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의심
이튿날, 체포된 조정철이 있는 곳으로 부하가 면회를 왔다.
조정철이 목소리를 낮춰서 지시했다.
“고룡 엔터 가수들도 KMTV의 그 드라마 오디션을 봤을 거야.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
부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예? 제가요? 그런 건 원래 부장님이나 실장님이….”
“여기 지금 나만 잡혀 있냐? 걔들은 안 잡혀 있어?”
“아…. 예.”
“그러니까 네가 좀 알아봐. 돈이 필요하면 아끼지 말고 써. 나중에 이자 쳐서 돌려줄 테니까.”
“예? 제가 돈이 없….”
“이 새끼가! 없으면 빌려! 이자 쳐준다고 했잖아!”
***
이튿날 나강인이 KMTV 최진욱 피디를 다시 만났다.
최진욱이 자랑했다.
“제가 국장님을 만나서 담판을 지었습니다. 이제 고룡 엔터에서 아무리 항의해도 최도화가 우리 드라마에 나올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고룡 엔터의 가수 두 명은요?”
“그 두 사람에게는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연락했습니다. 그 정도는 해줘야 고룡 엔터도 이해하겠지요.”
그러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나강인이다.
나강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혹시 드라마에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요.”
“아유.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차. 그게 남아있구나.”
“그거라니요?”
“최도화가 빠졌다고 해서 배역 자체를 없애버리면 대본을 또 고쳐 써야 하는데, 그러면 도 작가가 절 죽일 겁니다. 그러니까 최도화 대신에 누군가를 넣어야 하잖습니까?”
“그렇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그 빈자리에 강인 씨가 적당한 사람을 추천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 누굴 대신 꽂으려고 정보를 준 게 아닙니다만?”
룸살롱 사장 조정철이 체포됐다는 것과 거기에 최도화도 엮여 있다는 건 나강인이 알려주었다.
“알지요. 강인 씨가 꽂으려고 했으면 겨우 그런 자리가 문제겠습니까? 그런 게 아닌 거 다 압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저한테?”
“이번에 도움도 받았으니까, 강인 씨 주변 분을 넣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음….”
나강인이 아는 배우 중에 그런 자리에 맞는 사람은 이연지밖에 없다. 그런데 이연지는 이미 꽤 괜찮은 배역을 본인의 힘으로 차지했다.
“딱히 없는데….”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최진욱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시선도 슬쩍 피하고 있습니다. 수상합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냥 진짜 이유를 말해보시죠.”
최진욱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은요. 그 배역이 저희도 좀 찜찜해져서요. 새로 넣은 배우에게 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그러니까 징크스 같은 거죠.”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21세기에 징크스를 믿으시네요.”
“시청률 잘 나오라고 고사를 지내는 게 이 바닥인데 징크스 하나 없겠습니까? 하하하. 이럴 때는 징크스를 누를 정도로 기운이 강한 분이 딱 찍어주시면 좋지요.”
“그런 거면 그냥 부적이라도 쓰시지.”
“어? 부적도 쓸 줄 아십니까?”
“농담입니다.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
나강인이 피시방에 들렀다.
신은하는 직원 휴게실에서 영화 ‘운명의 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간 알바 윤아름이 신은하의 앞에 탄산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씨. 탄산수 드세요.”
“탄산수의 산지가 어떻게 되느냐?”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암반수에 순수한 이산화탄소를 녹였사옵니다.”
“마음에 드는구나. 맑고 투명한 잔에 따라보거라.”
나강인이 휴게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너희들 뭐하냐?”
윤아름이 웃었다.
“‘운명의 창’ 여주인공님하고 상황극 좀 해봤죠. 이런 거 아무나 못 한다고요.”
“어…. 그래. 그런데 네 연기력이.”
윤아름이 물었다.
“잘해요?”
“넌 연기 하지 마라.”
“쳇.”
신은하가 끼어들었다.
“연기는 은서가 잘하지.”
나강인이 물었다.
“응? 은서가 연기를 알아?”
“걔가 옛날에는 배우가 꿈이었거든.”
“어…. 그래?”
“그런데 강인 오빠는 어디 갔다 와?”
“최진욱 피디님 잠깐 만나러.”
신은하가 얼른 손바닥으로 휴게실 의자를 탁탁 쳤다.
“이리 와서 냉큼 앉거라! 와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상세히 고하거라!”
“너 눈빛이 수상하다.”
신은하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내가 최 피디님 차기작 주연에 도전 중인 거 알아?”
“주연 자리는 경쟁이 치열하던데?”
그녀가 손바닥으로 이번에는 탁자를 두드렸다.
“알면 좀 도와줄 생각을 해!”
나강인이 손을 들었다.
“난 힘 없다.”
“있을 것 같은데!”
어느새 피시방 교대시간이 됐다. 윤아름이 업무를 인계받았다. 일이 끝난 차은서는 휴게실로 들어왔다.
나강인이 차은서에게 물었다.
“너 배우가 꿈이었냐?”
그녀가 슬쩍 웃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이야기예요. 이제 아니죠.”
“왜 그만둔 건데?”
“현실을 안 거죠.”
“구체적으로 말해봐.”
“음….”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바닥은요. 자기가 예쁜 줄 아는 애 백 명이 도전하면, 한 열 명쯤 TV에서 대사 몇 줄이라도 말해보고, 그중에 한 명 정도가 배우로 살아남더라고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저는 한 명은커녕 열 명에도 못 들더라고요. 세상에는 저보다 예쁜 데다가 연기까지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요. 그걸 깨닫고 일찍 포기했죠.”
나강인이 신은하를 돌아보았다.
“은하와 보라는 너랑 한 동네 살았다며. 그런데 쟤들은 배우로 살아남았잖아.”
차은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언니들이 제가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예요.”
신은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내가?”
“언니들은 우리 동네가 아니라 우리 지역에서 최강이었어요. 미모와 연기력, 연예인의 끼. 위아래 몇 년씩 찾아봐도 우리 지역에서는 경쟁상대가 없는 사람이 두 명이나 한동네에서 나왔어요.”
신은하가 머리카락을 휙 넘기며 자랑했다.
“내가 좀 잘나긴 했지?”
“그런데 그런 언니들이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조연이나 단역만 하더라고요.”
“으응? 아니, 뭘 그때 이야기를….”
“저는 그때 깨달았어요. 아. 언니들이 백 층 탑의 구십 층에서 헤맬 정도면, 난 반도 못 올라가 보고 밑바닥으로 떨어지겠구나.”
“그, 그랬어?”
“그래서 관뒀어요. 언니들을 보니까 그 세계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져서.”
나강인이 차은서를 가만히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보였다.
나강인이 물었다.
“미련은 남지?”
차은서가 살짝 웃었다.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대사는 거의 없지만 얼굴은 좀 나오는 배역이 하나 있는데, 도전해볼래?”
반달 형태로 웃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네?”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비어 있는 자리야.”
“제가 그런걸….”
신은하가 부추겼다.
“해! 해봐! 좋은 경험이잖아!”
윤아름이 휴게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은서 언니가 안 하면 제가 할게요!”
나강인이 말했다.
“아름아. 대사가 거의 없지만 있긴 있어. 넌 국어책을 읽어서 안 돼.”
“우앵.”
차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해도 될까요?”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사람을 추천하기로 했는데, 국어책 전문가 아름이를 시킬 수는 없잖아. 너밖에 없다.”
차은서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신은하가 얼른 말했다.
“강인 오빠는 추천을 해주는 거지 꽂아주는 게 아니야. 기회를 잡으려면 당연히 기본 연기력은 있어야 해. 옛날에 연기를 조금 배운 거로는 부족해. 지금부터 나한테 속성으로 훈련받아.”
“언니는 요즘 영화 홍보로 바쁠 텐데….”
신은하가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보라한테 톡을 보냈더니 당장 온대. 우리한테 배우면 너 그 배역 딸 수 있어.”
신은하와 차은서가 피시방을 나갔다.
나강인은 그의 고정석으로 걸어갔다.
알레이나가 자주 이용하던 자리가 보였다.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강인은 고정석에 앉은 후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연예인으로 성공하기는 참 어려워.”
- 제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모든 문화예술계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문이 생겼어. 연지 말이야. 걔는 어떻게 연예인으로 성공했을까?”
- 단역 출연은 요원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번 드라마는 연지가 혼자 힘으로 괜찮은 배역을 땄잖아. 걔는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말이야.”
- 이연지는 연기에 재능이 있습니다.
“연지는 땡땡이를 자주 치는데도 전교 1등이잖아. 공부에도 재능이 있지.”
- 그렇습니다.
“저번 오디션 때 보니까 운동에도 재능이 있더라.”
- 이연지는 다재다능합니다. 요원님. 그게 왜 의문이십니까?
“연지는 네 초기 메모리에 이름이 없지?”
- 요원님과 제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이연지는 올해 안에 사망할 예정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 제 초기 메모리에 이름을 남기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런데 말이야. 수연이는 이름이 있잖아.”
- 권수연은 이라미드 태양전지의 최초 개발자입니다. 이라미드는 2082년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연지가 수연이 정도 나이가 되면, 걔도 이름을 남길지도 몰라.”
- 이연지의 다양하고 우수한 재능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알레이나도 그래. 음반을 낼 때마다 빌보드 상위권에서 노는 팝스타에, 영화계에서도 활약하잖아.”
- 알레이나는 음악과 연기 양쪽에 재능이 있습니다만, 제 초기 메모리에 이름을 남길 정도는 아닙니다.
“알레이나도 병 때문에 모든 활동을 중단한 상태야. 비밀 수술을 받지 못하면 여기서 끝이야. 그래서 이름이 없는 거야.”
그 수술은 지금도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
“비밀 수술이 성공해서 완치되면 알레이나는 앞으로 활발히 활동하겠지? 어쩌면 인류의 문화예술에 크게 이바지할지도 몰라. 너한테 이름을 남길 정도로.”
-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 셋 다 희귀한 병인 케이타이거 증후군 중증 환자야. 살아있으면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재능을 가진 세 사람이 하필 그 병에 걸렸어.”
나강인이 혼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정호 과장님이 그랬지. 케이타이거 증후군은 평범한 병이 아니라 저주가 아닐까 싶다고. 나도 이제 슬슬 그런 생각이 든다.”
***
나강인이 차은서를 추천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배역이 확정되는 건 아니다. 연기가 안 되는 사람에게 배역을 줄 수는 없다.
신은하와 이보라는 미리 제공된 대본을 가지고 차은서를 속성으로 가르쳤다.
최진욱과 도주희는 차은서를 따로 만나 비공개 오디션을 보았다.
오디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차은서에게 나강인이 물었다.
“어땠어?”
그녀가 활짝 웃었다.
“좋았어요. 아. 잘 봤다는 게 아니라, 오디션을 보는 거 자체가 좋았어요.”
“다행이네.”
“고마워요.”
“아직 붙은 거 아니다. 결정은 저 안에 두 분이 하는 거라서.”
차은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요. 제가 너무 높은 곳만 보고 포기했구나 싶어서요. 그냥 일하다가 이번처럼 작은 역할에 도전해보는 것도 참 좋은데 말이죠.”
“음…. 그렇지?”
“물론 본격적으로 하지 않으면 작은 역할조차 맡기 어렵지만요. 이번에는 강인 오빠 덕분에 오디션이라도 봐서 좋았어요.”
“이번에 잘하면 다음에 기회가 또 생기겠지.”
***
비공개 개인 오디션을 마친 후에 최진욱이 도주희에게 물었다.
“차은서 말이야. 얼굴은 그만하면 나쁘지 않지?”
“최도화만큼 예쁘진 않지만, 그 배역을 못 할 정도는 아니야.”
“연기력도 짧은 대사를 처리할 정도는 되고.”
“일반인이라고 들었는데, 어디서 연기 배운 티가 꽤 나더라고.”
“그럼 결정할까?”
“난 찬성.”
“나도.”
***
피시방에서 차은서를 위해 낮 근무 땜빵을 해준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말했다.
“오늘 은서 누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아.”
야간 알바 윤아름이 손뼉을 쳤다.
“우리 피시방은 손님도 연예인인데 이제 직원까지 연예인이야. 와아. 이러다 피시방에 연예인 보러 오는 손님이 많아져서 일이 폭발하는 거 아냐?”
안성환이 말했다.
“그럼 사장님이 알바를 더 뽑겠지. 어차피 은서 누나가 드라마 찍으려면 단기 알바가 필요하잖아.”
“그 알바는 네가 하는 거 아녔어?”
“난 낮에는 학교 가야지.”
“아. 맞다.”
안성환이 잔소리를 했다.
“아름아. 너는 네가 대학생이라는 걸 자꾸 까먹는 거 같다. 낮에는 너도 학교 가야 하거든?”
***
‘운명의 창’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THO 엔터는 상영관을 서둘러서 늘렸지만 관객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보려는 사람은 많은데 상영관은 부족해서 연일 매진 사태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반응은 KMTV에서 새로 준비 중인 드라마에도 영향을 끼쳤다.
신은하와 오세나가 방송국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를 만나러 왔다.
오세나가 신은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너도 이 드라마 주연 자리를 노린다며?”
신은하가 도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언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주인공 맡겠다고 한 건 아니?”
“알죠. 이 드라마 주인공 노리는 사람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요?”
“네가 내 상대가 되겠니?”
“이번엔 될 것 같은데요?”
신은하가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제가 바로 ‘운명의 창’ 여주인공이니까요. 요즘 제일 뜨거운 영화의 여주인공이 새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는다? 그림이 좋잖아요.”
오세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말했다.
“은하 너 많이 컸다?”
신은하가 상체를 대놓고 흔들었다.
“원래 컸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