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동네 사람
이연지가 설명했다.
“‘운명의 창’은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났어요. 지금은 편집 작업 중이에요. 개봉하기 전이니까 미국에서는 못 들어본 게 당연하죠.”
자동차 뒷좌석에 누워있던 알레이나가 머리를 다시 시트에 대며 무성의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이연지가 큰소리쳤다.
“우리 영화 엄청 잘될 거예요. 영화 촬영 기간 내내 다들 이번 영화가 대박이라고 난리였거든요.”
“그래. 나도 저번에 말아먹은 영화 찍을 때 다들 대박이라고 했어.”
“나이트 스트라이커요?”
나이트 스트라이커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일하다 밤에는 범죄조직과 싸우는 영화다.
알레이나는 주인공 쪽 팀원으로 출연했다.
“그건 나름 성공했거든?”
“아. 그게 더 유명해서 말했어요. 그럼 스파이 셰프?”
‘스파이 셰프’는 레스토랑 주방에 여러 조직의 스파이들이 경쟁적으로 침투했다가, 결국 진짜 요리사는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스파이들이 요리를 만드는 코미디 액션 영화다.
알레이나는 그 스파이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이연지가 말했다.
“근데 스파이 셰프는 액션도 그냥 그렇고 스토리도 엉성하고 배우들도 연기력 문제가 좀….”
“남 이야기 같지? 나도 찍는 동안은 그 영화를 말아먹을 줄 몰랐어. 현장 분위기는 되게 좋았거든.”
이연지는 항복하지 않았다.
“우리 영화는 달라요. 주연배우가 김유찬이에요. 그리고 무술감독이….”
알레이나가 다시 머리를 들었다.
“잠깐! 김유찬이 벌써 영화를 또 찍었어? ‘햇살 좋은 날’이 아직 극장에 걸려 있을 텐데?”
“어머. 김유찬 아세요? 혹시 팬?”
“그 정도는 아니고, 김유찬 나오는 영화는 다 보는 정도?”
이연지가 씩 웃으며 자랑했다.
“흐흐. 저는 이번에 그분하고 같이 영화를 찍었답니다.”
“좋겠다.”
알레이나가 다시 머리를 시트에 붙이며 말했다.
“한국에 들어온 김에 ‘햇살 좋은 날’이나 봐야겠다.”
“빨리 봐야 할걸요? 그거 이제 다 내려가서 상영하는 데 별로 없어요.”
“그럼 내일 봐야지. 너 내일 시간 되니?”
“저 고등학생인데요?”
“밤에는?”
“밤에 땡땡이칠까요? 흐흐.”
“쳐.”
이연지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언제 집에 가요?”
“좀 더 쉬었다가. 나 지금 여기까지도 겨우 왔어.”
“네? 왜요? 어디 아파요?”
알레이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들었던 주의사항이 생각났다.
‘아. 얘는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다가 나았는지 모른다고 했지.’
부러웠다.
“너 혹시 어디 아픈 데 없어?”
“전혀요. 저는 완전 초건강체질이에요.”
그 소리를 들으니 기대가 됐다.
‘나도 쟤처럼 건강해질 수 있겠지?’
그녀가 조금 힘을 냈다.
“그럼 운전해. 우리 아빠가 준비했다는 집으로 가자.”
“저 고등학생이라니까요?”
“고등학생은 운전 못 해?”
“면허가 없으니까 당연하죠. 언니는 면허 있죠?”
“국제운전 라이센스가 있어. 해외 공연이 잦아서 항상 유지하고 있거든. 그러면….”
그녀가 뒷좌석에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 비행기를 오래 탄 데다가 조금 전에 너무 빨리 걸어서 체력이 완전히 방전됐어.”
***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이 소속 가수 몇 명과 식당에서 룸을 빌려 술을 곁들인 식사를 했다.
서재현이 말했다.
“크으. 일 끝나고 마시는 술이 난 참 좋더라.”
그 자리에 모인 가수 중 한 명이 물었다.
“형. 우리는 미국 언제 가요?”
“가고 싶으면 가. 공항 가서 미국행 티켓 끊고 가라. 하루도 안 걸려.”
“에이. 그거 말고요. 우리 회사는 미국 진출 계획 없어요?”
“응. 없어. 그건 돈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야. 아직 여건이 안돼.”
“도전은 해볼 수 있잖아요.”
서재현이 안주를 먹으며 손을 흔들었다.
“해. 안 말려. 가서 도전해보고 실패하면 몇 달 휴가 갔던 셈 쳐. 네 돈 나가지 내 돈 나가냐?”
“와. 너무하네.”
“지금 네 실력으로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게 너무하지.”
한쪽에서 스마트폰을 보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어?”
서재현이 물었다.
“넌 또 왜? 너도 미국 가려고?”
“알레이나 민이요.”
서재현이 소주를 홀짝 마신 후에 소리를 냈다.
“캬아. 좋다. 알레이나 민? 걔 할아버지가 한국인이잖아. 어떻게 한국에 안 들어오나?”
“들어왔다는데요?”
“어딜 들어와?”
“우리나라요.”
“어?”
“인천공항에서 입국하는 모습이 목격됐대요.”
서재현이 손을 흔들며 급히 말했다.
“가져와 봐!”
가수가 스마트폰을 가져와 인터넷 게시판에 뜬 목격담을 보여주었다.
“여기요. 이 사람이 봤는데 분명히 알레이나 민이었대요.”
“사진은?”
“사진은 못 찍었다는데요?”
“잘못 본 거 아냐?”
“이름을 부르니까 도망쳤다는데요?”
“어? 그럼 진짜인가?”
서재현이 스마트폰을 돌려주고 홍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사장님. 저 퇴근하는 중인데요.
“야. 알레이나 민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목격됐대. 게시판 글 링크 보내줄 테니까 진짜인지 좀 알아봐.”
- 예?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서재현이 전화를 끊은 후에 손을 비볐다.
“이건 기회야. 우리가 알레이나랑 음반 하나만 내면….”
“낸다면 빅파이브에서 내지 않을까요? 진짜면 그 회사들도 움직일 텐데요.”
“그런가? 그럼 알레이나를 우리 회사의 미국 진출 인맥으로….”
“같이 음반을 낸 것도 아닌데 무슨 연줄로요?”
서재현이 딴죽을 걸던 가수를 손으로 가리켰다.
“야! 쟤 누가 데려왔어?”
다른 가수가 대답했다.
“사장님이요.”
“나구나. 내가 왜 그랬을까? 그리고 넌 꼭 초를 쳐야겠냐? 술 마시면서 꿈은 꿀 수 있잖아!”
다른 가수가 얼른 말했다.
“그럼요. 사장님이 전화하시면 알레이나 민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을 겁니다. 사장님 팬이라면서요.”
서재현이 가수 출신이긴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다들 안다.
“네가 더 나빠! 야! 오늘 술값은 더치페이다! 각자 뿜빠이 해!”
***
나강인은 최근에는 다른 일이 많아 피시방에 들르지 않았다. 나강인이 없으면 피시방에서는 특별요리가 나오지 않는다.
신은하와 이보라가 간만에 의견일치를 보고 나강인을 압박했다.
“우리는 밥을 원한다!”
“기왕이면 불잡탕조림으로 달라!”
“고기 많이 넣어서!”
“맵게!”
나강인이 말했다.
“며칠 내로 피시방에 들를 테니까 그때 오든가.”
“우리는 지금 당장 원한다!”
“맵게!”
나강인은 결국 불잡탕조림을 집에서 만들어 밀폐용기에 담아 나눠주었다.
“넉넉하게 담았으니까 당분간 조르지 마라.”
신은하가 큰 밀폐용기에 잔뜩 담긴 불잡탕조림을 가지고 본가로 갔다.
그녀의 동생 신영석이 현관 앞까지 달려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뭐냐? 이 평소와 다른 공손함은?”
“누나 환영한 거 아니야. 밥을 환영한 거지. 오늘 전리품이 뭐야?”
“불잡탕조림.”
신영석이 환성을 지르며 밀폐용기가 담긴 봉투를 받았다.
“아싸아!”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식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먹자. 배고프다.”
“식기 전에 먹으면 더 좋으니까 빨리 가져와.”
신은하가 툴툴댔다.
“딸자식은 안 기다리고 다들 밥만 기다렸구나?”
신영석이 밀폐용기의 뚜껑을 열고 불잡탕조림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누나는 먹고 왔지?”
“아니거든? 냉큼 내 밥도 퍼라.”
식사 분위기는 굉장히 밝았다. 밥이 맛있기 때문이다.
신영석이 불잡탕조림과 밥을 작은 그릇에 조금씩 담아 비빈 후에 먹으면서 말했다.
“누나. 그 요리사 형이랑 친하게 지내. 그래야 자주 얻어먹지.”
“이미 친해.”
“오늘은 후식은 없나? 쫑파티 사진에서 본 과일 섞은 디저트가 참 맛있어 보였는데. 그거 그 형이 만든 거지?”
“맞아. 그거 진짜 맛있었지.”
“다음엔 그것도. 응?”
“꺼져.”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다음엔 그것도.”
“아빠까지 왜 이래?”
그녀의 어머니도 말했다.
“언제 집에 초대라도 해. 밥이라도 먹이게. 설마 빈손으로 오진 않겠지.”
“으응? 잠깐. 엄마가 만든 걸 차리게?”
“영석아. 은하 쫓아내라. 이게 어디서 밥투정이야!”
***
알레이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아파트까지 차를 몰고 와서 주차장 구석에 세웠다.
“이젠 정말 걷기도 힘들어. 나 좀 부축해봐.”
이연지는 알레이나가 넘어지지 않게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근데 언니는 팝가수가 체력이 왜 이렇게 약해요? 어디 아파요?”
“너도 태평양 건너봐. 장거리 비행은 원래 힘들어.”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구한 아파트는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가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거실 한복판에 벌렁 드러누웠다.
“난 더 못 움직여. 이불이라도 갖다 줘.”
이연지가 미리 사 놓은 이불을 거실에 깔아주었다. 그런 후에 그 위로 알레이나를 굴렸다.
“자. 자. 굴러가요. 굴러가. 됐다. 옷은 안 갈아입어요?”
“옷 하나도 안 가져왔어. 사야 돼.”
“지금 사러 갈 거예요?”
“아니. 나 이제 못 움직여.”
“그럼 알아서 벗고 자요. 난 가요. 집에 가서 숙제해야 돼요.”
알레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땡큐. 잘 가. 내일 밤에 영화 보러 가자.”
“땡땡이치는 거 성공하면요.”
***
알레이나는 장거리 여행의 여파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들었다가 이튿날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힘들어 죽겠다.”
일어나기는 싫은데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LA에서 출발할 때는 흥분해서, 비행기에서는 체력 보존을 위해 자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인천국제공항에 내린 후에는 바로 이곳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기절한 듯이 또 잤다.
결국, 하루가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만 옆으로 돌려보았다. 바로 옆에 낡은 추리닝이 있었다. 그 위에 메모지도 한 장 붙어 있었다.
[제가 입던 건데 일단 이거라도 입어요. 아침에 들렀는데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그냥 놓고 가요.]
“야. 나 알레이나 민이야. 내가 이런 낡은 싸구려 추리닝을 입을 것 같아? 나 명품 아니면 안 입어.”
그녀가 오른팔만 옆으로 뻗어서 손으로 추리닝을 잡았다.
“보들보들하긴 하네.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 옆에 포장된 팬티도 보였다. 거기도 쪽지가 붙어 있었다.
[뜯지도 않은 새것입니당.]
“속옷은… 갈아입을 게 없으니 일단 입을까?”
그녀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안 아픈 데가 없다.”
그녀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파트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냉장고도 없었다.
“빈집을 빌렸나 보다. 하긴. 갑자기 구했을 테니까.”
집안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녀가 어제 입고 온 옷을 찾아보았다.
“저런 추리닝을 입느니 그거라도 하루 더 입….”
그런데 옷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어젯밤에 옷을 던져놓은 거실 바닥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옷은 세탁하려고 가져가요.]
“응? 난 그럼 뭐 입으라고?”
바닥에 놓인 낡은 추리닝이 보였다.
배가 고팠다. 뭔가 먹으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원래 이런 거 입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화장품이 있을 리 없다.
알레이나는 떡진 머리는 모자를 써서 가리고, 맨얼굴은 마스크, 선글라스로 가렸다. 옷은 낡은 추리닝을 입었다. 그 위에 이연지가 공항에서 입혀준 점퍼를 걸쳤다.
“그래도 지갑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작은 핸드백 하나만 가져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여권과 지갑만 달랑 들어있었다.
그녀가 지갑만 들고 집을 나섰다.
일단 밖으로 나왔는데 멀리 가기는 귀찮았다. 아파트 근처를 조금 찾아봤더니 분식집이 보였다.
알레이나는 한국에 처음 오는 게 아니다. 공연 때문에 온 적도 있고 그냥 온 적도 있다. 그리고 원래 한국 음식을 잘 먹는다.
그녀가 분식집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때라 손님은 나강인 한 명밖에 없었다.
알레이나는 나강인을 모른다. 닥터 노네임의 정체는 비밀이라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선글라스만 벗었다.
“참치 김밥이랑 쫄면 주세요.”
음식은 금방 나왔다.
그녀가 마스크를 벗고 쫄면을 먹었다. 쫄깃한 게 맛있었지만 조금 매웠다. 얼른 김밥도 하나 먹었다. 그런 후에 서비스로 나온 어묵 국물을 마셨다.
“으아. 이 맛이지. 이게 한국의 맛이지.”
그녀가 본격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나강인은 일부러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여기는 그가 사는 아파트 앞 분식집이다. 그는 그냥 점심을 먹으러 들른 것뿐이다.
게다가 나강인도 알레이나의 얼굴은 모른다. 그녀가 얼마나 유명한 팝스타인지는 들었지만, 공연 영상이나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만약 문제가 생겨 수술이 취소되거나 수술을 했는데도 실패하면, 누군지 미리 알면 씁쓸할 것 같아서 개인적인 정보는 일부러 알아보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저 여자를 힐끗거리셨습니다.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십니까?
“한국말을 잘해서 그냥 본 거야.”
팝스타 알레이나는 나강인의 시선을 느끼고 걱정했다.
‘왜 힐끗거리지?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본 건가? 그러면 곤란한데….’
AI 전지인이 말했다.
- 상대편에서 요원님을 인지했습니다. 표정을 대놓고 찡그립니다. 몸을 아예 옆으로 돌렸습니다. 요원님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까칠한 아가씨네. 괜히 엮이지 않게 밥이나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