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갈림길
나강인이 아파트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알레이나가 그걸 보고 물었다.
“응? 오늘은 피시방에 안 가?”
“나는 너랑 달라서 일이란 걸 하러 간다.”
“난 놀 건데.”
“어?”
알레이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고생 많이 해.”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정신 공격이 실패했습니다. 요원님이 당했습니다.
“그러게.”
나강인은 개조한 차를 타고 고룡 엔터로 이동했다.
“개조할 때마다 차 무게가 늘어나는데 하는 김에 엔진도 바꿔야 하나.”
- 그러려면 새 엔진부터 손에 넣어야 합니다.
“자동차 엔진도 만들 수 있냐?”
- 물론 없습니다.
“혹시나 했다.”
나강인은 고룡 엔터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런 후에 건물 정문이 잘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말했다.
“여기서 사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지인아. VOD로 받아놓은 드라마 좀 틀어봐.”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영상을 눈앞에 띄웠다. 그러면서 조언했다.
- 하라고 하셔서 했습니다만, 시선은 화면이 아니라 고룡 엔터 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박지훈이 정문으로 나오면 AR 영상 옆으로 슬쩍 보이는 것만으로도 네가 구분할 수 있잖아.
- 정문으로 나올 때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만, 다른 정보는 놓칠 수 있습니다. 요원님의 시선이 영상에 가려지지 않은 상태로 저 건물을 보고 있어야, 박지훈의 얼굴이 창문을 통해 슬쩍 보였을 때 알아보기 쉽습니다.
“이마에도 눈을 달고 싶다.”
- 참 보기 좋을 겁니다. 하나 다시죠.
“뭘 또 정색하고 그래. 농담이야.”
나강인이 회사 앞 카페에서 계속 기다렸지만 오전에는 박지훈이 보이지 않았다.
- 출근하기 전에 왔어야 했습니다.
“오늘 출근은 했겠지?”
- 요원님이 아침 일찍 나왔으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왔잖아.”
- 신은하가 전화로 깨워서 일어나셨습니다. 신은하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습니다.
“저 건물에는 구내식당이 없다니까 점심때까지만 기다려 보자. 출근했으면 밥 먹을 때는 나오겠지.”
나강인은 점심은 고룡 엔터가 입주한 건물이 잘 보이는 식당에서 먹었다.
그의 앞에는 신은하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푸념했다.
“요즘 영화 홍보 때문에 너무 바빠서 같이 밥 먹기 참 힘들다.”
“넌 영화 촬영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바쁘네?”
“왜 나만 바쁠까? 아무리 봐도 강인 오빠는 노는 거 같은데 말이야. 오늘도 오전 내내 카페에서 놀았지?”
“오해다. 이게 노는 것처럼 보여도 노는 게 아니야.”
“내일 홍보 스케줄 같이 안 갈래?”
“응. 안 갈 거야.”
“그럼 오늘은? 어디 가서 놀까?”
“오늘은 CF 이야기하러 보자는 거 아니었냐?”
신은하가 그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온 직장인을 슬쩍 가리켰다.
“저 사람은 아마 일주일 중에 5일을 근무할 거야. 왜 그러는지 알아? 나머지 2일을 보람차게 놀려고 5일을 일하는 거야. 우리에게는 오늘이 그 이틀 중 하루야.”
“그래. 놀….”
나강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음식을 주문할 때 음식값을 먼저 냈다. 박지훈을 발견하면 바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미안. 나 먼저 갈 곳이 생겼다. 밥 먹고 가라.”
“뭐야? 밥 먹다가 날 바람 맞히게? 아니, 며칠 만에 만나서 이러기야?”
“미행 대상이 나왔어.”
신은하의 눈이 반짝였다.
“미행? 누군데? 용병이야? 해적이야?”
“고룡 엔터 사장.”
신은하가 나강인을 따라가면서 물었다.
“어? 박지훈? 왜?”
나강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이냐?”
“개인적으로는 모르지. 근데 그 회사는 안 좋은 소문이 많아. 아. ‘햇살 좋은 날’을 다시 촬영하게 만든 마약파티 있잖아.”
“잘 알지. 그 마약파티.”
나강인이 동네 경찰서에서 방화 살인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준 일이 있었다.
박기정이 소속된 형사팀이 그 몽타주를 이용해 범인을 잡고 마약파티 정보를 알아내 현장을 급습했다. 그때 현장에서 검거된 배우가 영화 ‘햇살 좋은 날’의 조연이었다.
그때 손태민 감독과 영화사 THO 엔터는 급히 영화 재촬영에 들어갔다. 나강인은 그 영화의 밥차 대타를 뛰다가 신은하를 만났다.
신은하가 설명했다.
“그 파티에 고룡 엔터 소속 가수도 있었어. 저 회사에 약쟁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딱 걸린 거지.”
나강인이 물었다.
“그런데 너 왜 나 따라오냐?”
신은하가 나강인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번엔 표적이 용병이나 해적도 아닌데 좀 따라다녀도 괜찮잖아. 내가 강인 오빠랑 사건을 자주 해결했더니, 이제 이런 거 보면 짜릿한 자극이 느껴진다니까?”
“고룡 엔터 가수가 아니라 네가 뽕을 맞았구나.”
“응? 무슨 뽕?”
“스릴뽕.”
두 사람은 나강인의 차를 타고 박지훈의 차를 미행했다.
신은하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앞을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사건이야? 뭔데 기획사 사장을 미행해?”
“저놈이 최근에 나를 노리고 양아치들을 보냈거든.”
“어머! 저런 나쁜 새끼! 그 양아치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 걔들은 죄가 있겠구나. 근데 왜 보냈대?”
“지금 그걸 알아보는 중이야.”
***
박지훈은 점심시간에 고급 음식점 별실에서 브레드 밀러를 만났다.
브레드가 말했다.
“일찍 좀 다니시지. 이게 그 코리안 타임인가?”
“조금 늦더라도 의심은 안 받아야지요.”
“누가 우리를 보면 미국 진출 협의 문제로 만났다고 하면 되잖습니까? 박지훈 사장님. 의외로 소심하시네.”
박지훈이 히죽 웃었다.
“내가 소심하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나 대범한 사람입니다.”
“일 이야기나 합시다. 그놈을 치우는 건 어떻게 됐습니까?”
“곧 처리될 겁니다. 그러니까 미국 진출 계획부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시죠.”
나강인과 신은하는 그 식당 근처 건물 옥상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신은하가 옥상 구석에서 물었다.
“왜 저 식당이 아니라 이 카페로 온 거야?”
“내가 저기 들어가면 저놈도 내 얼굴을 볼 테니까.”
“여기선 무슨 이야기 하는지 안 들릴 텐데? 막 멀리서 도청하는 그런 장비 없어? 우산처럼 생긴 거 말이야.”
나강인이 카페 밖 옥상에서 식당 쪽을 보며 대답했다.
“없어. 설사 있다 해도 여기서 그걸 펼치면 카페 직원이 경찰에 신고한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식당 별실에서 박지훈을 찾았습니다.
“박지훈과 만나는 사람은?”
- 이 각도에서는 옷만 보이고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식당을 나갈 때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자.”
신은하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서 가져왔다.
“먹으면서 기다려. 점심은 먹어가면서 일해야지.”
나강인은 커피를 마실 때도 눈은 식당을 향했다. 그는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신은하와 잡담했다.
신은하도 그의 옆에서 식당 쪽을 슬쩍슬쩍 보았다.
그녀는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 날에 강인 오빠하고 이런 재미있는 일을 하니까 되게 스릴 있다.”
“내가 너 재미있으라고 이 일 하는 거다. 알지?”
“웃기지 마.”
“넌 이미 웃고 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박지훈이 식당을 벗어납니다. 같이 있던 사람은 박지훈보다 늦게 나왔습니다. 조금 전에 확보한 옷 이미지를 이용해 추적 대상자를 식별했습니다.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허공에 브레드 밀러의 얼굴 사진이 떴다.
“어? 이놈 그놈이네?”
- 최근에 옆집 여우와 시비가 붙었던 놈입니다.
“왜 날 노리나 했더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게 아니야. 옆집 광년이가 목표였어.”
- 역시 옆집 여우가 문제입니다.
“그럼 걔는 그냥 빚쟁이가 아니라 미국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건가?”
이제 그림이 그려졌다.
“저놈이 옆집한테 접근했다가 나한테 쫓겨나니까, 내가 경호원인 줄 알고 박지훈에게 날 치워달라고 청부했겠지. 박지훈은 다시 룸살롱 사장에게 청부하고, 그 사장은 지난번에 잡은 청부업자를 고용했어. 일이 그렇게 된 거네.”
-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경찰에 싹 다 넘겨야지.”
- 저 두 사람이 요원님의 습격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게. 범인은 알아냈는데 아직 물증이 없네.”
옆에서 신은하가 물었다.
“왜? 뭐 알아냈어? 박지훈이 저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약이라도 팔았어?”
“저놈 약장사도 하냐?”
“고룡 엔터 사장이 설마 그러진 않겠지.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고룡 엔터니까, 아는 마약상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저놈 정체는 조금 더 알아보자.”
박지훈은 회사로 돌아갔다.
나강인이 브레드의 차를 다시 미행했지만 그는 호텔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신은하는 옥상 카페에 있을 때는 스릴 있다며 좋아했지만, 차에 가만히 앉아서 잠복하는 건 지루해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니. 저놈 차 번호판은 확인했으니까 가자.”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디 좋은 데 놀러 가자!”
“낮에 같이 갈 만한 곳은…. 강변을 좀 달릴까?”
“으응? 뛰자고?”
“등산도 좋고. 어느 산이 좋으려나.”
신은하는 뛰는 것도 싫고 힘들게 산에 올라가는 것도 싫다.
“영화! 극장에 가만히 앉아서 영화를 보고 싶어!”
두 사람은 영화 한 편을 본 후에 동네로 돌아갔다. 그런데 평소처럼 피시방에 갔다가 문제가 생겼다.
알레이나는 피시방에서 점심을 챙겨 먹고 이미 집으로 돌아갔다.
대신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이보라가 지정석에 앉아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뭐야? 왜 둘이서 같이 와?”
신은하가 자랑했다.
“같이 영화 보고 왔거든. 재밌더라.”
“나도 영화 볼 줄 아는데!”
“어. 많이 봐. 혼자서.”
이보라가 신은하를 째려본 후에 일부러 나강인에게 물었다.
“강인 오빠. 술안주 엄청 잘 만든다면서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도주희 작가님이 단톡방에서 엄청 자랑했어요. 어제 최진욱 피디님이랑 같이 마셨는데 장난 아니었다면서요.”
이보라는 두 사람이 만든 드라마 ‘푸른 하늘’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나강인은 그 드라마의 후반부 액션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덕분에 드라마의 시청률이 올라갔고 그녀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보라가 신은하를 슬쩍 보았다.
“은하는 그 술안주 먹어봤으려나?”
신은하가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뭐야? 난 왜 모르는 이야기지?”
“도 작가님이 나한테 그거 진짜 맛있다고 꼭 먹어보라더라. 근데 넌 뭔지도 모르는구나?”
“이제 먹어보면 되지!”
신은하가 나강인을 보며 눈을 열심히 깜빡였다.
“그치? 응? 그치?”
“알았다. 어차피 오늘은 쉬려고 했으니까 저녁은 술이나 마시자.”
“아싸아.”
이보라가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술 마실 줄 알아요.”
“같이 가는 거 아녔어?”
“그쵸? 으흐흐흐.”
신은하가 혀를 찼다.
“쳇.”
세 사람은 나강인의 집으로 가서 가볍게 술을 마셨다. 신은하가 살짝 취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다. 자주 좀 이렇게 먹자.”
이보라도 맞장구쳤다.
“다음에는 술은 내가 사 올게요! 진짜 좋은 거로요!”
신은하가 받아쳤다.
“나 집에 좋은 술 많아.”
“너 술 사서 모으는 게 취미야? 주정뱅이냐?”
“아니. 우리 아빠가 모았어.”
“아…. 운치 있는 취미를 가지셨네.”
나강인은 술안주를 넉넉히 만들어 두 사람에게 싸주었다.
술을 적당히 마셔서 기분이 좋아진 두 사람은 생글생글 웃으며 밀폐용기를 받았다.
신은하와 이보라 둘 다 이 동네에 부모님의 집이 있다. 어릴 때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살던 동네라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나강인은 아파트 입구까지만 두 사람을 바래다준 후에 손을 흔들었다.
“가라.”
두 사람은 신나게 한 손을 흔든 후에 각자의 집으로 걸어갔다.
나강인은 두 사람을 보낸 후에 동네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난 햄버거라도 하나 먹어야겠다.”
- 패티는 꼭 두 개를 넣으십시오. 콜라와 감튀도 추가하십시오.
“당연히 세트를 살 거야.”
나강인은 햄버거 세트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직접 만든 요리는 남에게 실컷 먹였으니 이제 남이 만든 걸 먹을 차례다.
그런데 그가 아파트 입구를 지나갈 때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수상한 상황을 감지했습니다.
“보고해.”
- 요원님이 햄버거 세트를 사러 갈 때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던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을 의심한 이유는?”
- 그 사람이 맥주를 마실 때 캔의 기울기를 분석했습니다. 내용물이 80% 이상 남아 있었습니다. 안주도 많았습니다. 벌써 다 먹었을 리는 없습니다.
다른 때라면 그 정도만 보고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맥주 한 캔 정도는 빨리 마시고 자리를 떴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는 상황이 다르다.
“청부업자가 다시 찾아온 건가? 그럼 그놈부터 잡아야겠다.”
나강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숨어있냐?”
AI 전지인이 나강인이 본 주변 사물을 모두 분석한 후에 보고했다.
-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응? 숨어서 나를 노리는 게 아니야?”
- 숨어서 감시하는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강인이 편의점 쪽을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어? 가만? 그놈이 저기 있었으면, 내가 은하와 보라를 배웅하는 걸 봤겠네?”
- 물론입니다.
“나를 대놓고 노리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을 이용해서 함정을 파려는 거라면?”
- 요원님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보다는 성공 확률이 높은 전술입니다. 신은하와 이보라 중 한 명이 위험합니다.
“젠장. 둘 중에 누굴 노리는 거야?”
-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람 중 누구를 보호할지는 요원님이 선택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