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조사
나강인이 걸어오는 알레이나를 보며 말했다.
“저건 아까는 기분이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은 왜 화를 내냐? 성격 참 종잡을 수 없다.”
- 역시 광년이답습니다.
음반을 냈다 하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서 노는 팝스타 알레이나가 나강인의 앞에 서서 그의 몸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역시 옆집 남자를 습격했다는 건 사기꾼 브레드의 거짓말이었어. 긁힌 자국 하나 없잖아.’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상대가 요원님의 신체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간을 조심하십시오. 꼬리가 몇 개 달려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옆집 광년이의 식별코드를 옆집 여우로 변경합니다.
알레이나가 나강인의 몸을 확인한 후에 방긋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와?”
- 화내다가 웃는 걸 보면 신체 어딘가에 털이 났을 겁니다.
나강인이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피시방에 같이 있었잖아.”
그녀는 나강인이 피시방을 나가기 조금 전에 그곳을 나왔다. 나강인이 그녀를 따라오는 구도로 만들 속셈이었다. 이번에는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려줄 생각도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내가 거기서 나가는 거 봤구나?”
“봤지. 서둘러 가더라.”
알레이나가 말을 돌렸다.
“밥은 안 먹나?”
“저녁밥 먹고 나오는 거 봤을 텐데?”
- 전투 후에는 잘 먹는 게 좋습니다. 더 드십시오.
알레이나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야식은? 그 좋은 요리 실력으로 직접 만들어 먹나?”
“배달시켜 먹을 거다.”
팝스타 알레이나가 손뼉을 쳤다.
“앗! 내가 배달 앱이 없어서 그러는데, 야식 배달시킬 거면 2인분 시켜서 나누자!”
“돈은 반씩 내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내가 지금 현금이 없는데….”
그녀가 달러로 갖고 있던 현금은 여고생 이연지가 탈탈 털어갔다.
“언제는 있었냐? 뭐 먹고 싶은데?”
알레이나가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흐흐. 보족 세트.”
“보쌈하고 족발이 어떻게 2인분이냐? 그거 양 제법 많다.”
“나 보족 세트 좋아하는데, 먹어본 지 오래돼서….”
예전에 한국에서 먹어본 그 맛 그대로 파는 식당은 그녀의 미국 집 근처에는 없었다. 집에서 거리가 좀 먼 곳에 있는 식당에서 비슷한 맛을 내긴 하는데, 지난 몇 달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 그 식당에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이 나강인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어…. 먹고 싶은데 못 먹었구나.”
AI 전지인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 옆집 광년이의 재정상태는 요원님보다도 나빠 보입니다. 혼자서 보족 세트를 사는 건 무리일 겁니다.
“반값 꼭 갚아라.”
알레이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돈만 찾으면 싹 다 갚을 테니까!”
“너 그 추리닝 살 때도 그렇게 말했다.”
***
강남 룸살롱 사장 조정철이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을 따로 만났다.
박지훈은 방문을 닫자마자 화를 벌컥 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겨우 한 놈 처리하는 건데 왜 실패해! 조 사장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 어?”
조정철도 일어나면서 탁자를 내리쳤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따지는 거야! 난 여섯이나 동원했어! 행동대 여섯이 한 놈에게 당했다고! 그렇게 강한 놈이면 말을 해줬어야지!”
“강한 놈이라고 했잖아!”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곰을 상대로 싸워도 연장을 든 여섯 명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아!”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박지훈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젠장. 이러면 나가린데….”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양주를 잔에 벌컥벌컥 따라서 단번에 마셨다. 독한 술이 식도를 뜨겁게 자극하며 내려갔다.
잔을 완전히 비운 그가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조 사장이 오늘 동원한 놈들 말이야. 체포돼도 뒤탈은 없겠지?”
조정철이 장담했다.
“내가 장사 한두 번 해본 사람인 거 같아? 뒤탈은 절대로 없어.”
“확실해?”
조정철이 술이 반쯤 남아있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이 바닥에는 말이야. 청부업자라는 게 있어.”
“살인청부업자?”
“살인까지는 아니고, 폭행 전문 청부업자가 있어. 팀으로 활동하니까 혼자서는 절대 못 막지.”
“그런데?”
“뭘 그런데야? 그놈들을 고용했다고.”
“그러니까 네 룸살롱 부하가 아니라 청부업자를 썼다?”
“그렇지. 돈은 퀵서비스로 보내고, 전화할 때는 대포폰을 썼어.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 드러나진 않아.”
박지훈이 짜증을 냈다.
“뒤탈만 없으면 다냐? 어쨌든 약해빠진 놈들을 썼잖아.”
“전에도 써본 놈들이다. 실력은 확실해. 그러니까 타깃이 규격을 벗어난 놈이란 정보는 네가 알아냈어야지!”
“젠장.”
박지훈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후우. 클라이언트한테는 뭐라고 하지?”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은 미국 진출을 원한다.
강남 룸살롱 사장 조정철도 이 거래로 원하는 게 있다. 그게 돈이면 이쯤에서 포기하겠지만, 드라마 배역에 사람을 꽂는 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박지훈처럼 연예기획사를 차리고 싶었다.
‘박 사장이 연예계에서 성공했는데 나라고 못 할 건 뭐야.’
강남 룸살롱 사장 조정철이 제안했다.
“그놈 말이야. 한 번쯤은 더 쳐도 박 사장이나 내가 노출되진 않아. 비싸서 그렇지 실력은 확실한 청부업자를 알거든. 그러니까 다시 해보자. 다음에는 꼭 그놈을 잡을 테니까.”
박지훈도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클라이언트랑 다시 이야기해보고.”
조정철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곧 그 드라마 오디션이 있지 않아?”
KMTV 방송국의 신작 드라마에 조정철이 원하는 사람을 꽂아주는 게 이 청부의 대가다.
“있긴 있지. 하지만 조 사장은 아직 그놈을 못 치웠잖아.”
“박 사장. 지난번에는 내가 먼저 그놈을 처리해주면 내 배우를 꽂아주는 조건이었지. 그런데 오디션이 코앞이면 상황이 바뀐 거잖아. 이젠 내 배우를 먼저 꽂아줘야겠는데?”
“그건 조건이….”
“나도 박 사장 믿고 먼저 일을 했잖아? 실패하긴 했지만 나도 손해가 커. 이제 박 사장이 양보 좀 하지?”
“끄응. 알았다. 대신 약속은 꼭 지켜라.”
“흐흐흐. 나도 기획사를 차릴 건데 박 사장하고 원수질 일 있어? 그놈은 내가 최고의 청부업자를 고용해서 꼭 처리할 테니까, 나만 믿으라고.”
***
나강인이 경찰서로 찾아갔다.
그는 형사 박기정에게 청부업자 조직이 습격했을 때 어떻게 그놈들을 잡았는지 설명했다.
박기정이 말했다.
“사실 다른 건 녹음 파일과 그놈들의 자백을 통해서 거의 다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모르겠습니다. 놈들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주변 사물을 이용한 야전 은폐 기술을 잘 써서요.”
“그러니까 특수부대가 적에게 접근할 때 쓰는 것 같은 기술 말입니까?”
“그렇죠.”
“어…. 그냥 잘 숨어서 이동했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진술이 끝난 후에 박기정의 후배 형사가 나강인에게 다가왔다.
“저기….”
“하실 말씀이라도?”
“혹시 시간 되시면 제 초상화 좀….”
“예?”
“기념으로 갖고 있으려고요.”
“아, 예. 뭐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AI 전지인은 정찰 임무 도중에 눈으로 본 것을 나중에 손으로 그대로 그리는 스킬을 갖고 있다. 예전에 그 스킬로 방화살인범의 몽타주를 그려주었다.
나강인이 종이를 한 장 받아 볼펜으로 그 형사의 얼굴을 쓱쓱 그렸다. 몇 분 만에 사진 같은 초상화가 나왔다.
“이야아. 저번에 오셨을 때도 이걸 봤는데, 실력이 진짜 엄청나십니다. 혹시 전시회도 하십니까?”
“그냥 취미로 그리는 거라서요.”
“취미 수준이 아니신데요.”
그는 다른 형사들의 초상화를 몇 장 더 그린 후에 박기정을 휴게실에서 따로 만났다.
박기정이 캔 음료를 하나 뽑아 나강인에게 주며 조금 전에는 말하지 않은 걸 설명했다.
“여섯 놈 중 하나가 먼저 불었습니다. 한 놈이 입을 여니까 다른 놈들도 술술 털어놓던데요. 그놈들은 폭행 전문 청부업자 조직입니다. 그 여섯 외에도 길을 막거나 망을 보는 놈이 둘 더 있더군요.”
“그놈들도 잡으셨고요?”
박기정이 씩 웃었다.
“현장에서는 튀었어도 인적사항은 다 파악했습니다. 이제 잡으러 가야죠.”
AI 전지인이 현장 상황을 재현한 홀로그램을 허공에 띄웠다. 나강인이 근처에 서 있던 승용차를 보았다. 그 승용차 위에 정찰 차량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나강인이 영상 속 차 번호를 읽었다.
“3885.”
“예? 3885라니요?”
“차량 번호 말입니다.”
“그 두 놈은 차가 없습니다만….”
“예?”
박기정이 설명했다.
“그놈들은 승합차 한 대로 현장에 이동한 후에, 외부에서 지원할 두 놈을 내려놓았다더군요. 그 두 놈은 뛰어서 도망쳤겠죠.”
“현장에서 사라진 정찰 차량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한 거는요?”
“물어봤습니다만 그놈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물론 계속 조사하겠지만, 싸움이 벌어진 걸 보고 자리를 피한 일반인일 수도 있습니다.”
“수첩하고 볼펜 좀 빌려주시죠.”
박기정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나강인이 수첩에 현장 그림을 그렸다. AI 전지인이 그의 손의 움직임에 개입했다. 그림은 실제 비율 그대로 그려졌다.
“여기 이 위치에 놈들의 봉고차가 있었잖습니까? 그런데 이 길 여기에 이렇게 생긴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습니다. 그 차 번호가 3885고요.”
“혹시 이 차에서 놈들이 내렸습니까?”
“아니요. 전투가 끝나자마자 도망쳤습니다.”
“그럼 의심하신 이유가….”
“평소에 아파트 앞에서 못 보던 차입니다. 게다가 여기는 감시하기 딱 좋은 위치죠.”
나강인이 수첩 다음 페이지에 차만 따로 그리며 계속 설명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떠났다는 건 사람이 차에 탄 상태에서 상황을 보다가 실패가 확정되자마자 도망쳤다는 뜻입니다. 그냥 구경꾼이면 갈 때 가더라도 조금은 더 보다가 가겠지요. 아니면 내려서 구경하든지.”
나강인이 새로 그린 차를 손으로 짚었다.
“그놈들이 폭행 청부조직이면, 이 차에는 청부 의뢰를 넣은 놈이 타고 있었을 겁니다.”
박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3885.차종과 번호까지 알았으니까 이 차를 당장 수배하겠습니다.”
***
브레드 밀러가 화를 벌컥 냈다.
“박 사장! 이야기가 다르잖습니까! 그놈 치워버릴 수 있다며!”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은 아까 조정철을 만나면서 할 말이 생겼다. 그의 목소리도 커졌다.
“전문인력을 여섯이나 투입했습니다! 망보는 놈들 빼고 현장 뛰는 놈만 여섯입니다! 그런데도 한 놈한테 당했어요!”
“그놈이 강하다고 경고했잖습니까!”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했어야지요!”
브레드가 손을 휘저었다.
“못 하겠으면 처음부터 못 한다고 했어야지! 그래야 나도 다른 파트너를 찾지!”
박지훈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다. 그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못 한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실패했잖습니까!”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박지훈은 조정철의 제안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했다.
“사람이 모자라면 머릿수를 늘리면 되고, 실력이 모자라면 더 고급 인력을 쓰면 됩니다.”
브레드도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이야.”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줬으면 처음부터 최고를 투입했겠지요. 그런데.”
박지훈이 슬쩍 웃었다.
“이러면 내가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커져서, 알레이나의 복귀 공연에 한 번 참여하는 거로는 대가가 부족합니다만?”
“그럼 공연 두 번?”
“거기다 미국 TV 출연도 두 번 밀어주시죠. 아무 방송이나 말고 인기 좋은 거로.”
브레드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끄응. 내가 힘 써볼 테니까 그 자식이나 빨리 치워요! 알레이나가 한국에 있을 때 계약해야 하니까 좀 서두르라고!”
***
형사 박기정이 나강인을 다시 만났다.
“습격당하실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승용차 말입니다.”
나강인은 그 차에 청부를 의뢰한 놈이 있었다고 추측했다. 그런데 그건 당시 상황만 보고 추측한 것이지 차량 내부를 확인하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차는 유리의 틴팅이 너무 진한 데다가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어서, 내부에 타고 있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박기정이 말했다.
“말씀해주신 차 번호판이 가짜더군요.”
“번호를 잘못 기억한 건 아닙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그 근처 도로 CCTV에 그 차량이 지나가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번호판도 말씀하신 그대로고요.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박기정이 혀를 찼다.
“그 번호는 이미 폐차된 차에 붙어 있어야 할 번호판입니다. 등록된 차종도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번호판을 바꿔치기한 거지요.”
“CCTV로 그 차를 계속 추적하셨습니까?”
“물론 했습니다. 이동 경로의 CCTV를 모두 조사해서 강남구로 가는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번호를 가진 차가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에도 가봤는데 그 차는 없습니다.”
“그 근처 어디선가 번호판을 갈아낀 거군요.”
“그렇지요.”
“비슷한 차를 추적하는 건요?”
“그 차가 워낙 많이 팔린 차종이고, 색도 제일 흔한 검은색인 데다가, 그 지역은 차가 너무 많이 다닙니다. 바뀐 번호를 모르면 찾기 어렵습니다.”
박기정이 사과했다.
“확실한 제보를 하셨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잡은 놈들이라도 확실히 처벌해주시죠.”
“물론이죠. 아주 탈탈 털고 있습니다.”
***
나강인은 강남으로 이동했다.
박기정은 그 차가 사라진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려주었다.
나강인이 그곳에서 주변을 보며 말했다.
“지인아. 여기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