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오디션
나강인이 룸살롱에서 녹음해온 파일을 들으면서 말했다.
“우리 지인이는 이제 욕도 잘해.”
-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녹음 파일 속 여자는 한참 화를 내다가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에게 계속 사과하던 여자는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되자마자 짜증을 냈다.
- 에이 씨. 그게 빗나가네.
나강인이 감탄했다.
“와. 쟤도 만만치 않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나쁜 년과 이상한 년이 있으니, 저기 어딘가에 좋은 년도 있을 겁니다.
곧바로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나강인은 지금 음성 부분만 따로 뽑은 녹음 파일을 듣고 있다. 아무 대화가 없는 부분은 AI 전지인이 이미 잘라냈다.
그 대화에는 쓸만한 게 없었다.
화를 내던 여자의 목소리는 30분 후에 녹음된 부분에서 다시 등장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실장 오빠. 나 진짜 그 드라마에 꽂아준 거 맞죠?
- 그런 건 사장님한테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묻냐?
- 사장님하고 연락이 안 되니까 그러죠. 그리고 내일 당장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데, 난 연습이 쪼끔 부족하단 말이에요.
-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너 그 드라마에 꽂아주기로 이야기 다 끝났다더라. 그러니까 오디션은 그냥 대충 봐.
- 무려 최진욱 피디랑 도주희 작가의 차기작인데요? 진짜 대충 해도 돼요?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여기서 그 이름들이 왜 나와?”
- 그러게 말입니다.
녹음 파일에서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 사장님이 기획사 부탁으로 일 하나 처리해주기로 하고, 그 대가로 널 거기 넣는 거야. 그러니까 넌 대충 해도 붙겠지.
- 그 처리한다는 일이 혹시 엄청 어려운 거예요? 실패하면 어떻게 해요?
이미 한 번 실패했다. 실장이 짜증을 냈다.
- 어허. 이년이 재수 없게. 그리고 너 가게는 왜 나왔냐? 사장님이 이미지 관리하라고 하신 거 못 들었어? 가서 연기 연습이나 해!
- 불안하니까 나왔죠!
- 야. 빨리 꺼져. 나갈 때 손님들 눈에 뜨이지 않게 마스크 쓰고 가.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의 음성이 녹음되긴 했지만 쓸 만한 건 없었다.
녹음 파일을 모두 확인한 후에 나강인이 등을 등받이에 대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지인아. 최 피디님이랑 도 작가님 드라마 말이야. 이러면 발이라도 담가야겠는데?”
- 대화에서 언급된 기획사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오디션 하는 데 가서 저 여자부터 찾자. 그런 후에 저 여자를 꽂아주려는 기획사가 어디인지 알아내고, 그놈이 날 처리하라고 의뢰했는지도 확인해야지. 그리고 왜 날 노렸는지도 알아내야지.”
- 녹음된 파일에 어젯밤 기준으로 오디션이 내일이라는 발언이 있었습니다. 오늘 중으로 오디션이 있을 겁니다.
나강인이 휴대폰을 들었다.
“최 피디님이랑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는 아침부터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진욱이 말했다.
“난 이거 이대로 진행해도 되나 잘 모르겠다.”
도주희가 초조한 얼굴로 요구했다.
“그러니까 최 피디가 나강인 씨를 책임지고 끌어들이란 말이야. 실전형 리얼 액션이 없으면 대본 이미 써놓은 거 다 뜯어고쳐야 한다고!”
도주희의 목소리가 커지자 최진욱의 목소리도 같이 커졌다.
“왜 나한테만 그래! 같이 노력해서 섭외해야지!”
“드라마는 피디가 책임자잖아!”
“이럴 때만 내가 책임자냐! 도 작가 맘대로 하는 게 어디 한두 개야?”
도주희가 팔은 회의 테이블 위에서 흔들고 다리는 아래에서 흔들며 말했다.
“아, 몰라! 섭외 못 하면 CG로라도 처리해줘!”
“어디서 앙탈이야! 그럴 기간과 예산이 어디 있냐고! 우리 드라마가 수백억을 쏟아붓는 대작은 아니잖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최진욱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최진욱이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가 발신자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어? 나강인 씨 전화다!”
도주희가 뻗었던 팔다리를 모으며 다급히 말했다.
“뭐해? 빨리 받아!”
최진욱이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우리 드라마 안 한다는 전화면 어떻게 하지?”
“으, 응? 안돼! 받지 마!”
“안 받으면 문자로 통보가 올지도 몰라.”
“으으….”
진동이 몇 번 더 왔다. 그대로 기다리면 전화가 끊어질 수도 있다.
최진욱이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상태로 손을 댔다.
“스피커폰으로 받을 테니까 도 작가도 잘 좀 말해봐.”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거구나. 알았어. 받아.”
최진욱이 손가락을 움직여 스피커폰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강인 씨?”
- 잘 지내셨지요?
최진욱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저희야 드라마 준비로 바쁘지요. 지금 도 작가와 같이 있어서 스피커폰으로 받았습니다.”
도주희가 얼른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도 있어요.”
- 네. 안녕하세요.
최진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 두 분이 만드시는 드라마의 오디션이 오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아. 있습니다. 오늘 일부 조연 배역의 오디션이 있습니다. 지금 도 작가와 함께 지원자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도주희도 말했다.
“오디션은 오늘 보는데 합격 발표는 나중에 할 거예요.”
도주희가 오늘 오디션 참여자 명단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최진욱 쪽으로는 왼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흔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다급했다.
최진욱은 그녀의 손짓과 표정만 보고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가 스마트폰에 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오늘 오디션 참가자 중에 누구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으신지….”
- 그건 아니고요.
최진욱은 약간 실망했다.
“아니시구나.”
- 그 오디션 참관 좀 해도 되나 해서요.
최진욱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주희가 급히 양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두 개 만들었다.
최진욱이 말했다.
“당연하지요. 언제든지 오십시오.”
도주희가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하다가 얼른 말했다.
“아유. 마침 심사위원 한 분이 못 오신다고 해서 자리 하나가 딱 비네요? 오셔서 그 심사위원석에 앉으시면 돼요.”
최진욱도 급히 말했다.
“제가 오디션 장소를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점심 먹고 바로 시작할 겁니다.”
- 예. 그러면 그때 뵙겠습니다.
통화 끝낸 후에 도주희가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된 거 같지? 나강인 씨가 우리 드라마 하는 거 맞지?”
최진욱은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관심이 있으니까 오디션 참관을 하지, 그게 아니면 왜 하겠어?”
도주희가 팔을 뻗어 흔들며 말했다.
“내가 단순 참관이 아니라 심사위원 자리를 맡기는 거 봤지? 어서 칭찬해!”
최진욱이 도주희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잘했다! 도 작가! 설마 심사위원까지 하고서 드라마를 못하겠다고는 안 하겠지!”
도주희가 실실 웃었다.
“으흐흐. 나강인 씨를 무술감독으로 섭외 못 하면 대본에서 액션을 왕창 잘라내야 해서 걱정 많이 했어. 전부 다 나강인 스타일에 딱 맞춘 실전형 리얼 액션이니까.”
“우리 이제 명품 액션 로코 드라마를 만들어보자고. 흐흐흐.”
“오호호홋! 당연하지!”
한참을 웃다가 최진욱 피디가 물었다.
“근데 심사위원은 우리 둘밖에 없잖아. 누가 빠진다는 거야?”
“빠지긴 왜 빠져? 그냥 의자 하나 새로 놔야지.”
****
나강인은 그날 오후에 오디션이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오디션은 방송국이 아니라 외부 건물에서 진행됐다.
나강인이 오디션 심사장으로 들어가자 최진욱이 웃으며 반겼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기 이 자리가 강인 씨 자리입니다.”
오디션 심사를 도와주는 조연출은 지난번 드라마에서도 조연출을 맡아서 얼굴을 알았다. 나강인이 조연출과 간단히 인사했다.
오늘은 중요도가 낮은 조연급만 심사하는 자리라 다른 외부 심사위원은 없었다.
가운데는 피디인 최진욱이 앉았다.
도주희가 최진욱의 왼쪽에서 나강인이 앉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오늘 오디션 보는 배역 중에 액션이 필요한 자리가 몇 개 있는데, 몸 쓰는 실력을 제대로 확인하는 게 좋을까요?”
나강인의 드라마 참여가 불투명할 때는 지원자의 액션 연기 능력이 중요했다. 그런데 나강인이 무술감독을 맡아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니면 연기 잘하는 사람은 팔다리만 멀쩡히 붙어 있으면 그냥 넘어갈까요?”
나강인이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까 제대로 봐야겠죠?”
도주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케이. 혹시 모를 일만 안 생기면 참여한다는 거잖아.’
최진욱도 똑같이 판단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시작합시다. 들여보내.”
배우들이 한 명씩 들어와 짧은 연기를 하고 나갔다. 액션이 필요한 일부 배역은 무술이나 체조 등으로 운동능력을 보여주었다.
1인당 할당된 심사 시간은 짧았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잠깐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최진욱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오늘 오디션은 2차 심사입니다. 서류심사나 동영상 심사를 통과한 사람만 보는데도 지원자가 많습니다. 이게 다 우리가 만든 ‘푸른 하늘’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입니다.”
도주희가 맞장구쳤다.
“게다가 이번엔 명품 액션 로코라고 했더니 지원자가 더 많아졌어요. 우리가 같이 만든 ‘푸른 하늘’이 액션이 워낙 잘 나왔잖아요.”
나강인이 말했다.
“그래서 운동 좀 해본 분들이 지원하셨군요. 움직임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최진욱이 조금 전에 본 지원자 서류를 펼쳤다.
“방금 지원자처럼 연기는 진짜 잘하는데 액션은 어색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놓치면 너무 아깝죠. 하하하.”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새로운 지원자가 들어왔다.
새 지원자가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연지입니다!”
나강인은 당황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이연지도 나강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앗!”
최진욱이 물었다.
“강인 씨가 아는 지원자입니까? 아. 이력을 보니까 ‘운명의 창’ 단역 출연이 있군요. 이 영화에서 알게 되신 건가요?”
나강인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이연지를 보며 대답했다.
“아뇨. 쟤는 그러니까…. 원래 아는 애입니다.”
“얼마나 아는….”
“잘 알죠.”
나강인이 이연지에게 물었다.
“너 이 드라마 오디션 본다는 말은 없었잖아.”
이연지가 웃었다.
“히히.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몰래 지원했죠. 그리고 저도 아저씨가 심사위원으로 계실 줄은 몰랐어요.”
“난 오늘 갑자기 결정한 거야.”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최진욱이 도주희와 눈짓으로 의논했다.
‘쟤 연기가 좀 부족하면 대사 거의 없는 간단한 배역에라도 꽂아주자.’
‘당연하지. 강인 씨를 확실히 끌어들이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최진욱이 웃으며 이연지에게 말했다.
“그럼 준비해온 연기부터 해봐요.”
이연지가 사전에 제공된 오디션용 대본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최진욱이 이연지의 경력을 다시 확인했다. 드라마 하나와 영화 하나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밖에 없었다.
준비한 짧은 연기가 끝난 후에 최진욱이 물었다.
“연기를 어디서 배웠어요?”
“그냥 옆 동네 아는 언니들이나, 촬영장에서 다른 분들이 하는 걸 보면서요.”
그녀의 옆 동네에 신은하와 이보라가 산다.
“연기학원은 다녀봤어요?”
“아뇨. 국영수 학원도 안 다니는데요.”
최진욱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치곤 연기를 제법 잘하는데?’
최진욱이 도주희를 돌아보았다. 도주희가 눈을 반짝이며 대본을 펼쳤다.
“여기 이 배역도 해볼래요? 이건 내가 그냥 보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미리 제공한 오디션용 대본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할게요!”
조연출이 대본을 받아 이연지에게 주었다. 도주희가 요구한 장면은 두 개였다. 이연지가 대본을 읽어본 후에 돌려주며 물었다.
“바로 하면 돼요?”
도주희가 말했다.
“연습 안 해도 되면 해봐요. 대본은 보면서….”
“다 외웠습니다!”
“한 번 읽어보고 두 씬 다 외웠어요?”
“네!”
나강인이 옆에서 말했다.
“연지가 전교 1등이거든요.”
“아니, 그래도…. 그럼 상대역은….”
원래는 조연출이 한다. 그런데 도주희가 머리를 굴렸다.
“강인 씨가 하실래요?”
“음…. 그러죠.”
나강인은 대본을 훑어본 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강인 씨도 대본을 방금 외운 거예요?”
“그렇죠?”
“와. 그 동네 어디인데 다들 기억력이 이렇게 좋지? 약수터에서 머리 좋아지는 물이라도 나와요?”
“집에서는 정수기를 씁니다.”
이연지가 오디션장 구석으로 가서 뛰어오는 연기부터 시작했다.
“휴우. 안 늦게 도착했다.”
나강인이 상대역 대사를 말했다. AI 전지인이 그의 발음과 억양을 보정했다.
“야. 고딩은 이런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마라.”
“이 오빠가 고딩 무서운 줄을 모르네요? 그리고 제가 어디 그냥 고딩이에요?”
“어.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여고생이지.”
“놀라운 검술 실력을 숨긴 여고생이죠.”
“숨기긴 뭘 숨겨. 너 약하잖아.”
그녀가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며 말했다.
“이 가면을 쓰면 강해지지 않을까요?”
“부끄러워지겠지. 그런데 그거 어디서 많이 본 가면이다?”
“이제부터 아이스 프린세스라고 불러줘요.”
“시끄러우니까 집에 가라. 여기 있으면 다친다.”
대본에 표시된 첫 번째 장면은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