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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하는 히어로-227화 (227/411)

227. 베테랑

나강인과 AI 전지인은 남이 만든 편의점 도시락을 직접 만든 밥보다 좋아한다. 다만 같은 구성의 도시락을 매일 먹으면 쉽게 질리기 때문에 자주 먹지는 않는다.

그는 신상품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TV를 켰다. 그는 TV를 보며 식사를 천천히 즐겼다.

“신상이 나올 때마다 맛이 조금씩 떨어지는 느낌이다.”

- 이 신상 도시락에는 보완해야 할 점이 여럿 보입니다.

“너도 입맛 많이 까다로워졌네. 처음에는 콜라 한 잔만 마셔도 그렇게 좋아하더니.”

- 경험이 쌓일수록 성장하는 AI니까요.

“그래. 많이 커라.”

그가 도시락을 반쯤 먹었을 때 현관 벨 소리가 났다. 나강인이 집안에 설치된 모니터를 확인했다.

알레이나가 쟁반을 들고 문앞에 서 있었다.

“앞으로 안 엮이려면 그릇은 돌려받아야지.”

나강인이 현관을 열며 말했다.

“설거지는….”

하나도 안 된 상태였다.

“그래. 아무것도 없는 너한테 퐁퐁이나 수세미라고 있겠냐. 주고 가라.”

알레이나가 갑자기 콧김을 뿜으며 외쳤다.

“너 내 요리사가 돼라!”

“그런 소리 한 사람이 전에도 있었는데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오메가테크 사장 스칼렛 켈리가 예전에 비슷한 제안을 했다.

“어떻게 됐는데?”

“받아들였으면 내가 지금 여기 있겠냐?”

팝스타 알레이나가 물었다.

“월급이 적었어? 얼마면 돼? 얼마든지 불러봐.”

나강인이 알레이나의 낡은 운동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됐다.”

“불러보라니까!”

나강인이 쟁반을 잡았다.

“그릇이나 내놔.”

알레이나가 빈 냄비가 담긴 쟁반을 넘겨주었다. 나강인이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이 천천히 닫혔다.

갑자기 알레이나가 닫히는 현관을 붙잡았다.

“잠깐!”

나강인이 말했다.

“개인 요리사는 안 한다고 했을 텐데?”

“저기, 그게 아니라, 치약하고 칫솔…. 내가 입이 답답해서 그래.”

“넌 진짜 있는 게 뭐냐?”

“수건도….”

나강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옆집에 땅거지가 이사 왔구나.”

***

고룡 엔터테인먼트는 중견 기획사다. 회사의 주력은 가수이지만 배우 지원팀도 조그맣게 있다.

고룡 엔터의 회의 도중에 알레이나 이야기가 나왔다.

사장 박지훈이 말했다.

“알레이나와 손만 잡으면 우리 회사의 미국 진출이 쉬워지겠지. 근데 국내에 있는 건 확실해?”

회의에 참석한 직원이 대답했다.

“제가 좀 알아봤는데요. 빅파이브 다섯 곳 모두 알레이나를 찾았는데 흔적조차 없답니다.”

다른 직원도 질세라 한마디 했다.

“그런 팝스타가 돌아다니면 인터넷에 목격담이 올라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박지훈이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잘못 본 거 아냐? 비슷하게 생긴 외국 여자를 보고 착각한 거 아니냐고.”

“목격자는 알레이나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만, 사진이 없어서….”

“흐음. 그냥 출입국 관리소 같은 데 못 물어보나?”

“저희는 경찰이 아니니까 합법적으로는 어려운데,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좀 캐볼까요?”

박지훈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겠다는 말을 회의 도중에 하면 어쩌란 거야? 지금 한두 명 듣나? 그런 건 몰래 쓱 해야지.’

사장 박지훈이 손을 흔들면서 짜증을 냈다.

“아냐. 됐어. 그런 거 하지 마. 잘못 봤겠지.”

***

알레이나가 이연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 올 때 스마트폰 하나만 사와.

- ㅋㅋ. 스마트폰이 메로나인 줄. 근데 고등학생이 스마트폰 개통하러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저는 공부해야죠.

- 용돈 줄게.

- 중고폰 하나 남는 거 있는데 쓸래요? 번호도 살아있어요. 원가에 넘길게요.

- ㅇㅇ

이연지가 그날 밤에 알레이나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여기요. 중고폰이지만 아직 쓸만해요.”

“네가 쓰던 거야?”

“아뇨. 아빠 거예요. 이제 필요 없대요.”

알레이나는 이 스마트폰이 왜 이정호에게 있었는지 눈치챘다.

‘연지를 치료할 때 일이 잘못되면 쓰려고 비상용 휴대폰을 준비했구나. 어? 그럼 이거 혹시 대포폰 아냐?’

다른 것도 새삼 깨달았다.

‘얘는 내가 한국에 그냥 쉬러 온 건 줄 안다더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왜 이연지가 그 수술의 비밀을 몰라야 하는지는 안다.

‘아무것도 몰라야 일이 잘못됐을 때 얘 하나는 확실히 빼낼 수 있겠지.’

이연지가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값 주세요. 원가에 드릴게요.”

알레이나가 가방을 열었다. 지폐가 조금 들어있었다. 그녀가 그걸 다 꺼냈다.

“옛다. 현금이 이거밖에 없으니까 이걸로 퉁 치자.”

“이러면 제가 손해 보는 건데, 제가 언니 팬이니까 조공하는 마음으로…. 엥? 이거 달러잖아요.”

“공항에서 어땠는지 봤잖아. 환전을 못 했어.”

“알았어요. 제가 한국 돈으로 바꿔서 쓸게요.”

그녀가 달러를 챙겨 넣는 이연지의 손을 보았다.

“그런데 스마트폰만 가져왔어?”

“넹.”

“네가 세탁한다고 가져간 내 옷은?”

“세탁소에 맡겼어요.”

“그럼 나는 뭐 입어?”

“네? 새로 사면 되잖아요.”

“응?”

이연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누가 알아볼까 봐 그러는구나? 괜찮아요. 우리나라에 외국사람 흔해요. 그리고 옷 살 때 선글라스랑 마스크 쓰고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해요. 돈만 내면요.”

“하긴. 그렇겠지? 알았어.”

“저 그럼 집에 가요.”

“어? 우리 영화 보기로 했잖아. 심야영화라도 보러 가는 거 아냐?”

이연지가 서둘렀다.

“영화를 저녁때 보러 가려고 땡땡이치다가 쌤한테 잡혀서 망했어요. 지금 보러 가면 영화가 자정 넘어서 끝날 텐데, 그럼 내일 학교 갈 때 졸려서 안 돼요.”

“너 성실하구나?”

이연지가 배시시 웃었다.

“착하고 성실하단 말 자주 들어요.”

“알았어. 다음에 보면 되지. 가라.”

알레이나는 스마트폰으로 배달앱부터 찾았다.

그런데 막상 배달앱을 설치하려고 하니까 찜찜했다.

“가만…. 이게 대포폰이면, 배달앱을 설치하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녀는 외과 과장 이정호의 휴대폰 번호는 알고 있지만 전화를 직접 건 적은 없다. 일이 더 진행될 때까지는 직접적인 연락은 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로버트 민에게 메시지를 보내 스마트폰에 관해 물어봐 달라고 했다. 잠시 후에 답장이 돌아왔다.

- 대포폰 맞다더라. 중고폰을 줘서 미안한데 상황이 이러니까 그냥 쓰라더라.

“응? 줬다고? 판 게 아니라? 그럼 이거 원래 나한테 공짜로 주는 거였어?”

이연지는 방금 스마트폰값으로 그녀가 가진 현금 300달러를 다 털어갔다.

“아놔. 이런 깜찍한 고딩을 봤나. 뭐가 착하고 성실해? 뭐가 팬이 하는 조공이야? 그래서 영화도 안 보고 서둘러 갔구나? 고딩이라서 개통할 시간 없다는 것도 다 밑밥을 깐 거였어. 서울에 오면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더니, 코 베는 실력이 아주 소드 마스터야.”

***

알레이나는 이튿날도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체력이 떨어질수록 잠도 늘어났다. 이젠 점심때까지 자야 체력이 회복됐다.

그녀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아. 샴푸도 없고 비누도 없고 수건…만 있으니까, 머리는 안 감아야지.”

게다가 배도 고팠다.

어제 현금은 다 털렸지만 신용카드가 살아있으니 돈은 쓸 수 있다. 현금도 필요하면 ATM에서 뽑으면 된다.

그녀가 하나뿐인 추리닝을 입었다.

“옷도 사야 하는데, 백화점은 가기 부담스럽다.”

그녀가 밥이라도 먹으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나강인도 집에서 나왔다. 그러다 밖으로 나온 알레이나와 딱 마주쳤다.

나강인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AI 전지인이 즉시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 이틀은 씻지 않은 꼴입니다. 머리도 감지 않았습니다. 칫솔을 빌려서 이만 닦았나 봅니다. 옷은 어제 추리닝 그대로입니다.

알레이나는 선글라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 눈이 부어 있습니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분석 결과는?”

- 베테랑 백수로 추정됩니다. 요원님이 초보 백수일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나강인이 처음 이 동네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운동복 한 벌을 입고 피시방에서 살았다. 그때 인연으로 아직도 그 피시방에 자주 가서 밥도 팔고 인터넷도 하면서 지낸다.

오늘도 간만에 피시방에 가려고 집을 나왔다.

알레이나가 나강인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앗! 밥이다!”

“밥 아니다.”

“밥 먹었어?”

“아니.”

“어디 가?”

“잠깐 일하러?”

알레이나는 나강인이 요리사라고 확신했다.

“흐응. 요리하러 가는구나?”

“그렇긴 하지?”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대부분의 한국 식당은 신용카드를 받는다.

“가자. 나도 밥 먹어야 해.”

나강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 대놓고 친한 척은?”

- 평범한 백수가 아닙니다. 요원님을 뜯어먹을지도 모릅니다. 주의하십시오.

나강인은 밖으로 나가 길을 걸었다. 알레이나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로 그를 따라갔다.

“흐흐흥.”

콧노래만 부르는데도 듣기 좋게 잘 불렀다.

“어디서 일해? 무슨 레스토랑이야? 아니면 한정식이야? 왜 마트에 들어가?”

“식재료를 사야 해서.”

알레이나가 따라 들어갔다. 나강인이 물었다.

“계속 따라올 거냐?”

“응. 어제 그런 일도 있고 그래서 혼자는 좀 무섭단 말이야.”

어제 외국 남자가 덩치 둘을 데리고 와서 알레이나를 압박하다가 쫓겨났다.

나강인은 마트에서 재료를 적당히 산 후에 나왔다. 알레이나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는 피시방에 도착해 문을 가리켰다.

“다 왔다.”

알레이나는 당황했다.

“응? 여기는 식당이 아니라 피시방이잖아.”

“난 여기서 가끔 밥을 팔아.”

“아니, 그 실력으로 왜?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요리사 업계에서 매장된 거야? 내가 나중에 공개적으로 한마디 해줘?”

“먹기 싫으면 그냥 가든가.”

“그건 아니고!”

나강인이 피시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낮에는 사장 조카 차은서가 일한다. 그녀가 나강인을 보자마자 반가워했다.

“앗! 오늘 혹시 점심 파는 날인가요?”

“어. 한동안 뜸해서 잠깐 팔고 가려고.”

“공지 띄울게요. 언니들한테도 연락해야겠다.”

차은서는 신은하과 이보라의 동네 아는 동생이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톡을 보냈다.

신은하가 불평하는 톡이 바로 날아왔다.

- 며칠 뒤에 피시방에 온다더니 그게 오늘이었어? 나 오늘 영화 홍보 때문에 방송국에 왔는데 왜 하필 오늘 파냐고 여쭈어라.

같이 출연하는 이보라는 매수를 시도했다.

- 은서야. 내 거만 따로 챙겨서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알라뷰. 방송국 스케줄 끝나면 가서 케이크 사줄게.

알레이나는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 그녀는 선불 기계에서 이용권을 구입한 후에 구석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밥을 먹으면 사람들에게 얼굴이 보일 걱정을 안 해도 되네?’

어제 점심때는 분식집에서 먹다가 나강인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그녀가 앉은 자리는 피시방 구석이다. 여기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밥 먹는 그녀를 볼 수 없다.

‘게다가 여기선 인터넷도 할 수 있잖아. 여기 정말 딱 좋네.’

그녀가 보는 모니터에 갑자기 공지가 떴다.

[특별요리 판매 공지합니다. 오늘의 메뉴는 ‘전가복 스타일 잡탕밥’입니다. 전복이나 해삼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졌다.

“예에!”

“오늘 어쩐지 여기 오고 싶더라!”

그녀가 얼른 음식 주문창을 확인했다. ‘특별요리’ 항목이 보였다.

나강인의 음식 솜씨는 어제 얻어먹어봐서 안다.

‘이건 먹어줘야지!’

그녀가 얼른 특별요리를 주문했다.

야전전술요리는 대용량으로 빠르게 조리하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차은서가 카트에 요리가 담긴 그릇을 잔뜩 싣고 다니면서 하나씩 배달했다.

알레이나의 자리에도 한 그릇이 놓였다. 그녀가 먼저 음식의 겉모습을 품평했다.

“보기에는 플레이팅에 신경 쓰지 않은 그냥 덮밥인데 말이야.”

어제 얻어먹은 불잡탕조림도 그냥 조림처럼 보이긴 했다.

그녀가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음!”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음식이 입안에서 살살 녹다가 사라졌다.

“맛있어! 맛있을 줄 알았다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역시 이 맛이지!”

“오랜만에 먹으니까 더 맛있는데?”

알레이나가 그녀 몫의 밥을 부지런히 먹었다. 그릇은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났다.

“아. 맛있다.”

다 좋은데 양이 차지 않았다. 더 먹고 싶었다. 그런데 특별요리 메뉴에 매진 표시가 떠 있었다.

“뭐야?”

그녀가 마스크를 쓰고 카운터로 찾아갔다.

“왜 벌써 매진이에요?”

차은서가 대답했다.

“오늘은 한 번만 돌리고 끝내신대요. 지금 손님 중에 주문 안 한 분은 없어요.”

알레이나는 나름대로 이해했다.

“하긴.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쉽게 만들 수는 없겠죠.”

“어…. 글쎄요?”

그녀가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배가 부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연비가 더 나빠졌나 봐. 뭐라도 더 시켜야겠어.”

그녀는 떡볶이를 시켜서 하나씩 찍어 먹고 콜라도 마셨다.

그러면서 인터넷으로 이연지가 말한 영화 ‘운명의 창’을 찾아보았다.

“감독이 신인인데… 손태민 제자네? 그럼 기본은 하겠어. 남자 주연은 김유찬이니까 딱 좋은데 여자 주연이 좀 약하다. 이거 영화 내가 했으면 진짜 잘했을 텐데…. 아니다. 조선 시대에 내가 나오면 이상하겠다.”

구석에 앉아서 맛있는 걸 먹으면서 인터넷도 하고 노니까 몸이 참 편했다.

팝스타 알레이나가 떡볶이를 먹으며 결정했다.

“수술받는 날까지 이 피시방을 내 아지트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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