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09화 (209/411)

209. 정거장

오늘 액션 촬영은 끝났다. 주연배우 김유찬은 액션이 너무 힘들어서 체력이 바닥났다.

그런데 휴식을 겸한 식사 시간에 잔뜩 먹은 야전 전술 디저트가 그의 체력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이제부터 찍어야 하는 건 액션은 아니지만 지친 모습으로 찍는 편이 그림이 더 잘 나온다.

변형찬 감독이 김유찬에게 제안했다.

“체력이 너무 많이 회복된 것 같은데, 나가서 좀 뛰다가 들어오시죠.”

“감독님. 차라리 날 죽여요.”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입니다.”

“싸우다 지친 모습을 내 연기력으로 보여주겠다니까요?”

나강인은 한쪽에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바로 옆에서 VTX-13 개발팀장이 말했다.

“화학의 고수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무술 실력도 정말 어마어마하시던데요.”

“몸은 좀 쓰는데 화학은 잘 모릅니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나강인이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VTX-13은 잘 관리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연구소 운영 시스템까지 바꿨습니다. 당연히 재고관리도 완벽하게 하고 있고요.”

“그 물질을 폐기하는 선택지는 없나 보네요.”

개발팀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VTX-13은 피부재생 효과가 워낙 좋아서 포기할 수가…. 니트로글리세린도 약으로 쓰잖습니까? 우리도 그런 거죠. 하하하.”

변형찬 감독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개발팀장에게 말을 걸었다.

“팀장님. 저기 저 장비가 되게 그럴듯해 보입니다.”

개발팀장은 VTX-13 이야기를 피하려고 얼른 대답했다.

“아. 그거요? 겉보기만 멋있지 구형 장비입니다. 통제구역 밖에 나와 있는 걸 보면 아시잖습니까?”

“상관없습니다. 겉보기만 멋있으면 됩니다. 저걸 주인공이 직접 다루는 장면을 짧게라도 찍었으면 하는데요. 가능할까요?”

개발팀장이 활짝 웃었다.

“초보자가 다루기 어려울 텐데,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좋지요.”

“그러면 저도 백미소 대리처럼 영화에 나옵니까?”

변형찬은 멈칫했다.

“굳이 원하시면 대사 없는 역할 정도는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흐흐. 대사 주셔도 되는데요. 제가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에 있었거든요. 아! 메이크업부터 받아야겠죠? 집에다 영화에 나온다고 자랑해야지. 흐흐흐.”

“어…. 일단 같이 가시죠.”

***

오후 촬영이 한창일 때 영화사 THO 엔터의 이태호 사장이 현장을 찾아왔다.

이태호가 나강인의 옆에 서서 촬영 현장을 보며 말했다.

“백한수려의 연구소를 촬영장소로 섭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회사와 인연이 조금 있어서요.”

“혹시 그 인연이 총알이 날아다니는 그런….”

“그런 거 아닙니다.”

“아, 하하. 당연히 그런 일이 매번 있진 않겠죠.”

나강인은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형 폭탄이 터질 뻔했지만, 총알이 날아다니진 않았다.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촬영 일정이 이제 후반으로 가고 있군요.”

변형찬 감독은 처음부터 한 달 안에 영화 촬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제작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이태호가 나강인을 보며 슬쩍 웃었다.

“영화 촬영이 참 안전하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총알이 날아다니지도 않았고요.”

“그동안 있었던 그 많은 사고는 제가 일으킨 게 아닌 거 아시면서.”

“농담입니다. 하하하.”

이태호가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변형찬 감독은 촬영이 끝나면 한 달 안에 개봉하길 원하더군요.”

“그렇게 빨리요? 가능합니까?”

“나강인 씨 덕분에 액션이 많은 영화인데도 특수효과가 거의 안 들어갑니다.”

덕분에 제작비도 줄이고 제작 기간도 줄였다.

“변형찬 감독은 영화 촬영 중에도 어떻게 편집할지 다 구상하고 있다더군요. 그래서 촬영이 끝나면 편집도 금방 끝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편집만 끝낸다고 다가 아닐 텐데요? 후처리나 상영관은요?”

“변형찬 감독만 믿고 상영관을 미리 잡아야지요.”

“‘햇살 좋은 날’ 때 상영관 많이 잡아놨다가 그 고생을 하셨으면서, 이번엔 아예 촬영 중인 영화를….”

“하하하. 그때처럼 대규모로 잡을 건 아닙니다. 일단 적당한 규모로 개봉한 후에, 반응을 보고 늘리기로 했습니다.”

“그거야 뭐 알아서 하시겠죠.”

“홍보도 이미 조금씩 하고는 있습니다. 영화 촬영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해야죠.”

***

나강인은 이튿날 작곡가 곽찬석과 프프걸스를 만났다.

곽찬석이 말했다.

“강인 씨의 피처링은 원곡에만 들어가니까 오늘 하루면 작업이 끝날 겁니다.”

이 영화의 OST는 원곡 하나를 다양한 버전으로 편곡해 사용한다. 그런데 다른 편곡 버전에는 나강인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는다.

곽찬석이 제안했다.

“남자용 편곡도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도 하실 거지요?”

“영화에서는 그 버전은 안 쓰잖습니까?”

영화에서 남자 목소리의 OST가 필요할 땐 피처링된 부분만 사용하기로 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프프걸스 애들이 OST로 꿀을 충분히 빨고 나서 이야기하시죠.”

막내 최지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역시 우리를 생각해주는 건 선생님밖에 없어!”

“아부하지 마라. 오늘은 잡탕 과자 없다.”

“잡탕 과자 말고 과일을 넣어 만든 달달한 디저트를 원해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은하 언니랑 유찬 오빠 SNS요. 진짜 맛있었다면서요?”

“영화 촬영이 조만간 끝나면 디저트 파티를 할 거니까, 그때 회사는 모르게 몰래 와라.”

“아싸! 넹!”

***

영화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총격전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스칼렛 켈리는 아무 탈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강인은 AI 전지인과 함께 드래곤 플레이트의 설계도면을 만들었다. 오메가테크의 라이센스 생산이 시작되기 전에 밀린 주문을 일부라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작업 중에 모니터가 아니라 TV를 보고 계십니다.

“이젠 이 정도는 모니터를 안 봐도 예측해서 할 수 있잖아.”

-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제 AI 전지인은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작업이 너무 익숙해져서, 화면을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는 작업할 수 있다.

- 1분에 한 번 정도는 모니터를 봐주셔야 오차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럴 테니까 너도 TV 같이 보면서 쉬엄쉬엄해.”

- 제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오늘 밥은 페넬로페에 가서 먹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 며칠 뒤면 영화 촬영도 끝나는데, 그러면 우리 수입도 끊기잖아. 싼 거 먹자.”

그가 그동안 연예계에서 활동해 번 돈은 제작 거점의 장비를 보강하고 차량을 강화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데 사용했다. 이번 영화를 찍을 때 미리 받은 돈도 이미 다 썼다.

드래곤 플레이트에서 안정적인 수입이 나왔기 때문에 그동안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황이 변했다.

지금 드래곤 플레이트로 들어오는 돈은 전부 다 유나린 박사의 연구비로 들어간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CF라도 하나 맡으십시오. 밥은 먹고 살아야지요.

“제안 온 게 좀 있지?”

- 제안 이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존에 작업했던 제작사의 CF를 고르면 신경 쓸 일이 줄어듭니다.

“그것도 괜찮은데, 더 간단한 일거리는 없나?”

AI 전지인이 좀 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 범죄조직을 털어 은닉자금을 빼앗으십시오.

“야.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진짜로 하고 싶어지잖아.”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강인이 발신자를 확인했다. 합수부 형사가 찍혀 있었다.

“어…. 이 아저씨가 왜 갑자기 전화일까?”

- 차단하십시오.

“받아는 봐야지.”

- 작업을 저장하겠습니다.

작업 중인 데이터가 많아 저장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전화만 받는 건데 작업을 중단할 필요까지 있냐?”

- 느낌이 싸합니다.

“우리 지인이가 이제 느낌 싸한 것도 알아.”

나강인이 전화를 받았다.

***

합동수사본부 형사가 나강인의 서울 외곽 제작 거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거점 내부의 장비들을 보며 감탄했다.

“와. 여기는 진짜 엄청나졌네요. 이제 무슨 비밀기지 같습니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까 밖으로 나가시죠.”

나강인이 야외 테이블에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건 그냥 취미생활에 부업 정도 하는 곳입니다.”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가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아는데 취미로 하는 거라니요. 하하하.”

합수부 형사가 커피를 몇 모금 마신 후에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에 잡으신 국제 킬러, 그러니까 코드네임 블랙 사이드와인더 말입니다.”

그때 나강인이 협상 전문가로 위장하고 건물에 침투해 유나린과 사람들을 구출했다. 그 과정에서 킬러 조직도 전멸시켰다.

“그놈의 진짜 목적을 알아냈습니다. 저희가 그걸 알아내려고 거기 있던 자료는 물론이고 연관된 기업까지 전부 다 조사했습니다.”

“고생하셨네요.”

“선생님이 서버 분석을 도와주셨으면 더 빨리 끝났을 텐데….”

“제가 없어도 이렇게 잘하셨는데요.”

“대신에 야근을…. 아닙니다.”

형사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말했다.

“킬러의 진짜 목적은 비자금이었습니다.”

“그곳이 돈을 쌓아놓고 주는 곳은 아닐 텐데요?”

“물론 아니죠. 정부 기금이나 기업의 투자금을 연구 지원금이 필요한 곳에 연결해주는 재단이죠.”

“그럼 킬러가 노린 비자금은 기업 쪽이겠군요.”

“예. 민간기업에서 투자금을 연구비로 지원하는 척하면서 돈세탁을 했더군요. 회사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요.”

“어떻게요?”

“그 기관이 선정한 바지 연구원에게 기업이 돈을 지급하고 그걸 뒤로 다시 돌려받는 수법을 썼습니다.”

“그 돈이 다시 기업으로 들어올 때 걸리지 않습니까?”

“걸리죠. 그래서 그 기업은 그 돈을 직접 받지 않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했더군요. 돈이 모이는 저수지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면 저수지에 모인 금액이 상당하겠네요?”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백억 원 이상입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우리가 그 돈을 먹었으면 CF를 찍냐 마냐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먹냐.”

- 아까워서 해본 말입니다.

나강인이 형사에게 말했다.

“백억이나 되니까 그 킬러가 눈이 돌아가서 거길 쳤군요. 비자금 이야기는 다른 범죄를 저지르다 알았을 거고요.”

“예. 그놈은 저수지를 찾고 나면 그 재단에 있던 단서를 모두 불태워 없애버릴 계획이었습니다.”

- 듣고 보니 더 아깝습니다. 어차피 불법 비자금인데요.

나강인이 물었다.

“그래서 그 돈은 찾으셨습니까?”

“찾았습니다.”

나강인이 슬쩍 웃었다.

“그럼 이제 그 돈에 미련 갖는 사람이 없겠네요.”

-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너 사람 다 됐어.”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심지어 그 비자금을 조성한 기업조차 자기네 돈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중입니다.”

“일이 순리대로 잘됐네요. 그래도 바쁜 건 다 끝나셨나 봅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와주신 걸 보면요.”

형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음? 뭔가 느낌이 싸합니다?”

“저희가 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거기 있는 자료를 다 뒤지고 연구비를 투자한 기업들의 정보까지 분석했다고 했잖습니까? 야근에 야근을 해서 말이죠.”

“그러셨죠.”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수확이 나왔습니다.”

나강인이 등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댔다.

“이거 안 들어도 됩니까?”

형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꼭 끝까지 들어주셔야 합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들으면 곤란해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말씀해 보시죠.”

형사가 머그컵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위성과 통신하는 기지국 시설에 누군가 수작을 부리려 한 정황이 있습니다.”

“위성 기지국에 수작을 좀 부린다고 해서 왜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겁니까?”

“우리나라가 진행하는 우주 정거장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정거장 크기는 작지만 사람이 거주하면서 연구할 정도는 됩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기존 정보 수집 과정에서 관련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2023년에 발사할 예정입니다.

“뉴스에서 봤습니다. 내년에 궤도에 올릴 예정이지요?”

“예. 이번에 문제가 된 기지국은, 그 우주 정거장과의 통신을 전담하는 시설입니다.”

나강인은 우주 정거장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짐작은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한국의 우주 정거장을 노린 겁니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장을 받아서 압수수색을 하면 되잖습니까?”

형사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의심만 가는 정도인 데다가, 위성 기지국은 곁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첩보 확인 차원에서 접근 중입니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꼬리만 자르고 본체는 도망칠 수도 있겠군요.”

“맞습니다. 그게 저희가 제일 우려하는 겁니다.”

나강인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 우주 정거장에서는 무슨 일을 합니까?”

“아마 다른 나라의 우주 정거장과 도킹도 하고, 과학 실험도 하겠죠.”

AI 전지인이 첨언했다.

- 연구 목표 중에 태양이 있습니다.

“태양도 연구하고요?”

“저는 기술적인 건 전달받은 것 외에는 모르지만, 우주 정거장인데 별이나 태양 연구는 당연히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지상 기지국에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목적은요? 우리나라의 우주 정거장 발사를 망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는 최대 피해는요?”

형사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우주 정거장의 지구 추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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