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동네 사람 II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는 나강인이 그녀를 알아본 건 아닌지 걱정했다.
‘괜히 분식집에 왔나? 그냥 편의점 도시락을 사다가 집에서 먹을 걸 그랬나?’
맛은 있는데 마음이 불안하니 천천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한국 본토 분식인데 이게 뭐야.’
그녀는 음식을 반쯤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나강인도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옆을 슬쩍 보았다.
‘지금 내가 일어나니까 기다렸던 것처럼 일어난 거지?’
그녀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갔다. 그런 후에 한국에 얻은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나강인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진짜 알아본 거야?’
그녀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체력은 훨씬 더 빨리 빠졌다.
그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아파트 정문을 통과했다. 그런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됐….’
나강인도 정문을 통과했다.
‘아파트까지 따라오잖아!’
그녀가 주변을 재빨리 보았다. 아파트 주민이 몇 명 보였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사람들이 있으니까 위험하진 않을 거야.’
그녀가 뒤로 돌아서서 나강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뭐죠?”
나강인이 도로 물었다.
“뭐가요?”
“왜 나를 따라오는 거죠?”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제정신이 아닙니다. 주의하십시오.
나강인이 대답했다.
“가던 길 가는 겁니다만?”
알레이나가 조금 가빴던 숨을 고르며 물었다.
“이봐요. 내가 누군지 알죠?”
“알아야 합니까?”
알레이나가 인상을 썼다.
‘이상한데? 내 팬이라면 이런 반응일 리가 없는데?’
팬이 아닌 사람이 그녀를 따라다닐 이유가 두 개나 생각났다.
‘기자? 아니야. 그러면 지금쯤 신분을 밝히고 인터뷰를 하자고 해야 해.’
그럼 남는 건 하나다.
‘내가 누군지 알아본 게 아니라면….’
팝스타 알레이나가 영어로 투덜댔다.
“예쁜 여자만 보면 집까지 졸졸 따라오는 무례한 놈이구나.”
그녀는 가수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도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무척 싫어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 뭐라고 말했는지 통역할까요?
“해.”
AI 전지인이 그녀가 말한 영어를 그대로 통역해주었다. 그냥 뜻만 통역한 게 아니라 어감까지 실감 나게 살렸다.
나강인이 그걸 듣고 한국말로 불평했다.
“와. 말을 너무 막 하는 아가씨인데? 그리고 하나도 안 예쁜데?”
그녀가 나강인을 다시 째려보았다.
문득 다른 경우가 하나 생각났다.
‘설마?’
그녀는 조금 겁이 나서 한국어나 영어로는 따지지 못하고 프랑스어로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면 나를 왜 따라왔지? 내가 쓰던 물건이라도 훔쳐서 팔아먹으려고?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나를 기다린 거 아냐?”
미국에서 그녀의 친구가 그런 되팔이 변태 스토커 때문에 다쳐서 배우를 그만둘 뻔했다. 그래서 알레이나도 스토커라면 학을 뗐다.
그 말도 AI 전지인이 그대로 통역했다.
프랑스어를 듣는 건 AI 전지인이 통역하면 되니까 간단하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말하는 건 가능하긴 해도 절차가 좀 복잡하다.
나강인이 그냥 한국어로 말했다.
“말은 바로 하자고. 분식집에서 내가 밥을 먹는데 네가 들어온 거잖아. 그럼 네가 나를 노리고 찾아온 거냐?”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국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그녀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프랑스계 미국인이라 프랑스어를 잘한다.
그녀가 나강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계속 프랑스어로 말했다.
“동네 백수인 줄 알았는데 프랑스어를 다 하네?”
“너는 동네 백수처럼 안 보이는 줄 아냐? 옷은 다 떨어져 가는 후줄근한 추리닝에 점퍼는 고딩이나 입을 것 같은 걸 입고 평일 낮에 돌아다니면서 말이야.”
“이 옷은….”
고등학생 이연지의 운동복과 점퍼다.
나강인이 한마디 더 했다.
“너 세수는 하고 다니냐?”
그녀는 머리도 안 감고 세수도 안 한 상태다.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따라오지 마.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녀가 1층 현관으로 뛰어갔다. 나강인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그녀가 닫힘 버튼을 부지런히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나강인이 타기도 전에 닫혔다.
나강인이 불평했다.
“와. 지인아. 저거 뭐냐?”
- 정신병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강인은 그냥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치? 제정신은 아니지? 저런 거랑은 엮이면 곤란해. 저게 탄 엘리베이터도 타지 말아야겠다.”
알레이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에 손으로 벽을 짚었다.
“하악. 하악. 괜히 뛰었네. 난 뛰면 안 되는데.”
그녀가 있는 곳은 엘리베이터를 한 층당 두 집씩 사용하는 계단식 아파트다. 그녀가 내린 곳에도 아파트 현관은 두 개만 보였다.
그녀가 벽에 손을 짚으며 집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후에 현관 도어락을 해제하려고 했다.
뒤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강인이 계단으로 올라와 철문을 열고 그곳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강인이 여기까지 쫓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
외과 과장 이정호에게 그의 아내인 간호사 손미연이 물었다.
“알레이나가 머물 집으로 아파트를 얻었다고?”
“부동산에 물어봤더니 병원에서 적당한 거리의 아파트가 공실로 비어 있더라. 월세도 된다고 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렸지.”
“그러다 거기 주민이 알레이나를 알아보면 어떻게 해?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알아봤어?”
이정호는 나강인의 집 주소를 모른다. 집으로 찾아간 적도 없고 물어본 적도 없다.
“내가 경찰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봐. 그리고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아파트니까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서로 잘 모르잖아. 알레이나가 외출할 땐 얼굴 가리고 조심해서 다니면 괜찮을 거야.”
“하긴. 그렇겠네.”
***
나강인이 저벅저벅 걸어가다가 그의 집 도어락에 손을 댔다. 삑삑거리는 소리와 띠리링 소리가 연달아 난 후에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그는 문을 연 후에 알레이나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쾅 소리가 나면서 닫혔다.
복도에 남은 알레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변태가 아니라, 진짜 옆집 사람이었어?”
조금 전에 밑에서 나강인에게 영어와 프랑스어로 따지듯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나 설마 미친년처럼 보이진 않았겠지?”
***
나강인이 집 안으로 들어간 후에 말했다.
“지인아. 큰일 났다. 옆집에 미친년이 이사 왔다.”
- 이 거점의 보안 레벨을 높여야 합니다.
나강인이 현관을 보았다. 감지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런 장치는 창문에도 달아놓았다.
만약 누군가 이 공간에 침입하면 그의 스마트폰으로 경고 문자가 날아온다.
가정용 웹캠도 설치해 실내 영상을 외부에서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그 카메라의 영상을 보려면 원래는 제작사 서버를 통해서 카메라와 연결해야 한다. AI 전지인이 카메라를 손봐서 그 절차를 건너뛰게 했다. 지금은 제작사 서버와의 연결은 완전히 끊겨 있어서 영상 유출 위험이 없다.
“저 미친년을 조심하려면 뭐라도 좀 더 달아야겠지?”
- 부비트랩 설치를 제안합니다.
***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이 홍보팀장에게 물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알레이나 민이요?”
“어. 한국에 들어온 거 맞아?”
“그게 좀 애매한데요.”
홍보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했다.
“일단 빅파이브가 다 알레이나 민을 찾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럼 들어온 게 맞나 보네?”
“그런데 그게 또 이상합니다. 알레이나 민이 누굽니까?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서 노는 탑스타잖습니까? 한국계라서 국내에선 더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같이 작업하고 싶은 거잖아.”
“그런 유명한 탑스타가 들어왔으면 흔적이 안 남을 수가 없습니다. 목격담이라도 인터넷에 올라와야 합니다.”
“그렇지.”
홍보팀장이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음….”
서재현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아직 미국에 있는지는 확인했어?”
“알레이나는 몇 달 전부터 공식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SNS에는 며칠 전에 LA에 있는 사진을 올렸습니다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 근황 사진은 그녀가 LA를 떠나기 직전에 일부러 올렸다. 굳이 그 사진을 올린 건 당분간 미국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아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다른 회사들은?”
“목격자가 착각했다고 판단하고 접은 곳도 있지만, 계속 찾는 곳도 있습니다. 알레이나와 같이 작업할 수만 있으면 대박이니까요.”
“그치. 국내에서는 빌보드 1위를 찍어본 외국 가수보다 알레이나가 상품성이 더 크지.”
“어떻게 할까요?”
서재현은 고민하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찾아봐. 혹시 모르잖아.”
“저는 일이 많아서 시간이 안 나는데요?”
“밑에 애들 시켜.”
***
그날 저녁때 이연지가 알레이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 언니. 미안. 땡땡이치다가 걸렸어요. 난 틀렸으니까 나를 버려요. 영화는 언니 혼자 봐요.
알레이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러면 네가 나를 버리는 거 아니니?”
그녀가 배를 만졌다.
“배도 고픈데.”
점심을 먹긴 했는데 서둘러 먹느라 김밥과 쫄면을 반씩밖에 먹지 못했다. 그것만 해도 한 끼 분량은 되지만 다시 배가 고팠다.
“난 오늘 별로 움직이지도 않아서 칼로리도 거의 소비하지 않았는데, 식욕은 진짜 왜 이러냐. 체력은 바닥인데 내가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녀는 원래는 이렇게 배가 빨리 꺼지는 체질은 아니었다. 그런데 현재 그녀는 소화흡수율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다.
예전의 그녀라면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 된 걸 굉장히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하나도 좋지 않았다.
이 증상은 병에 걸리고 나서 생겼다.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니다. 위험한 증상이다. 치료법을 찾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이미 두 번이나 수술에 성공했다고 했으니까, 나도 나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녀가 이불에서 일어나 이연지가 준 낡은 추리닝부터 입었다.
“밥 먹으러 가야지.”
그녀가 아파트 1층으로 나갔다.
아까 점심때 나강인이 그녀를 알아봤다고 착각했을 때는, 편의점 도시락이 아니라 분식집에 간 걸 후회했다. 그런데 이제 그게 오해라는 걸 안다.
그녀가 새로운 식당을 찾았다.
“한국에 왔으니까 저녁은 뼈해장국 먹어야지.”
그녀가 뼈해장국을 찾아 아파트를 벗어났다.
“서울에 감자탕집 없는 동네는 없으니까 이 근처에도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녀는 뛰는 건 어렵지만 걷는 건 괜찮다. 그녀가 아파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아. 저기 있다. 뼈해장….”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뭐야? 당신들 누구야?”
양복을 입은 마른 남자가 두 사람의 뒤에서 앞으로 나왔다.
“알레이나. 오랜만이야.”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브레드?”
“흐흐. LA에서는 그렇게 만나기 어려웠는데, 한국에서는 이렇게 쉽군.”
알레이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차를 타고 이곳으로 직행했다. 여기서 직접 접촉한 사람은 이연지와 나강인, 분식집 주인밖에 없다.
‘연지가 남에게 내 이야기를 했을 리 없어. 낮에 분식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브레드를 알 리가 없고.’
“내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브래드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알레이나.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찾을 수 있다.”
알레이나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등 뒤에 벽이 닿았다.
“브레드. 이러지 마. 이런다고 너랑 일할 리 없잖아.”
“하는 게 좋을 텐데? 그래야 내가….”
새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거기 뭡니까?”
브레드와 알레이나가 소리가 난 쪽을 동시에 보았다.
나강인이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일레이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옆집 사람?’
브레드가 인상을 쓰며 손을 바깥쪽으로 흔들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덩치 중 하나가 나강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Hey! Take a hike!”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새끼가 초면에 반말이야.”
- 영어입니다.
“영어로 반말하니까 더 기분 나쁘네.”
- 요원님답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한 거야?”
- 꺼지랍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덩치의 체격이 나강인보다 더 컸다. 덩치가 큼지막한 손을 내밀어 나강인의 어깨를 밀었다.
그 손이 어깨에 닿기 직전에 나강인이 잡아채 옆으로 확 꺾었다.
오른팔이 옆으로 꺾인 덩치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비명은 한국말로 지르네?”
- 저런 비명은 원래 만국공통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