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43화 (243/411)

243. 밑밥

나강인이 최근에 때려잡은 청부업자들은 관할 경찰서에서 맡았다.

박기정 형사가 나강인을 조용히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그놈들은 폭행 청부를 전문적으로 하는 놈들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진짜 전문가는 두목뿐입니다. 다른 두 놈은 합류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두 놈이 합류한 이후에 저지른 폭행 사건은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두목이 자기 입으로 업계 최고라고 했으니까 그 전에도 전과가 더 있을 겁니다.”

“예. 그래서 과거 다른 미제 사건들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살인사건을요.”

“살인이요?”

“이번도 그렇지만 부하들이 자백한 기존 폭행 사건도 사람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더군요. 그럼 그 이전에는 사망자가 있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사망자가 나오면 부하들을 갈아치운다?”

“정말 그랬는지는 갈아치운 예전 부하들을 찾아서 확인해야죠. 어쩌면 그 부하들도 제거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두목이 살인마일 수도 있군요.”

“살인을 저질렀다면 꼭 밝혀내겠습니다.”

나강인은 그때 청부업자만 잡은 게 아니다.

“조정철은요?”

룸살롱 사장 조정철은 부하 두 명과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나강인에게 잡혔다.

“조정철은 청부업자와 통화한 대포폰이 증거로 나왔습니다. 그걸 들이미니까 부하들은 사장이 통화하는 걸 들었다고 자백했습니다. 문제는.”

박기정이 혀를 찼다.

“조정철은 몸통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강인 씨를 습격하라고 시킨 놈이 누군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강인은 그놈이 누구인지 안다.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이 범인입니다.”

그 정보는 이미 박기정에게 전달했다.

“예. 그렇게 말씀하셨죠. 저도 믿고 있고요. 그런데 박지훈을 체포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강인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조정철은 박지훈이 시켰다고 하는 게 유리할 텐데…. 의리 때문에 그럴 리는 없고, 입을 다무는 이유는요?”

“박지훈은 규모가 제법 큰 연예기획사 사장입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힘 있는 곳에 술접대도 꽤 한 것 같고, 대형 로펌을 동원할 돈과 인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박지훈은 빠져나갈 수 있다?”

“박지훈이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으니까요. 아니, 증거는 있겠죠. 조정철이 어딘가에 숨겨뒀을 겁니다.”

“박지훈이 조정철의 입을 계속 다물게 하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놈을 빼내야겠군요.”

“예. 조정철은 그걸 기대하고 일단 입을 다물었습니다.”

“박지훈이 조정철에게 그러라고 연락한 겁니까?”

박기정 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증거는 없습니다만, 쪽지를 전달하는 건 쉽습니다. 변호사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다른 편법도 있죠.”

“자백한 부하들은요?”

“조정철이 박지훈과 통화하거나 만나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답니다.”

“압수수색은요?”

“정황을 보면 박지훈이 따로 저지른 짓 같습니다. 고룡 엔터를 압수수색 해봤자 뭐가 나오긴 어려울 겁니다. 일반 회사가 아니라서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나오는 게 없으면 이후 수사만 어려워집니다.”

나강인도 혀를 찼다.

“쯧. 한 방에 다 쓸어버리려고 했더니.”

“제가 책임지고 수사해서 박지훈은 반드시 잡겠습니다. 다만, 그놈을 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

나강인이 피디 최진욱를 만났다.

“최 피디님. 소식 들으셨지요?”

최진욱이 활짝 웃었다.

“‘운명의 창’ 시사회가 곧 열린다는 거 말이죠? 물론 들었습니다.”

“어….”

나강인이 말한 건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 이야기였다.

AI 전지인이 의견을 냈다.

- 최진욱이 바보처럼 웃는 걸 보면, 최근 습격도 모르고 고룡 엔터 사장이 용의자인 것도 모르는 듯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나강인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서 같이 웃었다.

“오늘 오디션에 자리가 있으면 저도 구경 좀 했으면 하는데요.”

“당연히 있지요. 오신다고 하셔서 심사위원석에 자리를 마련해놨습니다.”

나강인은 지난번 한 번만 오디션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 때문이다.

최진욱이 설명했다.

“오늘 오디션 대상은 비중이 좀 있는 배역들입니다. 추천을 받거나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한 케이스죠.”

“이 드라마 오디션이 오늘 이후에도 또 있습니까?”

“주연급은 출연을 협의해서 정하니까 당연히 오디션이 없고요, 중요 배역 몇 개도 협의로 진행할 겁니다. 상황에 따라서 개인별로 비공개 오디션을 보는 경우는 있지만, 공개 오디션은 오늘이 끝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공개 오디션이라…. 그러면 지원자들의 소속은 알 수 있습니까?”

“심사에 들어가시면 이런 서류를 받으실 텐데요. 여기 지원자 경력 사항에 소속사도 적혀 있습니다.”

나강인이 서류철을 받아 휙휙 넘겼다. AI 전지인이 지원자 서류의 모든 내용을 실시간으로 저장했다.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고룡 엔터 소속 가수 두 명을 찾았습니다.

드라마 오디션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심사위원으로는 최진욱과 도주희, 나강인 외에도 방송국 간부 두 명이 더 참여했다.

나강인은 배우의 연기력 항목은 손대지 않았다. 대신에 운동능력 쪽을 주로 평가했다.

AI 전지인이 고룡 엔터 가수 두 명의 운동능력을 분석해 보고했다.

- 운동능력은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 하나만 보고 붙여줄 만큼도 아니며, 그 문제로 떨어뜨릴 정도도 아닙니다.

나강인이 점수를 매기며 말했다.

“그럼 심사위원의 판단이 중요하겠네.”

오디션이 끝난 후에 나강인이 최진욱을 따로 만나 물었다.

“합격 여부를 오늘 결정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지요?”

“물론이죠. 저희도 오디션 결과와 배역을 맞춰봐야죠.”

“배역을 맞춰볼 때도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유. 저희야 대환영이죠. 그런데.”

최진욱이 웃었다.

“흐흐흐. 이쯤 되면 우리 드라마에서 발 못 빼십니다?”

“물론이죠.”

“도 작가가 정말 좋아할 겁니다. 강인 씨가 안 도와주면 대본 다 뜯어고쳐야 했거든요.”

***

그날 저녁때 나강인이 SAH 엔터 구내식당을 찾았다. 그는 거기서 밥을 먹다가 신은하의 매니저 박우섭을 만났다.

박우섭이 식판을 들고 와서 앞자리에 앉았다.

“강인 씨는 우리 회사 식당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여기서 자주 보네요.”

“여기 밥이 맛있기도 하지만, 오늘은 박 실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를요?”

“예. 은하한테 물어보니까 오늘 박 실장님은 외부 스케줄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실 거라더군요. 그래서 밥 먹고 연락드리려고 했지요.”

“그냥 전화를 주시지요. 바로 왔을 텐데요.”

“개인적인 부탁이라서요.”

박우섭이 물었다.

“혹시 새 작품 이야기입니까?”

“예. 지금 준비 중인 드라마에서 배우들의 액션을 도와주기로 해서요. 계약 관련 서류 좀 부탁드리려고요.”

나강인은 그런 일은 그동안에도 박우섭에게 부탁해 처리했다.

박우섭이 웃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당연히 처리해드려야죠. 밖에서는 제가 강인 씨 파트 타임 매니저인 줄 안다니까요. 하하하. 그런데 무슨 드라마를….”

“최진욱 피디님과 도주희 작가님이 만드는 드라마인데요.”

박우섭이 젓가락을 들었다.

“아! 그거! 제목을 아직 못 정해서 가제만 나왔다던 그….”

“예. 그겁니다.”

“이야아. 거기 참여하시…. 어?”

박우섭이 멈칫했다. 나강인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드라마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얼마 전에 그 드라마에 강인 씨가 참여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요. 은하한테 물어보니까 그럴 리가 없다던데요.”

“원래는 안 하려고 했죠. 사정이 생겨서 맡게 됐습니다.”

“어? 그래요?”

“자꾸 왜 그러시는지?”

박우섭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은하가 이 사실을 압니까?”

“아뇨. 오늘 결정하고 서류처리를 부탁하려고 이리로 온 겁니다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은하는 방송국에서 홍보용 예능을 촬영하고 방금 회사로 돌아왔는데요.”

“어….”

“그리고요. 은하는 강인 씨가 그 드라마를 안 하는 줄 알고 출연할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만….”

때마침 신은하의 전화가 걸려왔다.

- 어디야?

“SAH 엔터 구내식당?”

- 그래? 다 먹지 말고 기다려. 내가 간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고 말했다.

“박 실장님은 방금 이야기 못 들으신 겁니다. 조금 있다가 제가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더 할 겁니다.”

박우섭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우리는 방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했으니까요.”

***

신은하는 식판을 들고 와서 나강인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나강인이 드라마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투덜댔다.

“영화 개봉하면 당분간 좀 쉬려고 했는데. 그리고 드라마는 스케줄이 되게 힘든데 말이야.”

나강인이 말했다.

“그치? 그럼 너는 나중에 TV에서 봐.”

“그래도 그 드라마를 찔러는 봐야 하지 않겠어? 여자 주연 자리나 주연 상대역 자리 정도는 줘야 출연할 거지만.”

그녀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오호호. 내가 이제 그 정도 급은 되거든?”

“어…. 그러냐?”

그녀가 매니저 박우섭에게 말했다.

“박 실장 오빠. 내가 맡을만한 배역이 남아있는지부터 확인 좀 해줘. 우리 이 드라마 하자.”

“흐흐. 나한테 맡겨두라고. KMTV랑 미팅 잡아야겠다.”

***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은 사장실에서 담배를 물었다. 그런데 라이터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려서 불을 붙이기 어려웠다.

“젠장.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룸살롱 사장 조정철이 체포됐다는 건 안다.

누군가 연예인의 집을 석궁까지 사용해 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 외부에는 구체적인 상황이 알려지지 않아 아직 기사화되진 않았지만, 범인들은 현장에서 줄줄이 잡혔다.

“내가 시켰다는 증거만 나오지 않으면 난 빠져나갈 수 있어.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잖아.”

문제는 조정철이다.

“조 사장이 증거를 숨겨놨으면 일이 꼬인단 말이야.”

조정철이 터트리지 않게 하려면, 입을 다무는 쪽이 더 이익이라고 믿게 해야 한다.

강남 룸살롱 사장인 조정철도 돈은 많다. 로펌은 조정철도 선임할 수 있다.

조정철이 입을 다물게 하려면 상대에게 없는 걸 제시해야 한다.

박지훈은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며 접대와 뇌물로 만든 연줄이 여럿 있다.

박지훈은 그가 가진 연줄을 최대한 동원하겠다고 조정철에게 제안했다. 조정철은 불구속은 물론이고 처벌도 집행유예나 벌금 정도로 끝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박지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다 망쳤어.”

그가 미국 진출을 위해 접촉한 브레드 밀러는 일이 실패하자마자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게다가 조정철은 연예계 진출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최도화의 드라마 진출도 박기훈에게 계속 요구했다.

박지훈이 담뱃불을 붙이려다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젠장!”

박지훈이 살려면 조정철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드라마 캐스팅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회사를 평소처럼 유지하려면 소속 가수 두 명도 그 드라마에 꽂아줘야 한다. 이미 배역 몇 개를 받아놨다고 큰소리쳤기 때문이다.

“환장하겠네”

그는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박지훈이 회사 간부들에게 물었다.

“오디션은 어떻게 됐어?”

드라마와 영화 출연을 담당하는 팀장이 말했다.

“오디션 결과를 가지고 누구에게 그 드라마의 어떤 배역을 줄지는 두 사람이 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피디와 작가죠. 거기에 스태프들의 의견이 들어갑니다.”

“여기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런데 갑자기 배역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한 명 추가됐습니다.”

“누군데?”

“나강인이라고 아십니까?”

고룡 엔터는 가수 전문 기획사다. 연기 파트는 가수를 붙잡는데 쓰는 보조팀 개념으로 운영한다.

그래서 연기 담당 팀의 규모는 팀장 포함 두 명뿐이다. 게다가 그 팀은 평소에는 다른 부서의 업무도 같이 한다.

그러다 보니 배우 업계의 잡다한 이야기는 어지간하면 회의 시간에 언급되지 않는다.

“아니. 몰라. 그게 누구야?”

박지훈이 조정철에게 나강인을 치워달라고 청부하긴 했지만, 그는 전면에 나선 적도 없고 현장에 간 적도 없다. 그래서 그는 나강인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도 모른다.

팀장이 설명했다.

“천만 영화 ‘햇살 좋은 날’과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던 드라마 ‘푸른 하늘’의 무술감독입니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무술감독을 맡기로 했답니다.”

박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술감독이 배우 선발에 어떻게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야?”

“그게 말입니다. 특정 배우를 뽑게 할 권한은 없지만, 액션이 안 맞는 배우를 떨어뜨릴 수는 있답니다.”

“어…. 그럼 우리가 미는 사람들은?”

“그 무술감독에게 찍히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박지훈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접대를 하든 기름칠을 하든 뭐라도 좀 하자. 나…. 누구라고 했지?”

“나강인입니다.”

“조만간 자리 한 번 마련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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