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20화 (220/411)

220. 미국 닥터

공지현은 영화 ‘운명의 창’에 무사 수연으로 출연했다. 그녀는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과 배우들로부터 연기를 잘한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올해 초에 슬럼프에 빠졌다. 그 후로 공지현은 여기까지가 한계라거나, 이전에 보여준 연기력은 거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드라마 초반에는 떨어진 연기력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연기가 오히려 작년보다 더 좋아졌다. 드라마에서의 비중도 높아졌다.

그녀는 드라마 촬영장 구석에서 나강인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인생이 바뀌었다.

‘나의 운명의 창은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파티룸 창가에 서 있는 나강인이 보였다.

다가가서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은하나 다른 배우, 감독 등등이 나강인과 자꾸 이야기하는 바람에 다가갈 틈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 나강인이 혼자 있는 순간이 왔다.

그녀가 나강인 쪽으로 걸어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말해야….’

갑자기 김유찬이 공지현의 앞에 나타났다.

“오! 우리 소연이! 같이 사진 찍자!”

소연은 그녀의 영화 속 배역의 이름이다.

“네?”

“흐흐. 오늘은 영화 카메라가 아니라 셀카를 찍자.”

공지현이 나강인을 슬쩍 보았다. 이러다 다른 사람이 나강인에게 붙으면 또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접근하기 전에, 창가에 있는 나강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면 선생님도 같이 찍자고 불러요.”

김유찬이 나강인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강인 씨는 됐어.”

“왜요? 같이 찍으면 좋잖아요.”

“강인 씨는 원래 사진 안 찍어. 자기가 연예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공지현이 당황해서 물었다.

“네? 연예인이 아니세요?

“너도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김유찬이 나강인을 다시 쓱 보며 말했다.

“난 강인 씨를 세계 최고의 실전 액션 무술감독이라고 봐. 거기다가 연기력까지 좋잖아.”

“맞아요. 표정 연기는 정말 최고예요.”

“아니야. 몸 쓰는 연기가 최고지.”

공지현이 나강인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 표정 연기는 나만 봤지.’

김유찬이 말했다.

“거기다 이번엔 우리 영화에 배우로도 출연했잖아. 이 정도면 연예인 맞잖아.”

“그러….”

공지현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김유찬의 말에 맞장구를 치려고 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난 무조건 선생님 편을 들어야지!’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건 아닐 수도….”

김유찬이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내 경호무사가 촬영이 끝나자마자 배신 때린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농담이야. 나랑 셀카 찍을 거지?”

“네.”

김유찬이 공지현과 사진을 찍었다.

***

파티 도중에 따로 모여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많았다.

주연배우 김유찬과 셀카를 찍으려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배우나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김유찬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유찬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제안하지 않으면 김유찬이 먼저 다가가 셀카를 찍었다. 공지현도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김유찬은 파티가 끝난 후에, 잘 나온 사진 몇 장을 SNS에 올렸다. 태그도 몇 개 달았다.

#운명의창 #새영화

그가 올린 사진 중에는 디저트 옆에서 찍은 것도 있었다.

#쫑파티는디저트파티로 #내인생디저트들

그런데 그가 올린 몇 장의 사진 중에 공지현과 찍은 것도 있었다.

#운명의 창 #경호무사 #팀원 #소연 #공지현 #연기잘해

***

로버트 민은 미국인이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 어머니는 프랑스 출신 미국인이다.

로버트 민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은 LA 최고의 병원에서 잘나가는 의사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집안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잘했다. 한국 문화에도 익숙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는 특히 한국 영화를 좋아했다.

“‘햇살 좋은 날’이 VOD로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는 관련 소식이 없나 검색해보았다. 그러다 ‘햇살 좋은 날’의 주연배우 김유찬이 신작 영화의 촬영 쫑파티 사진을 올렸다는 글을 발견했다.

“김유찬이 이번엔 연속으로 영화를 찍었네?”

김유찬의 SNS에는 새로 올라온 사진이 많았다. 이번 파티에서 다른 배우들과 찍은 사진도 있었고, 디저트 사진도 있었다.

로버트가 김유찬이 공지현과 찍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 아가씨는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그 배우구나.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던데.”

공지현의 뒤쪽 테이블에서 디저트를 볼이 볼록해질 정도로 입에 집어넣은 소녀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그 특이한 모습이 눈에 띄어서 다시 보았다.

“얘는 사진이 귀엽게 나왔…. 음?”

소녀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가 사진을 확대했다.

고등학생 단역 배우 이연지가 햄스터 같은 모습으로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이연지?”

이연지는 한국 종합병원 외과 과장 이정호의 딸이다. 그는 이정호가 미국 병원에서 근무할 때 같이 일하면서 친해졌다.

로버트는 이연지가 음식을 신나게 먹는 사진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다.

“후우. 이렇게 밝은 아이에게 남은 날이 너무 짧….”

그런데 사진을 확대한 덕분에 이연지의 옆에서 나름 격식을 차리고 디저트를 먹는 권수연도 눈에 들어왔다.

“어?”

로버트가 모니터로 머리를 들이밀고 권수연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진 뒤쪽 배경으로 작게 나온 얼굴은 확대해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얼굴의 절반밖에 찍히지 않았다.

그는 급히 김유찬이 올린 다른 사진들을 찾았다.

“어딘가에 또 찍힌 모습이…. 있다!”

다른 사진에도 배경에 권수연이 살짝 찍혀 있었다. 이번에는 얼굴의 반대쪽 절반이 나왔다.

그가 그 두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급히 그가 가진 환자 정보를 찾았다.

“분명히 여기, 여기, 여기 있다!”

로버트가 권수연의 환자 정보를 열었다.

권수연은 예전에 미국에 와서 닥터 로버트 민에게 진찰받은 적이 있다. 그때 찍어둔 사진이 남아있었다.

그가 그 사진과 화면 속 사진들을 비교했다.

현재 권수연의 얼굴은 그가 갖고 있던 예전 사진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쳤다. 그래서 약간 차이가 느껴졌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

그가 이연지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케이타이거 중증 환자인 이연지와 권수연이 이런 파티에?”

그가 환자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그가 가진 환자 정보에는 권수연의 증상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권수연은 일반적은 음식은 먹을 수 없어. 저렇게 디저트를 먹는 건 불가능한데….”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정호가 이연지에게 식단 제한을 걸었다고 들었는데, 디저트를 저렇게 볼이 부풀 정도로 먹는다고?”

이연지는 권수연과는 증상이 다르다. 그녀는 수술 전에도 이상 증상이 거의 없었다.

이연지가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이정호가 식단에 제한을 걸었던 게 아니다. 이정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연지에게 이런저런 조치를 했는데, 그중에 건강한 식단 위주로 식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연지도 이상하지만 권수연은….”

그가 이연지와 권수연에 대해 아는 건, 케이타이거 증후군 치료법을 찾기 위해 서로 환자를 교차 진료했기 때문이다.

“마치 병이 다 나은 것처럼 먹고 있잖아. 권수연은 평범한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고통을 느껴야 하는데, 너무 편안하고 맛있게 먹잖아. 이건 말이 안 돼.”

그가 휴대폰을 들었다.

“정호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을 해야겠어.”

그는 연락처에서 이정호의 이름을 찾다가 멈칫했다.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치료법을 찾은 거라면?”

이상했다.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줬을 텐데?”

최근에는 연락조차 없었다.

“뭔가 이상해. 많이 이상해.”

그는 이정호가 아니라 지금 문밖에 있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며칠 휴가 낼 테니까, 진료 스케줄 좀 조정해줘.”

“네. 언제부터 휴가세요?”

“지금부터.”

“네?”

곧바로 그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들어왔다.

“농담이시죠?”

“지금 내가 없으면 생명이 위독해지는 환자가 있나?”

“없죠.”

로버트는 진지했다.

“난 있어. 그러니까 이건 농담이 아니야.”

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스가 하라고 하면 해야죠. 욕은 제가 다 먹겠지만요.”

“땡큐. 항공권도 하나 구해줘. 제일 빠른 것으로. 오늘 당장 출발해야 해.”

“어디로 가시는데요?”

“인천국제공항.”

***

나강인은 SAH 엔터를 찾아갔다.

SAH 엔터에는 가수 파트와 배우 파트가 있다.

나강인은 가수 댕댕이란 가명으로 이 회사에서 음반을 냈고,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의 자연 체조 시리즈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새 영화 OST에도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가수 파트만 인연이 있는 게 아니다. 연기 파트 쪽에는 유명 무술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박우섭 실장이 사장 서재현에게 물었다.

“나강인 씨가 방금 회사에 왔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서재현이 즉시 대답했다.

“아니.”

“강인 씨 정도 되는 급이 회사에 찾아오면 사장님이 만나서 인사라도 하셨는데….”

“그거야 계약하자고 조르려고 그런 건데, 나강인 씨는 그….”

서재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조르기가… 좀 무서워서.”

나강인이 국제용병이나 해적단을 혼자서 쓸어버렸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 회사에 딱 세 명이 있다. 신은하와 박우섭, 서재현이다.

서재현이 말했다.

“박 실장이 잘해드려. 나중에 도움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지금도 우리 회사가 도움은 많이 받는데요?”

“아니. 회사 말고 나 개인적으로 말이야. 내가 용병이나 해적한테 붙잡히면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해야겠어?”

“여긴 한국인데요?”

“은하는 뭐 미국에서 그 사건들을 겪었냐?”

“어…. 그렇죠. 알겠습니다.”

***

회의실에 나강인과 신은하, 박우섭이 모여 CF 제안이 온 것을 검토했다.

박우섭은 나강인과 신은하 둘 다 제안받은 CF의 리스트를 미리 뽑아놓았다.

“그중에서 괜찮은 것만 따로 추려서 표시했습니다. CF를 아무거나 다 받았다가 잘못하면 이미지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은 그 명단을 놓고 조금 더 의논했다. 그렇게 대상 CF를 2개로 줄였다.

박우섭이 그중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둘 다 조건은 비슷한데, 저는 기왕이면 이쪽 CF를 추천합니다.”

그 이유도 솔직하게 말했다.

“저쪽 건 제가 맡은 애를 꽂으려면 CF 기획을 조금 바꿔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쪽은 조연 자리가 두 개나 있어서 그중 하나에 그냥 꽂으면 됩니다. 바로 여기 이 자리에요.”

나강인이 말했다.

“그러네요. 조연이 두 명이네요. 그럼 여기에….”

‘연지를 꽂아줄 수 있겠는데?’

남은 자리는 조연 중에서 비중이 더 낮은 쪽이다.

‘그게 어디야.’

나강인이 그 배역을 손으로 짚었다.

“그럼 이 자리에는 제가 아는 애로 해도 될까요?”

“아유. 그럼요.”

신은하가 즉시 치고 들어왔다.

“잠깐. 이거 여자 배역인데 누구를 꽂게?”

“연지.”

“아아. 연지는 나도 찬성.”

***

닥터 로버트 민은 인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이정호가 근무하는 종합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는 택시에서 이정호에게 지금 간다고 연락할까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두 환자의 상태가 호전됐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알려줘야 했어. 그런데도 안 한 건,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였을 거야. 내가 먼저 연락하면 나를 피할지도 몰라.’

그는 종합병원 앞에서 택시를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정호의 방이 어디인지는 안다.

그런데 그는 그쪽으로 걸어가다가, 이연지가 뛰어다니는 걸 발견했다.

“이연지!”

이연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앗! 로버트 아저씨!”

이연지가 얼른 달려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어디 아픈 덴 없고?”

“없죠. 저 엄청 건강해요.”

“다행이다. 그런데….”

로버트 민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영화 쫑파티 사진에서 널 본 것 같은데….”

“아아. 그거요? 저도 그 영화에 출연했어요. 영화만 하나요? 아니죠. 드라마도 하나 해요. 히히.”

닥터 로버트 민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배우가 됐다고?’

그는 이정호가 이연지의 연예계 활동을 허락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환자가 연예계에서 활동하다가 상태가 나빠진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허락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야.’

한국으로 오는 동안 은근히 기대하긴 했다. 그 기대가 확신으로 변했다.

‘치료법을 찾아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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