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알레이나 민
병원 옥상에서 비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누군가 엿들을 위험은 낮았다. 옥상 정원은 사방이 트여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의사 로버트의 표정이 문제였다. 외국인이 외과 과장 이정호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뭔가를 부탁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목격하면 좋을 건 없다.
그래서 나강인과 이정호, 로버트는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이정호가 말했다.
“제 방은 곤란합니다. 처음부터 거기서 모였으면 그나마 낫지만….”
이미 옥상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이 몇 명 있다. 이정호의 방으로 장소를 옮기면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더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나중에 미국인 환자가 들어오고 이정호가 그녀를 특별 관리하면, 오늘 일을 떠올리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전에 우리가 모여서 이야기한 그 술집, 가능할까요?”
그 술집은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이 개인적인 인맥으로 빌리는 곳이다.
이정호가 동의했다.
“권 사장님도 상황을 알아야 하니까 거기가 좋겠군요. 우리 가족에게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나강인이 미국 의사 로버트 민에게 말했다.
“표정 푸세요. 여기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다 끝장이니까.”
로버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렇게 해야지요. 저는 지금 친구를 만나러 한국에 왔다가 조금 흥분한 겁니다.”
“흥분한 이유를 만들어내야겠는데, 미국에서 보증 서달라고 찾아왔다고 하면 무리이려나….”
“네?”
나강인이 물었다.
“여기는 뭘 부탁하러 온 겁니까?”
“그야 당연히 제 딸을….”
“진짜 이유 말고, 남들이 물었을 때 둘러댈 만한 거로 대답하시죠.”
“어….”
갑자기 물어봐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나강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의학적 견해의 의견 충돌. 그거로 하죠. 구체적인 내용은 두 분이 만들어내세요. 여기서 표정 풀고 그 이야기를 하면 되겠네요.”
해야 할 일은 하나 더 있다.
“적당한 핑계가 준비되면, 저쪽에 있는 목격자에게 들리게 자리를 옮겨 가면서 이야기하세요. 그래야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
나강인은 두 사람을 옥상에 남겨두고 이연지와 신은하에게 돌아왔다.
신은하가 물었다.
“무슨 이야기야? 저 아저씨 왜 흥분한 거야?”
“의학적 견해가 서로 달라서 잠깐 목소리가 커졌는데, 저 미국 사람이 바로 사과했어.”
이연지가 씩 웃었다.
“그럼 우리 아빠가 로버트 아저씨를 이긴 거죠? 아싸아!”
나강인이 물었다.
“저 사람 이름이 로버트야?”
“네. 로버트 민. 미국에서 엄청 잘나가는 의사예요.”
“너도 잘 알아?”
“아빠가 잘 알죠. 저는 아빠 친구분이니까 한국에 오시면 인사 하는 사이?”
“그렇군.”
이연지가 물었다.
“왜요?”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아니다. 우린 나가서 CF 이야기나 할까?”
“네? 아빠 허락 안 받고요? 아빠한테 물어볼 것도 있으시다면서요.”
“내 일은 친구분이 먼 곳에서 왔는데 끼어들 만큼 급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이연지가 큰소리쳤다.
“흐흐. 그럼 CF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나중에 엄마 아빠 허락 다 받아놓을게요.”
“난 걱정 안 해.”
“저를 엄청 믿으시는구나!”
“부모님 허락을 못 받으면 너만 CF에서 빠질 테니까, 네가 걱정해야지.”
“우앙! 그건 아니죠!”
***
그날 밤에 서울 외곽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술집의 간판 조명이 꺼졌다. 술집 주인은 음식만 차려놓고 자리를 비웠다.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이 그 술집을 빌렸다. 그는 전에도 이곳에서 나강인과 이정호를 만나 권수연의 수술을 의논했다.
오늘은 그때 멤버에 미국 의사 로버트 민이 추가됐다.
나강인이 권수연의 아버지인 권동진에게 말했다.
“조용한 곳이 필요해서 부탁드렸습니다. 여기가 안전하더라고요.”
“괜찮아.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 다만….”
권동진이 이정호에게 물었다.
“닥터 로버트 민이 어떻게 우리 일을 알게 된 겁니까?”
권동진은 과거에 권수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권수연의 체력이 그나마 남아있을 때는 미국에 있는 로버트 민에게 데려가기도 했다.
로버트가 설명했다.
“영화사 쫑파티 사진을 보다가, 연예인의 셀카 뒤에서 음식을 먹는 권수연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눈치챘습니다.”
“그런 파티가 있었습니까?”
“따님이 어디를 다니는지 모르시는지….”
“이젠 건강하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죠. 부럽습니다.”
“어쨌든 어떻게 아셨는지는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로버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치료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지요?”
권동진과 이정호가 나강인을 보았다. 알려줄지 말지는 나강인이 결정해야 한다.
나강인이 말했다.
“불법이란 게 문제입니다.”
로버트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쪽으로 불법인지…. 혹시 장기 밀매나….”
“그 병은 이정호 과장님과 제가 같이 수술해야 합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로버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술시간을 늘릴 방법을 찾았군요! 역시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의사가 아닙니다.”
“예?”
“의사 면허가 없습니다.”
로버트가 당황한 얼굴로 이정호를 보았다.
이정호가 대답했다.
“내가 절개와 성형, 닥터 노네임이 봉합을 맡는 수술법을 만들어냈어. 그 수술에서 나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닥터 노네임은 절대로 대체할 수 없어.”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면허 이야기는….”
“닥터 노네임은 의사 면허가 없어. 코드 네임을 그렇게 붙였을 뿐, 법적으로는 닥터가 아니야.”
로버트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불법이라는 말이…. 의사 면허가 없는 게 문제다? 혹시 박탈됐나?”
“의대를 다닌 적이 없어.”
“어? 분명히 봉합을 맡아야 한다고….”
“그 분야에서는 신의 손이야. 직접 보면 감탄할 거야.”
로버트의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그에게 중요한 건 닥터 노네임이 의대를 나왔는지가 아니다. 봉합 기술을 어디서 배웠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정도는 그가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작은 문제였다.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난 괜찮아! 이미 두 번이나 성공했잖아. 나는 내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다 상관없어! 누굴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 의사 면허가 날아가도 괜찮아!”
“네 의사 면허가 문제가 아니야. 조금만 실수해도 환자를 잃을 수 있는 대수술을 의대를 다녀본 일조차 없는 일반인이 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생기겠어?”
“아….”
“처벌은 닥터 노네임이 제일 크게 받을 거야.”
로버트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미, 미안합니다. 그런데 난…. 도저히 내 딸을 포기할 수 없어요.”
그가 이정호를 가리켰다.
“너도 그래서 닥터 노네임에게 수술을 부탁했던 거잖아. 다 잃어도 좋으니까 딸만 살릴 수 있으면 뭐든 한 거잖아!”
그는 권동진에게도 말했다.
“권 사장님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요!”
두 사람도 안다. 그들은 로버트가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했다.
이정호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문제도 많아. 그 수술을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할 수는 없어. 수술에 필요한 약과 수혈팩은 모두 불법으로 구해야 하는데, 이미 두 번이나 저질렀어. 꼬리가 길면 밟혀.”
“한국에서 안 되면 미국에서 수술하면 되잖아!”
로버트가 얼른 나강인에게 말했다.
“LA로 와서 수술하시면 한국에서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약과 수혈팩 문제를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그런 건 돈만 있으면 다 구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합니다.”
로버트의 모습이 너무 간절했다. 게다가 이 상황을 그냥 묻어두면 죽어가는 딸을 가진 아버지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인간적으로 도와주고 싶기는 한데.’
문제가 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너도 국제선 여객기를 탈 수 있을까?”
- 공항에서 사용하는 장비가 저를 탐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공항 검색 시스템에 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걸릴 수도 있단 소리네.”
- 검색 장비의 성능이 예상보다 좋으면 인천국제공항의 출국장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출국할 때만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 입국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
- 만약 LA 공항에서 입국할 때 제 정체가 노출되면 미국에 억류될 수도 있습니다.
“51구역 실험실로 끌려가는 건 사양이지.”
- 일이 모두 끝난 후에 LA 공항에서 출국할 때는 더 정밀한 검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와서도 또 위험하지. 결국 네 번이나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네.”
- 요원님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임무 수행이 어려워집니다. 현재 시점에서 국제선 항공기를 타는 건 피하십시오.
나강인이 로버트에게 말했다.
“난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정호도 반대했다.
“로버트. 한국에서 불법인 게 미국에서 합법이 되진 않아. 그리고 미국에서 수술하다 걸려서 다 같이 미국 교도소로 끌려가는 건 더 싫어.”
권동진도 한마디 했다.
“미국으로 가면 새 수술 스태프가 필요할 텐데, 그러면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여기서 더 늘어나잖습니까?”
로버트가 흥분했다.
“모든 건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면, 책임질 방법이 없잖습니까?”
“제발!”
AI 전지인이 말했다.
- 로버트 민이 적대적으로 돌아서면 요원님의 안전과 임무 수행이 위험해집니다. 제거하시겠습니까?
“야. 아버지가 딸을 살리겠다는데 제거할 수는 없잖아.”
- 그럼 수술하시겠습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어.”
- 비밀 유지를 확실히 보장받아야 합니다.
“걸리면 같이 망하게 해야 비밀을 유지하겠지. 이 병의 전문가라니까 수술에 참여시키자.”
- 알겠습니다.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물었다.
“그 수술실 세팅이 한 번 더 가능합니까?”
이정호도 지금 상황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강인의 질문을 받자마자 조금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가능합니다. 이미 물어보고 왔습니다.”
“약과 수혈팩은요?”
“그게 문제입니다. 이미 두 번이나 빼돌려서, 또 시도하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권동진은 제약회사 사장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약을 몰래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못 구하는 약은 이정호가 빼돌려야 한다.
로버트는 한국말을 한국인처럼 잘한다. 그는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아들었다.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딸을 살려주는 겁니까?”
나강인이 대답했다.
“다른 분들이 다 동의하시고, 한국에서 수술하는 조건으로요. 살리고 싶으면 따님을 데리고 들어오셔야 합니다.”
로버트가 벌떡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으하하! 정호도 고마워! 권 사장님도 고맙습니다!”
“수술에 필요한 약품과 수혈팩은 이제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 문제는 직접 해결하셔야 합니다.”
미국 의사 로버트 민은 순식간에 방법을 생각해냈다.
“제가 당분간 한국에 연구 목적으로 체류하겠습니다. 약과 수혈팩 모두 연구용으로 미국에서 들여오면 됩니다.”
“그렇게 위장해서 처리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괜찮습니다. 제 딸이 부자니까요.”
나강인은 멈칫했다.
‘어? 의사인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 부자야?’
그가 다른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로버트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지인아.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보이지?”
- 이연지나 권수연과는 다른 상황으로 보입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따님이 왜 부자입니까?”
“그야 당연히…. 어? 모르셨습니까?”
“따님 재산 상황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따님 이름도 모릅니다.”
“아….”
로버트 민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제 딸이 알레이나 민입니다.”
“네.”
“알레이나 민이라니까요?”
“민 씨 가문의 알레이나. 제가 잘못 이해한 게 있습니까?”
“아니, 그게….”
이정호가 옆에서 설명했다.
“팝송을 안 좋아하시면 모를 수도 있죠. 저도 요즘 팝송은 잘 모릅니다. 알레이나는 미국 팝스타입니다.”
“그러니까 가수군요.”
“맞습니다.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서 노는 가수죠.”
“대단하군요.”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본업은 가수이지만 연기도 꽤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인기 있는 팝스타에, 영화에도 출연해서 호평을 받은 배우다? 미국에서 그 정도면 다른 나라에도 많이 알려졌겠군요.”
“그렇지요. 게다가 한국말을 잘해서 우리나라에는 팬이 더 많습니다.”
“그런 가수가 한국에 들어오면 팬과 언론의 반응이 정말 뜨겁겠고요.”
“물론입니다.”
나강인이 혀를 찼다.
“쯧. 우리가 뭘 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말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로버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치료 대상이 너무 유명한 인물입니다. 비밀 유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