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21화 (221/411)

221. 미국 닥터 II

이연지가 웃었다.

“히히. 배우가 됐다고 한 건 장난친 거예요.”

닥터 로버트 민은 당황했다.

“어? 그럼 아니야?”

“영화랑 드라마에 출연하긴 했는데 그냥 단역이에요. 대사도 몇 줄 없어요.”

로버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왜 그렇게 안심하세요? 와. 설마 지금 알레이나 언니하고 비교한 거 아니죠?”

“아니야. 알레이나는 가수잖아.”

“에이. 언니가 팝스타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근데 할리우드에서 영화출연도 했잖아요.”

로버트가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했다.

“연지야. 혹시 최근에 무슨 치료를 받은 거 있어?”

“웅…. 저번에 잠깐 입원하긴 했는데, 그건 다 나았어요.”

로버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앗! 저 가봐야 해요!”

이연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뛰어갔다.

로버트 민은 이연지가 복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가 이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정호. 나다. 로버트 민.”

- 어. 로버…. 음? 이거 국제전화가 아닌데?

“한국에 왔다.”

- 그래? 세미나?

로버트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만나려고.”

- 응? 말도 없이?

“지금 병원에 있다.”

- 미리 연락하고 오지.

“그러면 네가 안 만나줄 것 같아서.”

-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연지를 봤다. 배우를 한다고?”

- 아, 그건 하도 하고 싶다고 하니까 허락했지.

“권수연 환자 말이야. 디저트를 먹을 수 있더군.”

갑자기 대답이 없어졌다. 전화기에서는 조금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로버트가 말했다.

“이 전화를 받을 수 있으니까 지금 볼 수도 있겠지. 당장 만나.”

대답은 잠시 후에 돌아왔다.

- 병원 옥상에서 보자.

***

이연지는 병원 앞에서 나강인과 신은하를 만났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우왕. 저 만나러 같이 오신 거예요?”

신은하가 대답했다.

“그러겠니? 우리 둘이 동네 산책하다가 너 생각나서 전화한 거야.”

이연지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앗! 두 분만요? 이거 데이트인가요?”

나강인이 말했다.

“너 보러 온 거 맞아. 은하가 농담한 거다.”

“흐흐. 혹시나 했어요. 우리 얼른 식당으로 가요. 이 근처에 라볶이 맛집이 있어요.”

“철이네? 맛나분식? 호호스낵?”

“아니, 옆 동네 사는 분이 어떻게 이 동네 삼대 분식을 다 알아요?”

“그러게.”

AI 전지인은 이 지역 맛집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나강인이 말했다.

“오늘은 밥 사주려고 온 게 아니야. 일 때문에 왔어.”

“네? 저 일 시키려고요?”

이연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고등학생인데요? 막 짐 나르고 벽지 바르고 그런 거 못 해요. 공부해야 돼요.”

“무슨 상상을 하는 거냐.”

“이삿짐?”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CF야.”

“넹?”

이연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CF에서 제가 뭘 해요? 짐 옮겨요? 반사판 들어요?”

“엑스트라.”

“우왕!”

“보다는 조금 더 비중이 높은 단역.”

“우와앙!”

“은하 뒤쪽에서 배경처럼 움직이는 역할인데, 대사가 한 마디지만 있다.”

“우와아앙!”

“좋냐?”

이연지가 활짝 웃었다.

“그 CF가 TV에서 나올 때마다 저도 보이는 거잖아요. 대박 좋죠!”

나강인이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이걸 하려면 너만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넌 미성년자니까 부모님 허락도 받아야지?”

이연지가 큰소리쳤다.

“흐흐.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아빠가 저 드라마 나왔다고 병원에 자랑 엄청 하셨어요. 아직 개봉도 안 한 영화도 자랑하시니까, CF 찍는다고 하면 더 좋아하실 거예요.”

“그럼 잠깐 뵐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네 이야기 말고도 물어볼 게 있거든.”

유나린 박사는 인공 근육 연구를 맡았다.

오메가테크가 맡은 부분의 핵심은 신경 신호 전달 기술이다.

나강인은 의수의 기본 골격 설계를 맡았다.

AI 전지인은 2082년식 대용품 의수를 만들 수 있다. 그 시대 기준으로는 최소한의 기능밖에 없는 의수이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그 정도면 최첨단이다.

문제는 그 의수의 기본 골격은 2082년에 존재하는 부품을 사용하는 걸 전제로 한다는 데 있다.

지금은 그런 부품이 없다. 특히 사람의 신체와 닿는 부분이 문제였다. 그걸 설계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그 문제를 오메가테크에 떠넘길 생각이다. 그런데 떠넘기는 것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다.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의사의 자문도 받아야 했다.

나강인이 아는 의사는 이정호와 김중석밖에 없다. 둘 다 이쪽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강인보다는 아는 게 많다.

그래서 그는 오늘 이정호를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다.

이연지가 병원 현관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그럼 들어가서 허락받아요!”

“라볶이는?”

“허락받고 나와서 기분 좋게 먹어야죠.”

“네가 사냐고?”

“넹?”

신은하가 웃었다.

“농담한 거야. 농담.”

AI 전지인이 말했다.

- 실패했습니다.

****

이 병원은 옥상에 휴게공간을 만들어두었다.

외과 과장 이정호는 넓은 옥상 정원 구석에서 미국 의사 로버트를 기다렸다.

로버트는 이정호를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권수연 환자는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없어.”

그가 스마트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김유찬과 공지현의 셀카 뒤쪽에 디저트를 먹는 권수연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네 딸과 같이 음식을 먹고 있잖아.”

“그건….”

“연지는 배우가 됐다며? 선례를 알고 있는 네가 연예계 활동을 허락할 리 없는데 어째서?”

“연지가 하도 하고 싶다고 하니까….”

“거짓말!”

로버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나는 비행기 타고 오는 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했다. 그런데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이정호를 노려보며 질문했다.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의 치료법을 찾아냈지?”

이정호가 머뭇거렸다. 그 수술은 비밀로 하기로 관계자 전원과 약속했다.

이연지는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다가 나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비밀 유지가 쉬웠다.

권수연은 수술 과정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안다. 그래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

권수연이 밖에서 음식을 먹는 건 상관없었다. 그녀가 걸렸던 병이 뭔지, 그 병의 특징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특히 그녀가 그 병 때문에 일반적인 음식 섭취가 어려웠다는 걸 아는 외부인은 전 세계에 몇 명밖에 없다. 그나마도 모두 외국에 있다.

그래서 이정호는 권수연이 한국에서 일상생활을 해도 들키지 않을 줄 알았다. 예전 증상을 아는 사람과 마주칠 리 없기 때문이다.

‘설마 연예인의 뒤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이 찍힐 줄이야.’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하필 톱스타 김유찬이다. SNS에 올린 그 사진을 미국에서 로버트 민이 보았다.

로버트 민은 권수연의 증상을 잘 아는 몇 명 중 하나다.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 권수연의 의료 정보를 공유하고 이정호와 같이 연구한 사람이다.

이정호는 내심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알려질 줄은 몰랐는데.’

로버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대답을 못 하는 거 보니까 사실이구나! 정말로 치료법을 찾았어!”

이런 상황까지 와서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로버트 민은 유명하고 유능한 의사다. 그런 의사를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로버트 민이 의학계에 소문을 내면 사태는 최악이 된다.

“그게 사실은….”

로버트가 외쳤다.

“찾았냐고!”

이정호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옥상 정원 반대편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그가 있는 쪽을 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큰 관심은 없어 보였다.

“목소리를 좀 낮춰. 찾긴 찾았는데….”

로버트가 이정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작아진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럼 내 딸도!”

“하지만 치료 과정에 문제가….”

로버트가 다급히 말했다. 목소리는 더 낮췄다.

“문제가 있으니까 나한테도 알리지 않고 숨겼겠지!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이거나,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는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남이 알면 안 되는 이유가 있겠지! 그게 뭐든 상관없어! 제발 내 딸도 살려줘!”

“알레이나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좀 진정해. 일단 너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난 안 돌아가! 내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

***

나강인과 신은하는 이연지와 함께 병원으로 들어왔다.

신은하가 물었다.

“넌 오늘 병원에 왜 왔어?”

두 사람이 아까 이연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는 병원이라는 대답만 들었다.

“건강에 이상 없는지 검사받으러 왔어요. 저번에 수술한 거 잘 됐는지 보는 거죠.”

“검진은 전에도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검사를 그렇게 자주 해?”

“그쵸? 아빠가 의사고 엄마가 간호사인데 오히려 더 예민하시다니까요.”

그들은 일단 옥상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바쁘고 아빠는 지금 방에 없으니까, 일단 옥상 정원으로 가요. 자판기 음료수 정도는 제가 쏠게요. 라볶이는 아저씨가 쏴요.”

그런데 옥상에 올라간 그녀는 거기서 이정호와 로버트를 발견했다.

“어? 아빠랑 로버트 아저씨다.”

***

이정호가 로버트에게 말했다.

“성공한 건 겨우 두 케이스야.”

“몇 번 시도해서?”

“두 번….”

로버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백 퍼센트!”

“사례가 두 번밖에 없으니까 성공률 계산은 의미가 없는 거 알잖아. 지금은 그 두 케이스를 연구하고 있어. 데이터를 분석하다 보면 다른 치료 방법이 나올 거야.”

“이미 치료에 두 번이나 성공했잖아. 왜 다른 치료 방법이 필요하다는 거지?”

이정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기존에 사용한 방법은 다시 쓰기 어려워.”

“난 그 방법이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이라도 상관 안 해. 난 내 딸만 살릴 수 있으면 돼.”

“나 혼자 한 게 아니야. 문제가 터지면 내가 책임질 방법이 없다고.”

“다른 조력자가 있어? 그럼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줘. 내가 설득할 테니까.”

“그건 말해줄 수가 없….”

이연지가 옥상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빠! 로버트 아저씨!”

이정호가 이연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강인과 같이 있었다.

“어?”

로버트도 그쪽을 보았다. 이연지가 나강인, 신은하와 함께 있는 걸 보았다.

로버트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주 본다. 그녀는 신은하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안다.

그가 이정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연지가 배우들과 같이 왔….”

이정호는 대놓고 알아볼 정도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로버트가 다시 이연지 쪽을 보았다. 신은하의 직업이 의사가 아니라 배우라는 건 안다.

그런데 같이 있는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로버트의 머릿속에서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혹시?’

그는 조금 전에 케이타이거 증후군 치료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달라고 했다. 이정호는 그럴 수 없다고 하다가, 이연지 쪽을 보고 갑자기 당황했다.

로버트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이야? 내 딸을 치료하려면 저 사람이 도와줘야 해?”

“그, 그게….”

“맞구나!”

로버트가 즉시 나강인에게 달려가 부탁했다.

“우리 딸 좀 살려주십시오!”

나강인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눈치챘다.

AI 전지인이 불평했다.

- 이정호의 입이 예상보다 훨씬 쌉니다. 비밀을 벌써 누설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정호가 급히 다가왔다. 그는 얼른 나강인과 로버트만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옥상 한쪽에 남은 신은하가 이연지에게 물었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모르죠.”

“저 아저씨 딸이 악당에게 납치된 거야? 그래서 강인 오빠한테 구해달라는 건가?”

“아닐 걸요? 아까 저랑 만났을 때는 분위기가 안 심각했단 말이에요.”

“방금 구해달라고 하는 거 너도 들었잖아.”

“알레이나 언니는 미국에 있어요. 한국에 와서 아저씨한테 구출해달라고 부탁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뭐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른 이유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로버트를 쳐다보았다.

“근데 저 아저씨 얼굴은 서양인처럼 생겼는데 한국말 되게 잘하신다. 우리나라 사람이셔?”

“아뇨. 로버트 아저씨의 아버지가 교포세요. 저 아저씨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래요.”

옥상 구석에서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정호가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난 우리 비밀을 저 친구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믿어줬으면 합니다.”

“그럼 우리 일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로버트가 얼른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서 이연지와 권수연이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로버트가 설명했다.

“이 친구 잘못이 아닙니다. 권수연이 음식을 먹는 사진을 보고 제가 여기로 찾아왔습니다.”

“아. 이 파티….”

이 파티의 음식은 나강인이 만들었다.

“이것만 보고 상황을 눈치챘다는 말이군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위험합니다.

이정호가 보충설명을 했다.

“로버트는 저와 같이 케이타이거 증후군을 발표한 의사입니다. 그 병의 몇 없는 전문가 중 한 명이고, 권수연 환자를 진찰한 적도 있어서 증상이 어떤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희귀병인 케이타이거 증후군은 의사 세 명이 최초로 찾아내 발표했다. 로버트가 그 세 명의 의사 중 하나다.

나강인이 혀를 찼다.

“상황이 복잡해졌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