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간단한 도면
신은하는 영화 ‘운명의 창’ 덕분에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런 인기는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동안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면 그 혜택을 그녀의 차기작도 나눠 받는다.
그 정도면 드라마 제작진이 탐낼 만한 조건이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강했다.
신은하가 떠오르는 스타라면 오세나는 이미 히트작을 많이 보유한 전통적인 스타다. 신은하도 오세나와의 주연 경쟁이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녀가 오세나에게 말했다.
“누가 주연을 맡을지는 뚜껑 열어봐야 하는 거예요.”
오세나가 말했다.
“네가 ‘운명의 창’ 덕분에 많이 뜬 건 알아. 그런데 말이야. ‘운명의 창’이 대박 난 게 너한테 좋기만 한 거 같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는 우리 영화에 안 나오잖아요. 언니한테는 좋을 게 없을 텐데?”
오세나가 피식 웃었다.
“너 이제 보니까 정보력이 좀 약하구나?”
“소문보다 연기에 집중하는 거라고 해줘요.”
“‘운명의 창’이 뜬 이유는 두 가지야.”
오세나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V를 만들었다.
“감독이 영화를 정말 잘 만들었고, 액션이 진짜 좋았지.”
“왜 당연한 소리를 하실까?”
오세나가 중지를 접었다.
“감독이 당장 차기작을 만들 리는 없는데.”
그녀가 검지를 앞뒤로 살짝 까닥였다.
“액션은 이야기가 다르지. 그 영화가 성공한 원인 중 하나인 무술감독이 차기작을 바로 들어가네?”
신은하도 이제야 문제를 깨달았다.
“어?”
“그런데 그 무술감독이 어쩌다 한 번 떴어? 아니지. 천만 영화 ‘햇살 좋은 날’의 무술감독이고, 투입된 중반부터 시청률이 쭉 올라간 드라마 ‘푸른 하늘’의 무술감독이기도 하지.”
“잠깐만요.”
“그리고 벌써 칸에 갈 거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명품 영화 ‘운명의 창’까지. 삼연타로 홈런을 쳤네? 그러면 강인 씨가 들어가는 다음 작품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 되잖아?”
신은하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경쟁자가 늘었다는 거예요?”
“늘어난 정도겠어? 지금 캐스팅이 왜 늦어지는 거 같아? 원래는 들어올 계획이 없던 거물급 배우 몇 명이 이 드라마를 노리고 있어.”
“여주인공 자리를 노리는 주연급 도전자가 더 있는 건 알거든요?”
“그거 말고. ‘운명의 창’까지 대박이 나니까 움직인 배우들이 있어.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나한테도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야.”
신은하는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
오세나 하나도 상대하기 힘든데, 동급인 경쟁자가 몇 명 더 생기면 일이 너무 어려워진다.
오세나가 손가락으로 신은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 지금은 너랑 나랑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손잡고 그 사람들을 쳐내도 부족할 판이라고.”
신은하가 얼른 말했다.
“그럼 우리 손잡죠? 밥상 다 차려지고 나니까 숟가락만 들고 오는 사람들은 쳐내야죠.”
오세나가 씩 웃었다.
“당분간 휴전이다?”
“물론이에요.”
오세나가 슬쩍 제안했다.
“그럼 강인 씨하고 자리 좀 마련해줘. 이 사태의 원인인 강인 씨부터 공략해야….”
신은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악수라도 하려고 내밀던 손을 얼른 내렸다.
“아니,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까 손잡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응? 야! 안 잡아먹어!”
“개가 똥…. 아, 아니에요.”
***
블로거 박난정이 그녀의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의 댓글을 보며 뿌듯해했다.
“어머나. 독자 늘어난 것 좀 봐.”
그녀는 나강인이 나무에 매달린 아이를 구하는 모습, 교통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불이 막 시작된 가게에서 소화기로 불을 끄는 모습을 연달아 촬영한 적이 있다.
일부러 나강인을 쫓아다니며 찍은 건 아니다. 그저 그날 그때 나강인과 동선이 겹쳤던 것뿐이다.
그녀는 그날 바로 블로그에 그 사진들을 올렸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 나강인의 얼굴은 찍지 못했다. 어차피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촬영했어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블로그에 올라간 사진은 모두 뒷모습뿐이다.
그래도 그 글의 반응은 좋았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그녀의 블로그로 그 글을 보러 유입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녀가 추가된 댓글을 읽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근데 누군지도 모르잖아. 그 나무가 있는 동네를 열심히 돌아다녀도 안 보이는데.”
그녀는 그러다 묘한 댓글을 하나 발견했다.
- 예전에 올리신 너튜브 영상에 나오는 모창 가수 있잖아요. 이 사람이 그 사람 아니에요? 뒷모습이 되게 비슷한데요?
나강인이 교차로에서 정신을 차린 날, 그는 피시방 이용료를 벌려고 길거리에서 모창을 잠깐 했다. 그때 그녀가 그 영상을 찍었다. 그때도 뒤쪽에서 찍어서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런 후에 블로그의 사진과 비교했다.
“어? 진짜 비슷하네?”
입고 있는 옷은 달랐지만, 뒷모습이 굉장히 비슷했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 이 영상을 찍은 동네도 가볼까?”
***
나강인은 유나린 박사를 만나러 한국대학교에 갔다.
“여기는 올 때마다….”
- 뭔가 기억이 나십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이 학교에 다닌 거 맞나?”
-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이 학교에 들어올 정도로 공부를 잘했겠지?”
- 그 부분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강인은 먼저 권수연을 찾아갔다.
권수연이 활짝 웃으며 나강인을 반겼다. 그의 손에는 홍삼 세트가 들려 있었다.
“어머. 강인아. 뭐 이런 걸 사오고 그래.”
“이건 다른 사람 거야.”
“응?”
“연구 더 열심히 하라고 주는 거라서 넌 먹으면 안 돼. 넌 열심히 하지 마. 쉬면서 해.”
“그럴까? 그럼 오늘은 일찍 퇴근할까?”
AI 전지인이 반대했다.
- 이라미드 태양전지를 연구하는 권수연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권수연의 연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난 만날 사람이 또 있어서 이만. 넌 학교에 온 김에 얼굴이나 보러 들른 거야.”
“쳇. 그럼 나도 더 일할 거야.”
- 더 하라고 하십시오. 홍삼도 반쯤 나눠주십시오.
***
나강인이 유나린 박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연구실에 있었다.
유나린은 살짝 놀랐다.
“앗! 나강인 씨!”
나강인이 홍삼 세트를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어머. 더 열심히 일하라고 사오셨나 보다. 그러다 저 죽어요.”
“그래서 반만 담았습니다.”
“네?”
유나린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커피믹스처럼 생겨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홍삼 엑기스가 반만 담겨 있었다.
“설마 어디 다른 데 돌리고 남은 걸 주는 건 아니죠?”
절반은 권수연에게 줬다.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연구에 성과가 좀 있다면서요?”
유나린의 눈이 반짝였다.
“네. 이쪽으로 와보세요.”
그녀가 모니터를 통해 영상을 몇 개 보여주었다.
“일단 이론을 먼저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실험하다가 가능성이 보이는 구조와 물질을 몇 개 찾아냈어요.”
영상 속에서 일종의 섬유가 전기 자극을 받으면 수축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런 영상이 네 개가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저 섬유를 많이 만들어서 하나로 모으면 전기 신호에 반응하는 인공 근육이 되겠군요.”
“저건 사람의 몸속에 심을 수 없지만요.”
“상관없습니다. 인체 외부에 장착하는 의수나 의족에 사용할 거니까요.”
“그래서 이대로 진행하려고요.”
“연구가 얼마나 진척된 겁니까?”
유나린이 웃으며 말했다.
“네 개 다 아직은 가능성만 찾은 거예요. 전기를 흘리면 수축하는 소재는 기존에 나온 것도 많아요. 저것도 저대로는 못 써요. 인공 근육으로 쓰려면 성능은 기본에 에너지 저장능력도 있어야 하니까요.”
“에너지 저장이라….”
“순간적으로 강한 힘이 필요할 때는 외부 공급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해요.”
“정말 근육과 비슷한 걸 만드시는군요. 그래서 네 개를 다 연구하실 건가요?”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보내주시는 연구비가 많긴 하지만, 저걸 넷 다 동시에 연구하는 건 무리예요. 그러다 저 죽어요.”
“아, 네.”
“성공 확률이 높은 것부터 하나씩 연구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에요.”
“음…. 제가 연구 자료를 좀 봐도 될까요?”
“그럼요. 투자자신데.”
나강인이 모니터 앞에 앉아서 연구 자료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AI 전지인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2082년에는 여러 가지 타입의 인공 근육이 있다고 했지?”
- 그렇습니다.
“그중에 유나린 박사가 만든 타입도 있고?”
- 그렇습니다.
“이 자료들을 보고 어느 게 그거인지 구분할 수 있냐?”
- 요원님이 봐서 모르는 자료는 저도 알기 어렵습니다. 저나 요원님이나 어려운 논문을 이해하는 능력은 비슷합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
나강인이 자료를 빠르게 넘겼다.
AI 전지인은 문서를 읽는 속도가 기계처럼 빠르다.
잠시 후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2번째 샘플의 예상 성능 특징이 제 기록상의 타입과 유사합니다.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정도면 됐다.”
나강인이 유나린에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2번 소재가 제일 유력하군요.”
유나린이 손뼉을 쳤다.
“어머. 저도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근거는 없지만 뭔가 감이 좋았거든요. 우린 통하는 게 있나 봐요.”
“다행이네요.”
유나린이 물었다.
“통하는 게 있어서 다행인 거죠?”
“아뇨. 이걸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입니다. 이걸 연구하면 성공할 것 같거든요.”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2번 소재에 대해 조언해줄 게 있냐?”
- 인공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은 몇 가지 압니다만, 인공 근육 제작 기술은 아는 게 없습니다.
“혹시나 했다.”
나강인이 유나린에게 말했다.
“의수의 기본 설계도를 곧 보내드릴 테니까 저걸 연구할 때 그것도 고려해 주시죠.”
“당연히 그래야죠.”
***
나강인은 서울 외곽의 제작 거점으로 이동했다.
“지인아. 의수 설계도 가진 거 있지?”
- 전장에서 쓰는 대용품의 기본 설계도는 있습니다.
“띄워봐.”
AI 전지인이 허공에 도면을 띄웠다.
나강인이 그걸 보며 지시했다.
“외피는 빼버려. 추가되는 보조 부품들은 이름은 지우고 기능만 적어.”
- 같은 사양의 부품이 지금 시대에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부품은 오메가테크가 알아서 찾겠지. 정 없으면 대체품이라도 구하거나 비슷한 걸 만들기라도 하겠지.”
- 알겠습니다.
“인공 근육도 기본적인 형태만 남겨. 너무 디테일하게 표현하면 유나린 박사의 연구에 오히려 방해될 거야.”
허공에 표시된 3D 도면이 조금씩 변했다. 잠시 후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말씀하신 부분을 모두 적용했습니다.
“이제 컴퓨터로 설계도를 만들자.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손을 빌려 컴퓨터를 조작했다. 도면 작성 프로그램은 드래곤 플레이트를 설계할 때 쓰는 것을 사용했다.
이건 새로 설계하는 게 아니라 AI 전지인의 데이터에 들어있는 것을 컴퓨터로 옮기는 것뿐이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을 빠른 속도로 움직여 도면을 완성했다.
- 설계도 작성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의수 대체품을 제작하려면 신경 신호 전달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 기술은 오메가테크가 열심히 연구하고 있잖아.”
나강인이 오메가테크의 사장 스칼렛 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칼렛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나강인! 바쁘신 분이 어쩐 일이에요?
“개발에 진전이 있나 해서요.”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 오호호홋. 우리 쪽은 기존에 개발해둔 기술을 다시 연구해서 성과를 꽤 냈어요. 강인 씨는 어떻게, 도면에 선이라도 좀 그었어요?
나강인이 마우스 버튼을 클릭했다.
“지금 이메일로 간단한 설계도면 하나 보내줄 테니까 오메가테크에서 제작할 수 있는지 검토해줘요.”
- 훗.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시네. 우리가 못 만들면 다른 어디서도 못 만들어요.
“이메일부터 확인해요.”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
스칼렛은 그날은 연락이 없었다.
이튿날 나강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스칼렛 켈리였다.
나강인이 전화를 받았다. 스칼렛이 소리를 질렀다.
- 이거 도대체 뭐예요!
“왜요? 도면이 이상합니까?”
- 드래곤 플래이트를 만들 때 알아보긴 했는데 역시 천재였어!
“설계도가 괜찮았나 보군요.”
- 판타스틱해요! 아니, 어떻게 이런 개념을 생각해내서 이렇게 적용했대요? 우리 엔지니어들이 경악했어요!
“음…. 만들 수는 있지요?”
나강인은 그게 걱정이다.
그가 보내준 건 전장에 버려진 낡은 부품을 긁어모아 만드는 의수 대용품의 도면이다. 그런데 그 대용품이 만들어지는 곳은 2082년의 전장이다.
아무리 대용품 수준이라도 현재 기술로는 제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스칼렛이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가능할 거예요. 그전에 우리 기술을 좀 더 보완해야 하지만요. 지금 엔지니어들이 흥분해서 어떻게든 만들어내겠대요.
“다행이네요.”
- 근데요. 여기 들어가는 부품 몇 개는 스펙이 너무 높은데, 그걸 개발하는 것도 도와줄 건가요?
AI 전지인은 그런 부품은 만들 줄 모른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 정도는 직접 해결해요.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