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술안주
나강인이 조금 늦은 저녁 시간에 드라마 작가 도주희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도주희가 활짝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와요.”
최진욱 피디는 먼저 와 있었다.
“간식도 안 먹고 기다렸습니다.
나강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도주희는 고층 아파트를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창문밖에는 시야를 막는 건물이 없었다.
“전망 좋네요.”
도주희가 자랑했다.
“여기가 야경이 그렇게 좋아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돈을 많이 벌면 이런 곳으로 거점을 옮기십시오.
“그 돈은 활동자금이라며.”
- 전술적으로 유리한 거점 확보도 임무 활동에 포함됩니다.
“지인아. 넌 진짜 사람 다 됐다. 이젠 부동산에도 관심이 있구나.”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도주희에게 말했다.
“냉장고 좀 봐도 될까요?”
도주희가 얼른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럼요. 안에 있는 거 전부 다 써도 돼요.”
나강인이 4도어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많네요.”
안에는 따로 장을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다양한 재료가 들어있었다.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도 있고, 근처 마트에 전화로 주문해서 받은 것도 있어요.”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이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 중에서, 안주로 써도 괜찮은 게 있냐?”
- 물론입니다.
허공에 음식 목록이 몇 개 떴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최후의 만찬 시리즈 3번?”
- 지구연합군이 적진에 고립되어 방어와 구출 모두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에 빠지면, 전멸을 각오하고 탈출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때 병사들에게 제공하는 식사입니다. 물론 탈출 전에 요리할 시간이 있을 때만 제공 가능합니다.
“그 상황에서 탈출을 포기하면?”
- 다 죽습니다.
“잡탕 케이크도 그렇고, 좀 더 맛있는 요리에는 그런 심각한 이유가 붙더라.”
- 야전 전술 요리는 전장에서 사용되는 것을 전제로 개발됐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도 이 만찬 3번을 만들 때가 있겠지?”
- 만찬 시리즈는 대량 조리가 어려워 일반 야전 식단으로는 효율이 떨어집니다.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특별한 날에 만찬 시리즈를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맛은?”
- 맛은 있습니다.
“그럼 이거로 하자.”
나강인이 냉장고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보고 도주희가 물었다.
“재료가 부족하면 좀 더 주문할까요? 이 근처 마트는 전화로 주문하면 배달되는데요.”
“이거면 충분합니다.”
나강인이 냉장고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꺼냈다.
최후의 만찬 시리즈 3번은 잡탕밥이나 잡탕 조림보다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잡탕 시리즈는 대형 궁중팬에 넣고 한 번에 조리할 수 있지만, 만찬 3번은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요리가 섞여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먹을 사람이 세 명밖에 없어서 대량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나강인이 요리를 만든 순서대로 하나씩 내놓았다.
도주희가 첫 번째 요리를 맛보고 감탄했다.
“와. 이 베이컨말이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데 새콤한 맛과 기름진 고소한 맛의 조화가 진짜 장난 아니다.”
그녀가 안주부터 먹고 술도 한 잔 마셨다.
“게다가 이 기름진 맛은 술을 마시니까 싹 씻겨나가네요. 그래서 안주가 또 땡겨요.”
나강인은 얇은 과자에 치즈와 과일을 얹은 술안주도 내놓았다.
그녀는 그걸 먹을 때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건 짭조름하면서도 상큼한 맛의 조화가 진짜 예술이에요. 딱 내 취향이야. 밑에 이 과자는 뭐예요?”
“잡탕 과자를 비스킷처럼 얇게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한 걸 쓰셨으니까 이렇게 맛있구나.”
“잡탕 과자가 귀한 건 아니죠.”
도주희가 술을 한 잔 더 마신 후에 손가락을 흔들었다.
“직접 만드니까 모르시나 봐요. 나강인표 잡탕 과자는 파는 곳이 없잖아요. 돈을 줘도 못 구하는데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귀한 거 맞아요.”
나강인은 떠먹을 수 있는 국물 요리도 만들어 내놓았다.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국물도 술을 불렀다.
그는 안주만 내놓은 게 아니다. 두꺼운 소고기를 깍두기처럼 썰고 직접 만든 소스를 사용해 조리한 요리는 식사용으로 내놓았다.
최진욱이 그 고기 요리를 먹으며 말했다.
“난 강인 씨가 식당 차리셨으면 진짜 좋겠습니다. 매일 가서 먹게.”
도주희가 한소리 했다.
“그러면 우리 드라마 무술감독은 누가 맡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술은 도주희가 미리 준비한 것을 마셨다.
최진욱은 술과 안주를 번갈아 마시고 먹으며 감탄했다.
“안주가 진짜 전부, 장난 아니게 맛있습니다. 안주한테 술이 밀리네요. 도 작가. 더 좋은 술 있잖아. 그거 따.”
도주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야겠지?”
그녀가 새로 가져온 술을 자랑했다.
“이거 지난번에 드라마 시청률 잘 나왔다고 방송국에서 선물로 받은 거예요.”
최진욱이 같이 자랑했다.
“일 년에 딱 백 병만 만든다는 귀한 전통주입니다. 방송국이 저는 직원이라고 안 주고 도 작가한테만 줬죠. 오늘 드디어 맛을 보겠네요.”
“생일에 마시려고 숨겨놨는데 오늘 따는 거예요. 안주가 너무 좋아서요.”
사람은 술이 들어가면 입이 가벼워진다. 두 사람은 이미 술을 꽤 마셨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두 사람 다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합니다. 적당히 취한 상태입니다.
나강인이 최진욱에게 술을 권하면서 물었다.
“오늘 오디션을 본 사람 중에 합격자는 나왔습니까?”
“오늘 당장 결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까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적당한 배역이 있으면 맡게 되겠죠.”
도주희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한 명은 거의 확실하잖아. 그 여고생.”
“아. 이연지. 그치. 주인공 동네 아는 동생 역할에 딱 맞지. 근데 오늘 합격자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야.”
“응? 또 누구? 후보군에 올려놓은 지원자는 좀 있지만 이연지도 아직 확정은 아닌데?”
“최도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최도화의 목소리와 룸살롱에서 녹음한 파일 속 목소리가 일치합니다.
도주희가 물었다.
“최도화가 누구야?”
“얼굴 예쁜 발연기.”
“아아. 걔?”
도주희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최진욱을 휙 돌아보았다. 그녀가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걔가 왜? 뭐야? 같은 최 씨네? 친척이야? 최 피디 조카라도 돼?”
최진욱이 인상을 구겼다.
“내 조카 연기력이 그 지경이면 내가 창피해서라도 오디션을 보게 했겠냐? 그게…. 에이. 나중에 이야기해. 술맛 떨어진다.”
나강인은 그 정보를 원해서 오늘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가 말했다.
“저도 좀 듣고 싶은데요. 최도화의 발연기가 하도 인상적이어서요. 어떻게 된 겁니까?”
최진욱이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어떤 기획사에서 우리 방송국 프로그램에 가수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대가로 조연 몇 자리를 부탁했습니다.”
“방송출연은 가수에게 좋은 일 아닌가요?”
“인기가 없는 프로그램 몇 개를 살려보려고 투입하는 거면 잘나가는 가수는 싫어할 수도 있죠. 그래서 그 보상으로 우리 드라마에 그 기획사 사람을 넣어주는 거고요.”
“그렇게 배역을 주는 게 흔한가요?”
“우리 방송국에서는 흔합니다. 어차피 오디션을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걸러내면 되니까 탈도 크게 안 나고요.”
최진욱이 술을 단숨에 마시고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최도화는 연기를 못 해도 너무 못하잖아요. 이러면 사전에 무슨 협의가 됐든 쳐내야 하는데!”
“쳐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군요.”
“예. 고룡 엔터에서 최도화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나와서요.”
나강인이 원하던 이름이 나왔다.
“고룡 엔터? 거긴 어떤 곳입니까?”
“모르시는구나. 가수 전문 기획사인데 연기 쪽도 발을 살짝 담그고는 있습니다. 보통은 소속 가수를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시키죠. 가수 중에는 배우도 겸업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제법 있으니까요.”
“혹시 그 회사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있습니까?”
최진욱이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음…. 아! 회사 설립자금의 출처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좀 있었네요. 소속 가수 중에 약쟁이도 나왔고요. 이런저런 지저분한 소문이 좀 있는데, 이 바닥에 그런 회사가 어디 한두 곳이어야죠.”
“그렇군요.”
나강인은 묻는 김에 신은하의 소속사에 관해서도 물었다.
“그럼 SAH 엔터는요?”
“거기요? 사장님이 왕년에 유명한 가수였잖아요. 그래서 서재현 사장님은 가수와 배우 파트 중에 가수 쪽과 주로 어울려서 논다는 정도?”
“그렇군요.”
이번에는 최진욱이 물었다.
“혹시 신은하 씨 때문에 물어보시는 건가요?”
“은하와 SAH 사이의 계약은 올해 안에 끝나니까, 아니다 싶으면 은하가 알아서 다른 데 가겠죠. 그냥 물어봤습니다.”
***
술자리는 두 사람이 꽤 취한 후에 끝났다.
도주희는 작업실에서 자고, 최진욱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나강인은 최진욱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에 건물 밖에서 궁리했다.
“고룡 엔터가 나를 왜 노릴까?”
- 요원님을 스카우트하려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당연히 그건 아니지. 무술감독으로 나를 스카우트하려던 거면 겨우 양아치 여섯 놈을 보낼 리 없으니까. 설사 보낸다 해도 양아치가 아니라 협상할 사람을 보내야지.”
- 드래곤 플레이트 기술을 노렸을 수 있습니다.
“개발자를 납치하려 했다? 근데 그 기술을 왜 가수 기획사가 노려?”
- 그러게 말입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전투력도 모르고, 기술을 노린 것도 아니고, 스카우트하려는 건 더 아니고. 진짜 왜지?”
- 그러게 말입니다.
“지인아. 그냥 모르겠다고 해.”
- 모르겠습니다.
“고룡 엔터 사장이 어떤 놈인지 일단 좀 만나보자.”
- 요원님의 모습을 노출하실 겁니까?
“아니. 미행하자고.”
술자리가 길어져서 시간은 이미 밤이 깊었다.
- 지금부터 잠복하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미행 대상이 이미 퇴근했거나, 아직 하기 전이라 해도 결국 집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문제는 또 있다.
- 요원님은 어젯밤에 잠을 전혀 자지 않았습니다. 군용 신체 강화 기술이 요원님의 뇌까지 강화한 건 아닙니다. 수면이 부족하면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잔소리 그만해. 집에 가서 자려고 했어.”
-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강인은 그날은 집에 가서 잠을 푹 잤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후에 자는 잠이라 아주 깊게 잠들었다.
나강인이 잘 때는 AI 전지인도 잠든 것과 비슷한 상태로 쉰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도 소음과 진동 등을 감지해 비상 상황을 대비한다.
이튿날 오전에 신은하가 전화를 걸었다. 나강인이 잠깐 버텨봤지만 벨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결국 눈을 반만 뜨고 스마트폰을 보았다.
“놔두면 꺼지겠지?”
- 발신자가 집요한 신은하입니다. 안 받으면 또 걸 겁니다.
나강인이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나 지금 자는 중이다.”
- 나 오늘 스케줄이 비는데 같이 CF 준비할까?
“오늘은 내가 바빠.”
- 요즘 뭘 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바빠?
“이것저것. CF는 다음에 같이 준비하자.
- 이 오빠가 내가 요즘 영화 홍보로 얼마나 바쁜지 모르네? 아주 그냥 혼자만 홍보에서 쏙 빠져서 말이야.
“홍보는 감독하고 배우들이 해야지. 내가 낄 자리가 아니야.”
- 내가 가는 방송마다 피디나 작가들이 무술감독님은 섭외 안 되냐고 묻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실수로 전화번호라도 흘리면 어쩌려고?
나강인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 협박은 하고 그래. 알았으니까 점심때 보자. 밥을 먹을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하지만.”
- 진작에 이렇게 나올 것이지.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고룡 엔터 사장을 미행하려면 더 일찍 일어나셨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일어났잖아. 근데 오늘 무슨 날인가? 오늘따라 보채는 사람이 많다.”
나강인이 간단히 준비한 후에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아파트 옆집에 사는 알레이나도 집에서 나오다가 나강인과 딱 마주쳤다.
알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혹시 내가 나오기만 기다리다가 문 열리는 소리 듣고 나오는 거야?”
“현관문은 내가 먼저 열었다.”
“아….”
“그럼 이제 네가 기다렸다고 봐야 하지?”
알레이나가 발끈했다.
“내가 왜! 내가 누굴 기다리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이야! 누구냐면 말이야!”
팝스타 알레이나 민이라고 말할 순 없다. 다른 이름을 대야 한다. 그녀가 다급히 가명을 궁리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광년이?”
“그래! 내가 바로 그 광년이,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실수한 거야!”
그녀가 변명하는 사이에 나강인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탔다. 뒤에 남은 알레이나가 얼른 따라 탔다.
“진짜 광년이 아니라고! 내 이름은!”
그녀는 광년이보다는 나은 이름을 궁리했다. 이연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그녀를 ‘알 언니’와 ‘레이나 언니’라고 불렀다. 그 가명이 떠올랐다.
“레이나?”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의문형이냐?”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렇다고.”
“너 발음은 완전 토종 한국인이다.”
이번에는 알레이나가 물었다.
“그럼 당신 이름은 뭐야?”
“안 가르쳐준다.”
“왜! 난 가르쳐줬잖아!”
“네가 가르쳐준 건 가명이잖아.”
“그….”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강인이 밖으로 휙 나갔다.
알레이나가 뒤따라 나오면서 말했다.
“그럼 광식이라고 부를 거야!”
“맘대로 해라. 광놈 아닌 게 어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