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개봉
나강인이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에게 물었다.
“나를 보자고 했다면서요?”
박지훈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요즘 뜨는 무술감독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식사라도 했으면 해서 자리를 마련했지요.”
박지훈은 남의 영화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운명의 창’ 시사회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
그는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의 차기작에 나강인이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자리를 마련했다. 목적은 접대이고, 나강인이 쉬워 보이면 돈 봉투를 줄 생각도 있었다.
나강인과 이런 자리에서 따로 만나기를 원하는 곳은 많았다. 주로 배우 쪽 기획사나 CF 회사들이 그를 보고 싶어 했다.
나강인은 평소에는 그런 제안을 거절했다. 어쩌다 보니 연예계 일을 자주 하긴 하지만 전문적으로 활동할 생각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박지훈을 직접 만나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박지훈은 나강인을 만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하직원에게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을 뿐인데 나강인이 나왔기 때문이다.
‘기획사 사장이 보자는데 신인 무술감독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
팀장도 나강인에게 만나자는 이메일을 보냈을 뿐이다. 그도 박지훈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나강인이 먼저 말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하하하. 그럴까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임무와 맛있는 식사를 한 방에. 오늘은 꿩도 먹고 알도 먹는군요.
나강인은 식사를 즐기면서 박지훈에게는 술을 많이 먹였다. 혼자 마시게 한 게 아니라 나강인도 같이 먹었기 때문에 상대는 의심하지 않았다.
같은 양의 술을 마셨다고 해서 똑같이 취하는 건 아니다. 그의 몸에는 지구연합군의 군용 신체 강화 기술이 들어있다.
- 요원님의 몸이 알코올을 분해하고 있습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도 분해하는 중입니다.
나강인의 해독 능력은 워낙 우수해서 술을 마셔도 거의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술을 먼저 마시면서 부지런히 권했다.
박지훈은 결국 취했다. 술에 취했다고 해서 결정적인 정보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자잘한 정보는 바람만 조금 잡으면 쉽게 튀어나왔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럼 미국 진출도 계획하신 거네요?”
“그렇죠. 유명한 가수의 복귀 공연에 우리 가수들이 나갈 겁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박지훈과 브레드 사이의 거래 조건을 알아냈습니다. 알레이나의 복귀 공연 참여입니다.
박지훈이 나강인을 만난 건 드라마 캐스팅 때문이다. 그는 그 이야기도 했다.
“이미 윗분하고 이야기가 다 되어 있습니다. 지금 무술감독님에게 우리 애들을 꽂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박지훈이 새끼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거면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 모셨겠죠. 감독님은 그냥 이미 정해진 대로 진행되게 놔두면 됩니다. 그러면 제가 나중에 잘 대접하겠습니다.”
박지훈은 술이 잔뜩 취해서 돌아갔다.
나강인이 멀어지는 차를 보며 말했다.
“박지훈은 말이야. 고룡에서 꽂은 사람들은 내가 방해만 하지 않으면 다 캐스팅된다고 생각해.”
- 떨어뜨리실 겁니까?
“최도화만.”
- 왜 최도화 하나만 고르신 겁니까?
“박지훈이 술에 취한 후에, 최도화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잖아. 회사 소속 가수들 이야기는 처음 한 번 하고 끝이었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겠냐?”
- 조정철이 입을 다무는 조건에 최도화가 포함되어 있군요.
“그러니까 최도화가 날아가면 조정철이 심리적으로 흔들리겠지. 왜? 합의가 깨졌으니까.”
***
알레이나가 이연지의 전화를 받았다.
“응. 연지야. 마침 전화 잘했다. 나도 하려고 했는데.”
- 언니. 기사 봤어요. ‘운명의 창’ 시사회에 갔다면서요?
“갔지. 이제 그 정도는 가도 되거든.”
- 와. 출연한 배우인 나는 시사회에 없었는데 언니는 초대받았어. 역시 팝스타.
“그러고 보니까 너는 왜 없었어? 배역이 작아서 박대받은 거야?”
- 아뇨. 저 고등학생이잖아요. 그 시간에 공부해야 했어요.
“아. 전교 1등. 성적을 유지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이연지가 작게 웃었다.
- 히히. 그게 아니라 그 전날 땡땡이치다가 걸렸거든요.
“너 땡땡이 자주 친다?”
이연지가 얼른 말을 돌렸다.
- 근데 영화는 어때요? 기사 나온 것처럼 좋아요? 전 완성본은 본 적 없어서요.
알레이나가 영화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그 영화 진짜 잘 만들었더라. 이야기도 좋고 영상도 좋고 다 좋아. 특히 액션은, 어휴. 진짜 실감 나더라.”
- 액션은 진짜로 싸우는 걸 찍은 거니까요.
알레이나가 눈을 껌뻑였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저도 액션은 두 번밖에 못 봐서 자세한 건 모르는데요. 진짜 싸우는 것처럼 찍던데요?
“아아. 실감 나게 찍었단 말이구나? 액션 대역들이 실력이 좋았나 봐?”
- 네? 우리 영화에는 대역 안 썼다고 들었는데요?
“응? 대역 없이 어떻게 그런 그림이 나와?”
- 무술감독 맡은 아저씨가 배우분들을 데리고 알아서 하던데요?
알레이나는 그녀의 말을 다르게 이해했다.
‘아! 배우들이 적당히 움직이면 나머지는 다 CG로 처리했다는 말이구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CG 업체 어디 썼어?”
- 에이.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전 단역이었는데요.
“그럼 누가 알까?”
- 음…. 감독님?
“그 영화의 감독하고 연락하는 건 부담스러운데….”
알레이나가 시사회 포토존에 서긴 했지만, 기사에는 사진만 많이 나왔지 딱히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면 김유찬이 출연한 영화를 알레이나가 전부 다 봤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가 변형찬 감독에게 따로 연락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만약 그녀가 변형찬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한다는 루머라도 나오면 일이 너무 커진다.
그래서 그녀는 감독에게 직접 연락할 수는 없다.
“알았어. 땡큐. 고마워. 끊어.”
- 아니, 언니! 잠깐!
“왜?”
- 오늘 학교에서 언니랑 안다고 말했더니요.
알레이나의 거처가 호텔로 바뀌고 공개활동을 하면서 비밀 유지 수준도 조금 낮아졌다.
“친구들이 사인해달라고 했구나? 알았어.”
- 그게 아니라….
“응? 그럼 너희 반?
- 전교생이….
알레이나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
알레이나가 미국에 전화를 걸었다.
벤자민이 전화를 받자마자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 알레이나 맞아? 이거 본인이 전화하는 거 맞지?
“응. 나야.”
벤자민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 알레이나! 네가 먼저 전화 준 게 몇 달만인지 알아?
“몰라.”
- 너무해!
“어떻게 지내?”
- 네가 없는데 잘 지내겠어?
“뭐래. 나랑 상관없이 잘살잖아.”
벤자민은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알레이나의 친구다.
“일 하나 부탁하려고 전화했어.”
- 말만 해. 뭔데? 누구 머리에 총알 박아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
“내가 영화를 한 편 봤는데, 액션이 진짜 장난이 아니야. CG 처리를 어찌나 잘했는지 어색함이 하나도 없고, 액션이 진짜로 싸우는 것처럼 잘 나왔어.”
- 그런 영화가 있었어? 언제 나온 영화야?
“아직 개봉 안 했어. 그러니까 그 영화사에 문의해서 CG 업체 좀 알아봐 줘.”
- 응? CG 업체는 왜?
“‘스파이 셰프’는 액션만 좋았어도 그렇게 망하진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내가 다음에 출연하는 영화에 그 업체 소개해주려고. 그러려면 뭘 어떻게 한 건지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벤자민의 목소리가 상기됐다.
- 어? 다시 활동하는 거야! 그런 거야? 알레이나! 알라뷰!
“닥쳐.”
- 알리뷰는 뺄게. 그거 너한테 배운 말인데 빼라면 빼야지. 어쨌든 복귀하는 거 맞지?
“지금 당장 활동을 재개할 건 아닌데, 나중에라도 하긴 해야 하잖아?”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 알레이나. 흑. 난 네가 영원히 은퇴하려는 줄 알고 걱정 엄청 했어.
“뭐래.”
-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네 목소리가 얼마나 밑바닥에 깔려있었는지 알아? 그러다 너 어떻게 되는 거 아닌지 진짜 걱정했다고.
그녀는 그때만 해도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시한부 인생인 줄 알았다. 외부 활동을 하다 발작이 일어나면 죽을 수도 있어서 돌아다니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처진 기분과 몸조심해야 하는 상황이 겹치다 보니 아예 집 밖에 나가는 날이 드물었다.
그때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경우도 드물어서 매번 벤자민이 전화해야 했다.
그러니 그때 전화통화 목소리가 좋았을 리가 없다.
“벤자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얼른 그 CG 업체부터 알아봐.
- 맡겨 달라고!
“아. 조용히 알아봐. 괜히 내 복귀 소식이 흘러나가서 좋을 건 없어. 나 복귀할 때까진 조용히 지내고 싶어.”
- 알았어! 내가 그냥 문의하는 척하면서 물어볼게.
“그리고 브레디 밀러 말인데.”
- 그 개자식이 왜?
“지금 한국에 있어. 내 스마트폰에 위치추적 악성코드를 심어서 따라왔더라고.”
- 그 새끼 내가 진짜 가만 안 놔둔다. 알레이나. 네가 부탁하면 내가 그 새끼한테 총알을 박아줄 수도 있어.
“너 총 쏠 줄 모르잖아.”
- 이제부터라도 배워서…. 어? 잠깐. 알레이나!
“왜?
- 너도 지금 한국이야?
“응.”
- 내가 간다!
“오지 마. 넌 거기서 일해. 난 여기서 꽤 오래 쉬다가 갈 거야.
- 어차피 나도 지금 당장은 한국에 못 가. 흐흐흐. 알레이나. 밝은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CG 업체가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보고 나서 연락 줘.”
- 나만 믿으라고. 그 영화를 어느 영화사에서 만든 건지만 보내 줘.
***
이튿날 THO 엔터 직원이 미국에서 온 이메일을 확인했다.
“어? 팀장님. 할리우드에서 ‘운명의 창’ 문의가 왔는데요?”
팀장은 당황했다.
“응? 설마 아직 개봉도 안 한 영화를 먼저 알아보고 수입하겠다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라요. CG를 어느 업체에서 맡았냐는데요?”
“CG? ‘운명의 창’에 CG가 들어갔어?”
“간단한 거 살짝 들어가긴 했죠. 액션 같은 거 말고, 배경 지워야 할 때 몇 번 썼다던데요.”
“나도 그렇게 들었거든. CG는 그게 다였는데 왜 어느 회사에서 했는지 물어봐?”
“저도 모르죠. 어떻게 할까요?”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장난 이메일은 아니지?”
“이메일 주소 확인해봤는데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사람 맞더라고요.”
“그래? 그럼 CG 업체 이름 그냥 알려줘. 나중에 우리가 할리우드 상황 물어보면 그쪽에서도 대답해주겠지.”
***
영화 ‘운명의 창’이 개봉됐다.
운명의 창 OST는 곽찬석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프프걸스가 불렀다.
영화 개봉과 동시에 OST도 발표됐다.
프프걸스 네 명은 음원 사이트부터 확인했다.
막내 최지혜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떴다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던 다른 세 명도 얼른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곽찬석은 OST로 쓸 노래 한 곡을 작곡한 후에, 각 상황에 맞는 다양한 편곡 버전을 추가로 만들었다.
최지혜가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우리 노래 잘 되겠지? 응? 잘 되겠지? 순위도 막 팍팍 오르겠지?”
리더 소지영이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
“야. 그러다 모니터 넘어가. 뒤로 와서 봐.”
****
예고편과 시사회 기사를 본 사람들이 첫날 영화를 예매했다.
감독은 신인이라 티켓 파워가 없지만 주인공을 맡은 김유찬은 팬이 많았다. 그의 팬들도 영화관을 많이 찾았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첫날 영화를 본 사람이 글을 올렸다.
[‘운명의 창’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 재미있나요?
- 쩝니다.
- 예고편은 저도 봤는데 액션이 멋있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예고편이 다는 아니겠죠?
- 예고편보다 본편이 더 쩝니다.
- 혹시 액션만 좋은 건가요?
- 이 영화는 그냥 다 좋습니다.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글도 올라왔다.
[내가 예언하는데, 이 영화 칸에 갈 겁니다.]
본문에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칭찬만 있었다.
- 그 정도인가요?
- 뭘 상상하든 그 이상입니다.
-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글이 올라오니까 나도 보러 가고 싶네요.
- 주인공 김유찬은 어떤가요?
- 잘생겼습니다.
김유찬의 매니저가 옆에서 말했다.
“야. 네가 그런 글 올리는 거 남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냐?”
김유찬은 당당했다.
“왜? 난 진심으로 한 말이야. 난 ‘운명의 창’으로 칸에 갈 거야. 가서 상도 탈 거야. 이 명작영화는 칸에 가는 게 운명이야.”
“아니, 그거 말고. 댓글로 너 잘생겼다고 쓴 거.”
“응? 사실이잖아.”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