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디저트 파티
THO 엔터는 영화 ‘운명의 창’ 촬영 쫑파티를 위해 조리시설이 포함된 대형 파티 공간을 통째로 빌렸다.
배우들이 파티 장소에 들어오며 감탄했다.
“이야아. THO 엔터에서 돈 좀 썼네. 실내 분위기 럭셔리한 거 봐라.”
“창밖에 전망도 좋아.”
“난 쫑파티니까 식당을 빌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여기가 ‘햇살 좋은 날’ 천만 돌파 기념 파티 때보다 더 좋은 거 아냐?”
“이번엔 옥상이 아니라 실내로 잡은 건 폭발 사고가 또 날까 봐 그런 건가?”
영화 ‘햇살 좋은 날’ 파티 때는 파파라치가 날린 드론 때문에 작은 폭발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로 손태민 감독이 다쳤다.
그날 그 현장에 있었던 스태프들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여긴 드론은 못 들어오겠네.”
“그때 그 파파라치가 얼마나 개박살이 났는데, 우리 파티에 또 그런 걸 날리는 놈이 있으려고.”
다른 스태프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우리가 쫑파티를 하는지조차 모르니까 엿보려는 사람도 없겠지. 오늘은 기자도 없잖아.”
“아직 개봉 전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인 후에 쫑파티가 시작됐다.
놀려고 온 파티에서 기념연설을 길게 하면 좋아할 사람은 없다. 변형찬 감독은 감사 인사 몇 마디만 하고 기념사를 끝냈다.
곧바로 나강인이 만든 야전 전술 디저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디저트를 보며 감탄했다.
“이야아. 이게 과일이 들어갔다는 그 디저트구나. 백한수려 화장품 연구소에서 촬영할 때 먹어봤다던 그거. 난 그날 거기 없어서 맛이 되게 궁금했는데 말이야.”
“어? 못 보던 디저트가 또 있어!”
“그럼 먹어봐야지!”
“저기 요리도 있는데?”
“요리? 오늘은 디저트 파티니까 여기 집중하는 게 낫지 않아?”
“근데 못 보던 요리다!”
“그럼 맛을 안 보곤 못 참지!”
이보라는 영화를 찍는 동안 식단 관리를 열심히 했다. 다른 배우들도 사정은 다들 비슷했다.
촬영 기간 한 달 동안 식단을 조절하며 살았던 배우들은 요리와 디저트를 남들보다 더 열심히 먹었다.
“맛있다.”
이보라는 특히 진지하게 먹었다.
“오늘 이 맛을 보려고 내가 지난 한 달간 굶어가며 영화를 찍었구나!”
디저트를 종류별로 먹던 그녀의 눈에 조리실에 나오는 신은하가 보였다.
“어?”
그녀가 얼른 신은하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신은하가 자랑했다.
“내가 오늘 강인 오빠랑 이 디저트를 다 만들었어.”
이보라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접시에 담아온 디저트 중에 새로운 것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넌 그냥 잔심부름이나 했겠지.”
“네가 지금 먹고 있는 그거 내가 만든 건데, 맛있지?”
“퉤!”
“야!”
***
초등학생 이민지가 조리실에서 나온 나강인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아저씨!”
“민지 왔구나.”
이민지의 손에도 과자처럼 생긴 디저트가 있었다.
신은하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거 맛있지?”
“히히. 아저씨가 만든 건 다 맛있어요.”
“여기 디저트 중에 내가 만든 것도 있다?”
“아. 그게 그거구나. 어쩐지 이상하더라.”
“응?”
“아니에요.”
“엄마는 같이 오셨어?”
이민지가 다른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요. 유찬 삼촌이랑 같이 있어요.”
이 디저트 파티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주연배우 김유찬이다. 그런데 그가 접시에 담아온 디저트는 대부분 후르츠칵테일 통조림을 주재료로 써서 만든 것이었다.
“음. 역시 이게 제일 맛있어.”
영화배우 장미정은 아역배우 이민지의 엄마이고 THO 엔터 사장 이태호의 아내다.
그녀가 김유찬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물었다.
“그 과일 통조림을 좋아하나 봐?”
“네. 이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입맛이 특이하네? 왜?”
“음….”
김유찬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어릴 때 누나가 후르츠칵테일 통조림을 어디서 얻어왔어요. 누나랑 둘이서 그걸 먹으려고 했는데 깡통을 딸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냥 따면 되는 거 아냐?”
“그때 통조림은 깡통따개가 필요했거든요.”
“아. 예전엔 그런 통조림이 더 많았지. 그래서 못 먹었어?”
“그날은 못 먹고 이튿날 겨우 따서 먹었죠.”
김유찬이 웃었다.
“누나랑 같이 먹는데 진짜 맛있더라고요. 그때부터 난 이게 참 좋았어요.”
장미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통조림을 얻어왔는데, 집에 깡통따개가 없다는 건….’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생 많이 했나 보구나.”
김유찬이 웃었다.
“에이. 고생은요. 어릴 때는 다들 그랬잖아요.”
“아니, 그게….”
장미정이 말을 돌렸다.
“그럼 이 디저트를 좀 챙겨가서 누나도 드리지. 네가 강인 씨한테 말하면 따로 좀 챙겨줄 것 같은데. 둘이 친하다며.”
김유찬의 웃음이 어색해졌다.
“누나는… 미국 병원에 있어요. 챙겨가 봤자 못 먹어요.”
“아. 미안.”
바로 옆 테이블에는 친화력 좋은 이연지가 있었다. 그녀는 장미정의 ‘고생 많이 했나 봐’라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아. 얼굴만 보면 재벌 2세나 어느 나라 왕자님인데….”
김유찬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연지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앗! 죄송합니다!”
김유찬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과할 일도 아닌데 네가 일어나서 그러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히히. 그렇죠? 다시 앉아야겠죠?”
이연지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출연한 장면도 몇 번 없었다. 그런데 친화력이 워낙 좋아서 다들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김유찬이 이연지와 같이 앉아있는 권수연을 보았다. 어쩐지 눈이 자꾸 갔다.
“그런데 옆에는 촬영 때는 못 보던 분이신 것 같은데.”
“이 언니요? 오늘 파티에 지인 초대가 된다고 해서 제가 데려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이 파티는 일반적인 쫑파티가 아니다. 나강인이 음식을 책임지는 디저트 파티다.
파티 성격이 술과 고기가 아니라 디저트 중심이라서, 원한다면 가족이나 애인을 데려오라는 뜻으로 지인 동반이 가능하다는 공지가 나갔다.
김유찬과 같은 테이블에 있던 장미정은 살짝 당황했다.
‘단역 배우 중에 애인이라면 몰라도 그냥 친구를 데려온 사람은 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보통은 눈치를 좀 볼 텐데?’
이연지는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니다.
김유찬도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권수연에게 물었다.
“싸인해 드릴까요?”
권수연이 활짝 웃으며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여기 부탁드려요. 팬이에요!”
김유찬도 소리 내어 웃었다.
“음하하하. 제 팬은 어디에도 있더라고요. 성함이?”
“권수연이요.”
김유찬이 손수건에 이름과 인삿말을 멋지게 써서 돌려주고 나서 물었다.
“이런 디저트 어디 가서 먹기 힘듭니다. 진짜 맛있죠?”
권수연이 손수건을 곱게 접으며 대답했다.
“네. 역시 강인이 요리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그렇죠. 강인…. 네? 어? 강인 씨를 알아요?”
“친구예요.”
“어? 어?”
김유찬이 신은하가 있는 방향을 돌아본 후에 다시 물었다.
“친구면 그, 어떤….”
이연지가 얼른 대답했다.
“대학교 동창이래요.”
김유찬의 표정이 풀렸다.
“아하! 대학교. 난 또. 그럼 어느 대학교….”
이연지가 대신 자랑했다.
“한국대학교요. 이 언니 거기 연구실에서 엄청 어려운 거 연구해요.”
“어? 그럼 강인 씨도 한국대학교 나왔어? 아니, 사람이 그렇게 안 봤는데! 공부도 잘했구나.”
권수연이 옛날 일을 생각하며 웃었다.
“공부가 뭐 전부인가요.”
김유찬이 웃는 권수연을 가만히 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꾸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연지가 얼른 물었다.
“앗! 왜 수연 언니를 그렇게 봐요? 혹시 막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고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김유찬이 물었다.
“조금 전부터 궁금했는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권수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잠깐 만난 적도 없어요?”
“없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유찬 씨를 만났으면 제가 기억 못 할 리가 없죠. 팬인데요.”
장미정이 끼어들었다.
“야. 김유찬. 너 일반인을 그런 식으로 꼬시면 어떻게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강인 씨 친구분이라는데.”
김유찬이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어?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
“네가 착각한 거겠지.”
“그런가?”
***
술은 가벼운 종류로 제공되었다.
이 파티에 가족을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가족 중에는 이민지 같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도 있었다. 출연자인 이연지는 고등학생이다. 미성년자가 여럿 있어서 다들 과도한 음주는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오늘 제공된 음식은 대부분 나강인이 만들었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신은하가 손댄 것도 몇 개 있었다.
나강인은 신은하가 만든 디저트 위주로 먹었다.
그녀가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며 실실 웃었다.
“보라야. 봤어? 강인 오빠는 내가 만든 게 맛있나 봐.”
“객관적으로 보든 주관적으로 보든 강인 오빠 디저트가 훨씬 더 맛있어.”
“내가 만들 때 강인 오빠가 도와줬거든?”
“그래서 먹을 수는 있구나?”
“야. 넌 먹지 마.”
신은하가 만든 건 나강인이 만든 것에 비해 맛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도 덜 갔다.
AI 전지인은 직접 만든 야전 전술 요리보다 남이 끓인 라면을 더 선호한다. 남이 만든 맛있는 요리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레스토랑 페넬로페가 AI 전지인의 최애 식당이다.
그런데 신은하의 디저트는 그녀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신은하가 요리를 만들 때 나강인이 옆에서 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 이건 남이 만든 요리의 경계선에 걸려 있습니다. 야전 전술 요리의 느낌이 조금 납니다.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은하 혼자 만들게 둘 수는 없었잖아. 손님들이 은하 디저트에 손도 안 대면 상처받을 테니까.”
나강인의 스마트폰에 톡이 들어왔다. 프프걸스 막내 최지혜였다.
- 우앙! 우리도 디저트 먹고 싶어요!
나강인이 물었다.
- 못 오냐?
- 몰래 가려고 했는데 딱 걸렸어요.
- 어쩌다가?
- 오늘 디저트 파티를 회사에서 알던데요? 그래서 매니저님이 매의 눈으로 우리를 감시했대요. 영화 개봉과 동시에 활동 재개니까 꿈도 꾸지 말고 풀만 먹으래요.
- 틀린 말은 아니네.
- 디저트 먹다 남는 거 있으면 좀 보내주시면 안 돼요? 택배로 위장해서요.
신은하가 다가와서 물었다.
“누구랑 톡 해?”
“지혜. 여기 오려다가 회사에 딱 걸렸다네? 어떻게 알았을까?”
신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아는 게 있구나?”
“오전에 회사에 잠깐 들러서 오늘 파티 엄청 자랑하긴 했는데,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
“회사에는 왜 갔는데?”
“오늘 파티 자랑하러.”
“범인이 너였구나.”
나강인이 톡에 한 줄을 더 썼다.
- 은하가 가져다줄 거야.
- 맛있는 거 먹으면 위로는 되겠네요. 나도 그 파티 가고 싶다.
나강인은 이연지와 권수연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맛있냐?”
이연지가 엄지를 세웠다.
“진짜 맛있어요.”
권수연이 나강인을 보며 웃었다.
“대학생 때는 너 나중에 밥은 먹고 다닐까 걱정했는데, 저렇게 유명한 배우들하고 어울려서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많이 컸다 싶어.”
나강인은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 권수연과 같이 어울려 다녔다는 건 아는데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른다.
나강인이 슬쩍 떠보았다.
“내가 생활력은 좋았잖아?”
“요리를 이렇게 잘하진 않았잖아. 소식이 끊긴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글쎄? 아마 지구를 지키지 않았을까?”
“아하. 지구 환경을 지키는 그런 거?”
“조금 다른 쪽이 아닐까 싶은데.”
매니저 박우섭은 조금 늦게 파티장에 도착했다. 그는 오자마자 요리부터 먹었다.
“크으. 이 맛이지!”
나강인과 신은하가 박우섭에게 다가왔다.
신은하가 타박했다.
“박 실장 오빠. 왜 굶은 사람처럼 먹고 그래? 없어 보이게.”
“굶었어.”
“응?”
“이 파티를 위해서 오늘 아침부터 계속 굶었어.”
“그런 사람이 왜 파티엔 늦었어?”
“이것도 겨우 시간 내서 온 거야. 강인 씨하고 CF 이야기한다는 핑계로.”
“아. 맞다. CF에 끼워 넣고 싶다는 맨탈 나간 애는? 안 데려왔어?”
“원래는 데려오려고 했지.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러면 안 되겠더라. 걔 지금 상태로 여기 와서 잘나가는 배우들 보면 기가 더 죽을걸?”
“아…. 그럴 수도 있겠다. 기 살려주려고 CF에 자리 만들자는 건데 기가 더 죽으면 안 되지.”
나강인이 박우섭에게 말했다.
“어제 목록을 받아서 비교해보니까, 은하랑 저랑 겹치는 CF가 하나가 아니던데요.”
“-저도 어제 통화 끝나고 나서 제가 연락받은 것만 비교했는데도 그렇더라고요. 그중에서 하나 고르시면 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영화 끝났으니까 바로 진행하죠. 내일 SAH 엔터로 가겠습니다. 회의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박우섭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웃었다.
“우리 회사가 강인 씨 소속사는 아니지만, 우리가 그동안 신세 진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뭘 그런 걸 묻고 그러십니까? 내일은 물론이고 나중에도 말만 하시면 회의실 정도는 바로 잡아놓겠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