인 씨가 만든 디저트입니다. 과일이 아니라고요.”
“네? 나강인 씨는 요리를 하나도 못 하는 거 아녔어요? 디저트를 어떻게 만든다는 거예요?”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좀 쓸 수 있을까요? 식재료도요.”
“네? 네. 제가 이야기할게요. 그런데 진짜 뭘 만들 줄 아세요?”
“취미 삼아 조금 합니다.”
백미소는 나름대로 납득했다.
“아, 예. 그러시구나.”
‘하고 싶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맛은 과일을 같이 내놓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강인이 주방에 들어가서 남은 식재료를 확인했다.
“좋은 재료가 많네. 지인아. 이걸로 뭘 만들까?”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사용해 그의 눈앞에 디저트 사진 세 개를 띄웠다. 사진 옆에는 설명문도 같이 나타났다.
- 야전 전술 디저트 세 가지를 추천합니다.
그중 하나는 과일을 사용하는 디저트였다. 나강인이 과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일의 상태는?”
후식으로 제공하려고 준비된 과일이 얼마나 잘 익었고 얼마나 신선한지가 AR 렌즈를 통해 표시되었다.
- 최상품입니다.
“그럼 2번 디저트로 하자.”
백미소는 밥을 먹으면서 김유찬에게 회사 이야기를 슬쩍슬쩍 했다. 그녀는 오늘 연구소 촬영이 김유찬이 출연하는 예능의 소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녀는 선물도 슬쩍 찔러주려고 제안했다.
“아! 방금 이야기한 화장품이 피부재생 효과가 진짜 좋은데, 몇 개 보내드릴까요?”
김유찬이 거절했다.
“저는 제가 쓰는 게 있어서요.”
“그럼 주변에 선물하시면 되죠.”
“그러시다면야.”
그녀는 회사 이야기는 열심히 했지만 지금 먹고 있는 식사가 얼마나 맛있는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출장 요리업체를 불렀다는 말을 실수로라도 하면 홍보기회 하나가 날아간다.
‘이건 그냥 오해하게 두는 게 최선이야.’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쯤에 나강인이 디저트를 가지고 나타났다.
“후식 드시죠.”
구내식당 직원으로 위장한 출장업체 사람들이 디저트를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나강인은 그가 먹을 디저트 접시는 직접 가지고 돌아왔다.
출장업체 직원들이 그 테이블에도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인원수대로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디저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오늘은 잡탕 과자나 케이크가 아닌데?”
“이야아. 못 보던 거다.”
“신작인가 봐!”
“이것도 맛있겠지?”
접시를 먼저 받아 맛을 본 직원이 엄지를 들었다.
“역시! 이거 진짜 맛있어!”
김유찬도 그의 몫으로 받은 디저트를 보며 손을 비볐다.
“이거 딱 봐도 포크로 먹어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인데?”
근처에 있던 출장업체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포크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유찬 씨. 팬이에요.”
“고맙습니다. 흐흐.”
김유찬이 포크로 밝은 노란색 디저트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씹자마자 입안에서 상큼한 사과의 향이 달달한 맛과 함께 부드럽게 퍼졌다.
“와…. 맛이 이거….”
나강인이 물었다.
“먹을만합니까?”
“진짜 고급진 맛입니다. 아니, 그동안은 이건 왜 안 만들었어요?”
“이 디저트에는 과일이 들어갑니다.”
“그런데요?”
“잡탕 과자야 밀가루로 만드니까 단가가 싼데, 과일은 비싸잖아요.”
“아…. 그렇구…. 아니, 그건 아니죠! 이렇게 맛있는데 과일값이 문제입니까?”
“여기 과일이 좋은 거더라고요. 그래서 더 맛있을 겁니다.”
디저트는 다른 색도 있었다. 김유찬은 이번에는 오랜지색이 섞인 디저트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헐.”
조금 전에는 사과의 상큼함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입안에서 오랜지향이 달달하게 퍼졌다.
“이것도 와…. 사과도 그렇고 오랜지도 그렇고 와….”
백미소는 김유찬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출장업체에서 준비한 요리를 먹을 때는 저런 반응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톱스타라서 평소에 좋은 걸 많이 먹어봤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 김유찬의 반응은 평소에 이런 거 못 먹어본 사람 같았다.
‘이게 그렇게 맛있나?’
그녀가 그녀 몫의 디저트를 한 입 먹었다. 사과가 들어간 디저트였다.
“어머!”
맛있었다.
그리고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분명히….”
어디서 먹어본 맛인지 기억이 났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파리에 가면 단골로 들르는 곳이 있는데요. 거기 디저트가 진짜 유명하거든요. 그 디저트랑 느낌이 무척 비슷해요.”
AI 전지인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 지구연합의 야전 전술 디저트 레시피는 세계 최고의 제과 제빵 전문가들이 연구해 만들었습니다. 열악한 전장 환경을 고려해 개발된 조리법이지만, 원형의 특색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때 개발에 참여한 전문가 중에 파리 그 가게 출신이 있나 보다.”
- 그럴 수도 있습니다.
김유찬의 접시가 어느새 비었다. 그가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강인 씨. 이거 혹시 다른 과일로도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오랜지 대신에 귤이라든지, 아니면 레몬이라든지. 사과 대신에 파인애플이라든지! 아. 파인애플은 사과가 아닌가?”
- 전쟁터에서는 보급부대가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버려진 과수원에서 직접 따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과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대답했다.
“과일 종류는 별로 안 가립니다만.”
김유찬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혹시 후르츠칵테일 통조림도 됩니까? 난 그게 참 좋던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백미소는 김유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신선한 과일이 더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것만 먹고 다닐 톱스타가 과일 통조림을 왜 찾아?’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전쟁터에 보급되는 과일은 대부분 통조림 형태입니다. 이 레시피는 그런 상황을 고려해서 개발되었습니다.
“통조림으로 만들면 더 맛있습니다.”
“예에!”
김유찬이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위로 높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 오늘 촬영 끝나고 나서 저녁때 이 디저트로 파티를 합시다! 다양한 과일로 만든 디저트 파티! 당연히 후르츠칵테일 통조림도 포함해서!”
나강인이 물었다.
“영화 촬영 기간에 그런 걸 많이 먹어도 됩니까?”
김유찬은 당당했다.
“오늘 촬영이 너무 힘들어서 체중이 쫙 빠졌을 겁니다. 액션을 쭉 이어서 찍느라 정말 힘들어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빠진 체중을 회복하려면 오늘은 많이 먹어야 합니다.”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신은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난 그 파티 반대일세!”
“왜 반대야! 맛있잖아!”
“난 오늘 액션을 하나도 안 했단 말이에요! 오늘 파티를 하면 난 그거 못 먹잖아요! 지금 먹은 것도 아슬아슬한데! 디저트 파티는 영화 촬영 다 끝나고 해요!”
김유찬이 신은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럼 넌 빠져! 난 오늘 당장 해야겠다!”
신은하가 나강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강인 오빠! 누구 편이야!”
나강인이 불평했다.
“왜 화살이 나한테 날아오냐?”
“빨리 오늘은 안 된다고 해!”
“어차피 오늘은 안돼. 밤에 바빠.”
오늘 저녁때는 인공 의수 제작을 위한 삼자 화상회의가 있다. 드래곤 플레이트도 미뤄둔 설계를 좀 해놔야 한다.
신은하는 나강인이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씩 웃었다.
“거봐요. 안된다잖아요. 흐흐흐.”
김유찬이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럼 나는 말이야!”
그가 접시를 들고 디저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강인이 워낙 많이 만들어놔서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 실컷 먹어둬야지.”
백미소는 디저트를 조금씩 먹으며 나강인을 슬쩍슬쩍 보았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그녀는 나강인이 화학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백한수려의 경영진과 오늘 지원을 나온 개발팀장도 그가 화학 천재라고 믿었다.
그녀는 나강인이 연예계에서 무술감독으로 잘나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스포츠 화장품 CF를 찍을 때 그 실력을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영화를 찍을 때 나강인이 보여준 모습은, CF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났다.
게다가 지금 먹는 이 디저트는 프랑스 파리의 유명 맛집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
‘과일 종류를 다양하게 쓸 수 있다고?’
그 파리 맛집은 사과를 사용한 디저트 한 가지만 유명했다.
‘이 실력으로 강남이나 홍대 쪽에 매장을 차리면 돈을 빗자루로 쓸어담을 것 같은데?’
그녀가 나강인을 쳐다보았다.
‘이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다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