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거래
나강인은 야전 전술 요리를 만들어 피시방에 돌린 후에 구석에 있는 그의 전용석에 앉았다.
정작 그의 앞에 놓인 건 조금 전에 직접 만든 잡탕밥이 아니라 차은서가 볶아준 김치볶음밥이다. 볶음밥 위에 계란프라이 하나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딱 좋다. 은서가 신경 써서 부쳤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지금 계란프라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옆집 광년이가 근처에 있습니다.
나강인와 알레이나는 지금 같은 피시방에 있다. 거리도 가까웠다.
그런데 그들이 자리에 앉으면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나강인이 숟가락을 노른자에 대며 말했다.
“됐어. 알아서 놀다 가겠지.”
***
나강인은 피시방에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수집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강인과 알레이나는 앉아있을 때는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한 명이 일어나면 움직임이 눈에 슬쩍 들어온다.
나강인이 나가는 걸 본 알레이나가 얼른 따라붙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후에 나강인이 물었다.
“너 지금 나 따라오는 거냐?”
“아니. 집에 가는 건데?”
그녀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집에 가는 거 맞지? 어제 저녁때 그 일도 있고 해서, 혼자 집에 가면 무서우니까….”
“경찰에 신고는 했냐?”
“신고할 일은 또 아니야.”
“앞뒤가 안 맞는 건 알지? 신고할 일은 아닌데, 혼자 가기 무섭다는 거 말이야.”
“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나강인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사정? 빚쟁이에게 쫓기던 거였나?’
“뭐, 알았다. 내 일도 아니고.”
나강인이 집으로 걸어갔다. 알레이나가 따라가며 물었다.
“그런데 직업이 뭐야? 요리사가 무슨 싸움을 그렇게 잘해? 소림사 주방 출신이야?”
AI 전지인이 말했다.
- 지구연합 전략특수군 최고의 요원입니다.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내가 최고의 요원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네 메모리에는 그런 기록이 없잖아.”
- 제가 같이 있잖습니까?
“어…. 그래서구나.”
나강인이 알레이나에게 말했다.
“원래 잘해.”
“내가 새로 이사 와서 이 동네를 잘 몰라. 그래서 그런데….”
- 음성을 분석했습니다. 동네 안내를 요구하려는 겁니다. 단호하게 거절하십시오.
“옷 좀 사야 하는데 옷가게 좀 알려달라고.”
- 아니군요.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지인아. 너 요즘 분석 적중률이 좀 그렇다?”
- 역시 옆집 광년이는 종잡을 수 없습니다.
나강인이 알레이나를 보았다. 얼굴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가린 상태였다. 그런데 운동복이 낡았다.
“너한테 딱 어울리는 가게가 있다. 따라와라.”
나강인이 길을 조금 돌아갔다. 그곳에는 떨이로 옷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기는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도 떨이로 팔더니 아직도 그대로네.”
- 저 가게는 일 년 내내 떨이로 팔 기세입니다.
심지어 그때 나강인이 샀던 상하 한 세트 만 원짜리 운동복도 그 가격 그대로 계속 팔았다.
그가 그 옷을 가리켰다.
“저 추리닝 사라. 만 원이야.”
알레이나가 그 옷을 보고 불평했다.
“내가 저런 옷 입을 사람인 줄 알아?”
“어. 너 지금 저런 옷 입고 있어.”
“그야 그치만!”
“게다가 저건 새 옷이야. 지금 네가 입은 낡은 것보다 두 배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알레이나가 진열된 옷을 다시 보았다. 남녀용이 따로 있었다.
‘가만. 옷을 잘 입고 다녀서 눈에 뜨이는 것보다는 저게 낫겠는데?’
게다가 이연지가 준 운동복은 입어보니 나름 편했다.
“음. 그렇게 권하니까 일단 한 번 입어는 보겠….”
가게 한쪽에 카드단말기가 고장 나서 현금만 받는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그녀가 뒤늦게 그걸 발견했다.
“나 한국 돈은 없는데.”
한국 돈만 없는 게 아니다. 달러는 어젯밤에 이연지가 모두 털어갔다.
그녀가 나강인을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 수상한 눈빛은 뭐냐?”
“만 원만.”
“이보세요. 옆집 아가씨.”
“으응?”
“꺼지세요.”
알레이나는 결국 만 원을 빌려 그 옷을 샀다.
나강인이 집으로 가면서 말했다.
“돈 꼭 갚아라.”
“현금 찾으면 바로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지.”
나강인은 아파트에 도착한 후에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알레이나가 물었다.
“뭐야? 집에 안 가?”
“밥도 먹었으니까 이제 일하러 가야지.”
알레이나가 항의했다.
“그럼 오늘 내 저녁밥은? 오늘도 만들다 남으면 나눠주는 거 아녔어?”
“진짜 옆집에 땅거지가 이사 왔네. 꺼지라고.”
***
중견 기획사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은 미국 진출을 원한다.
“미국에서 제대로 터트리면 국내 빅파이브 중 하나를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말이야.”
음악 시장은 미국이 훨씬 더 컸다. 게다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면 음악을 미국에만 파는 게 아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팔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시장은 당연히 경쟁자도 많다.
“우리 애들이 그 수많은 경쟁자를 이기려면 미국 연예계에 연줄이 있어야 해.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연줄이 있는 쪽이 당연히 훨씬 유리하니까.”
고룡 엔터는 그 연줄이 없다. 지금 상황에서 미국에 진출하면 제대로 된 무대를 잡기 힘들다.
고룡 엔터에는 미국 맨땅에 헤딩해서 성공할 정도로 실력과 상품성이 모두 뛰어난 가수도 없다.
돈을 쏟아부으면 좋은 곡이든 무대든 다 손에 넣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룡 엔터는 미국에서 통할 정도로 부자가 아니다.
“우리 회사가 미국 시장을 뚫으려면 연줄을 만드는 수밖에 없어.”
그는 고급 술집의 별실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별실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브레드가 들어왔다.
박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웃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밀러.”
“박지훈 사장님?”
“하하. 듣던 대로 한국말을 잘하십니다. 박지훈입니다.”
브레드의 한국어는 발음이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의사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브레드가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 직원들이 밖에 있는데, 저렇게 세워둡니까?”
그의 뒤에는 덩치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손목에 반깁스를 했다. 다른 덩치도 멍든 자국이 보였다.
박지훈이 웃으며 벽을 가리켰다.
“옆방을 빌려놨습니다. 저희 직원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그곳에서 식사하면 됩니다.”
브레드가 직원들에게 옆방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브레드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일단 뭐 좀 먹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사람은 배가 불러야 여유가 생기니까.”
그건 박지훈도 바라던 바다.
곧바로 음식과 술이 들어왔다.
“이 집은 회가 참 맛있습니다. 회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 술은 일 년에 딱 천 병만 생산되는 한국 전통주입니다.”
“좋군요.”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참을성도 줄여준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마음이 급한 박지훈이 먼저 일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제안이 있으시다고….”
브레드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몇 번 연락하셨더군요.”
“예! 저희 회사 아티스트들이 노래를 참 잘합니다. 상품성도 좋고요. 기회만 주시면 미국에 진출해서 좋은 성과를 보일 겁니다. 그럼 윈윈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박지훈은 전부터 브레드 밀러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제안서도 몇 번 보냈다. 브레드에게만 보낸 게 아니라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잘나가는 몇 사람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오늘 브레드 밀러가 갑자기 연락해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박지훈은 오늘 미팅에 기대가 컸다.
‘내가 전에 한 제안이 마음에 들었나?’
브레드가 손가락을 세워서 박지훈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윈윈도 여러 방식이 있죠. 서로 상대를 도와주고, 서로 원하는 걸 얻자. 그게 제가 원하는 윈윈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가 박 사장님을 어떻게 도울지부터 말하죠. 소속 가수 또는 아이돌팀에게 미국 대형 무대에 설 기회를 주겠습니다.”
박지훈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럼 어떤 무대에….”
“알레이나 민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게 해드리죠. 그것도 휴식기를 끝내고 복귀하는 첫 공연에 말이죠.”
박지훈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지, 진짜입니까!”
팝스타 알레이나 민의 복귀 무대는 화려하게 치러질 게 뻔하다. 그런 무대에 게스트로 참여하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일단 미국 시장에서 알레이나 민의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효과가 있다. 소속 가수나 팀에게 미국 대형 무대에 서는 경험도 줄 수 있다.
거기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미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 반응이 안 좋아도 얻는 건 있다.
알레이나 민은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녀의 미국 복귀 공연에 소속 가수가 참여했다는 걸 적극적으로 홍보하면, 국내에서 체급을 높일 수 있다.
박지훈이 활짝 웃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최고죠. 하하하!”
브레드가 이번에는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박 사장님도 저한테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만.”
“뭘 드리면 됩니까?”
“알레이나를 만나는 걸 도와줘야 합니다.”
박지훈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였다.
“그게 무슨….”
“알레이나가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런데 만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레이나를 만나야 계약을 하지요.”
박지훈은 당황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알레이나의 공연에 우리 가수를 참여시킨다는 건….”
“제가 먼저 알레이나와 계약한 후에 그러겠다는 겁니다.”
박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미 술이 좀 들어가서 참을성은 좀 줄어들었다. 잔뜩 기대하고 나왔다가 엉뚱한 소리를 들어서 화도 좀 났다.
박지훈이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겁니까! 그럴 거면 그냥 내가 알레이나랑 계약하지!”
“계약할 방법은 있으시고?”
“예? 어, 그건….”
고룡 엔터가 중견 기획사이긴 하지만 빅파이브보다는 규모가 작다. 그런데 빅파이브도 알레이나와 단독으로 계약하진 못했다.
당장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브레드가 추가로 물었다.
“지금 알레이나가 어디 있는지는 아시고?”
박지훈이 움츠러들었다.
“모, 모르죠. 그럼 브레드는 계약할 방법이 있습니까?”
“나야 알레이나와 인연이 깊으니까 환경만 조성되면 계약하는 건 일도 아니지요.”
박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저한테 알레이나가 어디 있는지 찾아달라고 하는 겁니까? 사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압니다.”
“예? 그럼 저한테 도대체 뭘 해달라는 겁니까?”
브레드가 인상을 썼다.
“알레이나의 옆에 이상한 놈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고용한 놈 같은데, 싸움 실력이 대단합니다. 그놈 때문에 알레이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브레드는 덩치 두 명을 데리고 알레이나를 찾아가 압박하다가 나강인에게 걸려서 쫓겨났다.
브레드가 조건을 제시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고룡 엔터의 옛날 소문을 좀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박 사장님이 그놈을 치워주시죠.”
박지훈이 눈알을 굴렸다.
“그거면 됩니까?”
“그놈 싸움 실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박지훈은 브레드의 부하 중 한 명이 손목에 반깁스를 하고 있던 걸 떠올렸다.
‘그 덩치들도 당했구나.’
그렇다고 걱정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박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저에 대해 무슨 소문을 듣고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놈 정도는 제가 치워드리죠. 대신에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브레드가 씩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이 일은 박 사장님과 나 둘 다 좋은 일이 될 겁니다.”
***
나강인은 그날 밤에 집 앞에서 알레이나와 또 마주쳤다. 알레이나는 낮에 새로 산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며 만 원짜리 옷을 자랑했다.
“어때?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까 뭘 걸쳐도 어울리지?”
나강인이 물었다.
“너 혹시 나 기다린 거냐?”
“뭐래?”
알레이나가 편의점 봉투를 들어서 흔들었다.
“밥 사러 간 거야.”
“그게 오늘 저녁밥이냐?”
“아니. 야식. 왜? 맛있는 거라도 만들어주게?”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난 밥 먹고 왔다. 만들겠냐?”
“쳇.”
나강인이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이제 혼자서도 잘 돌아다니네? 어제 그놈은?”
“또 귀찮게 하면 특단의 조처를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안 왔어. 어제 혼나서 포기했나 봐.”
“어제는 왜 찾아온 거였는데?”
알레이나는 나강인이 닥터 노네임이라는 걸 모른다. 그녀가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어디에 사인 좀 하라는 거였어.”
나강인은 알레이나가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체 포기 각서? 그런 거 사인해봤자 법적 효력은 없지만 그래도 쓰면 안 되지.”
“뭐래. 내가 그런 걸 왜 쓰는데?”
“아니냐?”
“당연히 아니지. 내가 내 몸을 왜 포기해? 난 절대로 포기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