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53화 (253/411)

253. 절벽

나강인이 차를 몰고 충청도로 향했다.

목적지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산속에 있었다. 그곳까지 도로는 제대로 뚫려 있었다.

스마트폰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목적지 주변에 도착했습니다.

나강인이 길가 공터에 차를 주차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목적지를 보았다.

절벽부터 눈에 들어왔다. 절벽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벽면은 거의 수직으로 서 있었다.

“누군지 나중에 경치 참 곳에 연구소를 만들겠구나.”

AI 전지인이 말했다.

- 경치는 좋은데 태양에너지 연구소가 없습니다.

“알아. 2082년의 연구소가 지금 있을 리는 없잖아. 별로 기대 안 했어.”

그는 2082년 기준으로 중요 시설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서, 지금 시대의 해당 위치에 뭔가 단서가 있는지 조사하곤 했다.

아직 성과는 별로 없었다.

지금 그가 보는 곳에는 원래 태양에너지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곳은 비어 있었다.

대신에 조금 옆쪽에 다른 건물이 보였다.

나강인이 그 건물을 보며 물었다.

“저 건물은 새로 지었나 본데? 저게 태양에너지 연구소는 아니지?”

- 위치가 다릅니다.

“근데 저건 아직 다 지은 게 아닌가? 아니면 추가 공사를 하는 건가? 옆에 뭔가 더 짓고 있잖아.”

- 그곳도 태양에너지 연구소의 위치가 아닙니다.

AI 전지인이 초기 데이터에 들어있는 기록을 이용해 지형과 건물 모습을 3D 이미지로 합성했다. 그런 후에 그 3D 이미지를 AR렌즈를 통해 허공에 띄웠다.

- 태양에너지 연구소는 저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연구소 위치가 살짝 다르긴 한데…. 음?”

이상한 게 있었다.

“지인아. 실제 지형 위에 3D 사진을 겹쳐봐.”

곧바로 3D 지형 이미지가 실제 지형과 겹쳐졌다.

나강인이 반투명한 지형 이미지와 지형이 겹쳐진 부분을 보며 물었다.

“네 데이터에 문제가 있는 거 아냐? 건물 위치만 다른 게 아니라 지형도 다른데?”

- 저 지점만 다르고 주변 산의 형태는 지도 데이터와 일치합니다. 저 장소가 맞습니다. 60년 동안 저 지역의 지형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저 정도로 지형이 변하려면, 저 절벽 쪽이 무너지고 산사태도 좀 나면 되니까.”

- 그렇습니다.

“도봉산 만장봉은 공중항모가 추락해서 봉우리 일부가 파괴되었다고 했지? 저곳에도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 공중항모 추락에 의한 서울 주변 고지대 지형 변화는 굉장히 심각한 사건이라서 제 초기 메모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산에서 낮은 절벽이 무너진 사건 정도는 초기 메모리에 기록이 남지 않습니다.

“여기는 2082년의 지형 데이터만 남아있으면 되니까?”

- 그렇습니다.

“그럼 이곳에는 2082년까지 공중항모 추락 같은 사건은 없다는 건데, 그런데도 지형이 저렇게 변하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가만 놔둬도 저 절벽은 결국 무너진다는 거네. 그러면서 그 뒤쪽 땅도 좀 무너지고, 마지막엔 그 뒤의 산비탈에서 산사태가 나는 거지. 그 붕괴사고로 저 절벽과 산비탈이 네가 가진 지형 데이터처럼 변하는 거야. 늦어도 60년 안에.”

AI 전지인이 동의했다.

- 절벽붕괴로 인한 산사태가 일어날 겁니다.

나강인이 새로 지어진 건물을 보았다. 건물 규모가 꽤 컸다. 옆에 공사 중인 곳까지 건물이 들어서면 규모는 더 커질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절벽이 무너지고 산사태까지 나면, 그 사이에 있는 저 건물도 휩쓸리겠는데?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 지진이나 폭우 등에 의해 예고 없이 산사태가 발생한다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산사태를 막을 수는 없지만, 경고 정도는 해줘야겠어. 저 절벽이 생각보다 빨리, 그러니까 올해 안에 무너질지도 모르잖아.”

- 경고할 방법이 없습니다.

“알아. 그게 문제지. 전화를 걸어서 알려줘도 안 믿겠지.”

앞으로 60년 안에 눈앞에 있는 절벽과 산비탈이 무너지고 그 사이에 있는 건물이 휩쓸린다는 건 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나강인이 아는 건 AI 전지인이 가지고 있는 태양에너지 연구소 주변 지형 자료와 지금 모습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걸 그대로 말하면 미친놈 소리밖에 못 듣는다.

설사 상대를 그런 말로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2082년의 지형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신체삽입형 전투지원 AI는 공개할 수 없다.

나강인이 붕괴가 예정된 곳에 지어진 건물의 입구를 확인했다. 아직 간판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저기는 뭐하는 데야?”

- 태양에너지 연구소는 아닙니다. 인터넷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건물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서 아직 등록이 안 됐겠지.”

나강인이 주변을 둘러 보았다.

조금 떨어진 옆쪽에 다른 회사의 건물이 보였다. 그런데 그 건물에 회사 마크가 찍혀 있었다.

“어? 저거 백한수려의 건물이네?”

예전에 서울 한복판에서 VTX-13을 대량으로 싣고 가던 트럭이 폭발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강인이 그 폭발을 막으면서 화장품회사 백한수려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생겼다.

“절벽 위에 저 건물이 뭘 하는 곳인지부터 좀 물어보자. 옆에 있는 건물이니까 백한수려에 아는 사람이 있겠지.”

그는 백한수려의 사장 딸인 홍보팀 백미소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미소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 어머! 나강인 씨!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한 거예요? 혹시….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 쳇. 뭔데요?

나강인이 절벽 위의 건물을 돌아보았다.

“여기 주소가.”

AI 전지인이 즉시 주소를 보여주었다.

나강인이 그 주소를 불러준 후에 말했다.

“이 근처에 백한수려의 건물이 있더군요.”

- 네. 우리 연구소가 하나 있어요. 경치 좋은 곳에 세웠죠.

“그 옆쪽, 방금 주소를 불러준 곳에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관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

백미소의 목소리가 당장 높아졌다.

- 어? 뭐죠? 왜요?

“그거야….”

- 그 연구소에 가게요? 안돼요! 우리 회사로 와요! 잘해줄게요!

“그래서 물어본 게 아닌데요.”

- 지금 혹시 그 연구소 근처에 있어요?

“바로 앞에 있죠. 근처에 백한수려의 연구소도 보여서, 서로 좀 아는 사이인가 하고 전화한 겁니다.”

- 기다려요! 내가 금방 갈게요!

“금방?”

- 저 지금 그 옆에 있는 우리 회사 연구소에 있거든요. 금방 가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전화를 끊은 후에 나강인이 절벽 위에 새로 지은 건물을 보며 말했다.

“지인아. 저것도 연구소라는데, 태양에너지 연구소의 예전 형태일까?”

- 백미소가 오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다려 보자.”

***

화장품회사 백한수려 홍보팀 대리 백미소는 전화를 끊자마자 연구소를 나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나강인이 다른 회사로 넘어가기 전에 만나려고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부 거울에 그녀의 현재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상태가 딱히 나쁜 건 아니지만, 잘 꾸민 모습도 아니었다.

“아냐. 이건 아니야.”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을 도로 열고 사무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겼다. 그런 후에 여자 화장실부터 들렀다. 그곳에서 옷 상태를 점검하고 화장을 고쳤다.

화장실에 들어온 연구원이 그녀를 알아보고 물었다.

“어머. 백 대리님. 어디 좋은 데 가세요? 화장에 신경 많이 쓰신다.”

“좋은데는 아니고요. 좋은 거 잡으러 가요.”

“네? 좋은 거요?”

“그런 게 있어요.”

***

백미소가 꽃단장을 하고 연구소를 나왔다.

나강인이 관심을 보인 건물과 백한수려의 연구소는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깝다. 그렇다고 바로 옆은 아니라서 걸어서 이동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녀는 삼각별이 달린 외제차를 타고 나강인이 있는 곳으로 왔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백미소의 차가 다가옵니다. 금방 온다더니 너무 늦게 왔습니다.

“우리가 물어보려고 부른 건데 그럴 수도 있지.”

- 엄밀히 말하면 요원님이 부르진 않았습니다. 백미소가 알아서 온다고 했습니다.

나강인은 길가 공터에 차를 세워놓았다. 백미소가 나강인의 차 옆에 그녀의 차를 세웠다.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차 두 대를 같이 세워놓으니 겉모습이 비교됐다. 그녀의 차는 비싼 신형 외제차인데 나강인의 차는 폐차장에 보낼 뻔했던 구형 국산차다.

그녀가 나강인의 차를 보고 멈칫했다.

‘아직도 이 낡은 차를 타네?’

그 차는 낡기만 한 게 아니다.

내부는 방탄처리가 되어 무게가 무겁다. 비상 가속 장치를 사용해 고속으로 질주하면 엔진에 무리가 간다. 늘어난 무게를 버티기 위해 개조한 서스펜션도 차량의 중량을 증가시켰다. 그 외에도 전술 장치 몇 개를 더 달았다.

그래서 그 차는 낡기만 한 게 아니라 연비도 나쁘다. 대신에 총탄은 잘 막는다.

백미소가 나강인을 돌아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아직도 이 차를 타네요? 요즘 잘나간다고 들었는데 차 안 바꾸세요?”

백미소는 나강인이 무술감독으로 활동한다는 걸 안다. 그녀는 그가 참여한 영화나 드라마는 꼭 챙겨보았다.

나강인이 대답했다.

“이 차가 편합니다. 기름은 좀 많이 먹지만.”

“아, 네.”

백미소가 말을 돌렸다.

“자주 좀 연락해요.”

“우리가 연락은 종종 했잖습니까?”

그러긴 했다. 그런데 매번 백미소가 전화를 걸거나 톡을 보냈다.

“제가 연락할 때마다 바쁘다면서요.”

“이상하게 바쁠 때만 연락하시던데.”

사실이다. 백미소는 그가 바쁠 때만 연락했다.

나강인이 절벽 위에 새로 지은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연구소를 소유한 회사와 잘 압니까?”

백미소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잘 알죠. 우리 경쟁 회사니까요.”

나강인은 살짝 당황했다.

“경쟁 회사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태양에너지 연구소는 아닌가 봅니다.

나강인이 확실히 하기 위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저 건물이 화장품 연구소라는 겁니까?”

백미소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기는 바이오 헬스 연구소예요.”

“백한수려의 경쟁 회사라면서요.”

“맞아요. 화장품회사가 바이오 헬스 연구소를 만든 거예요. 그리고 바이오 분야는 우리도 연구하고 있어요.”

“아. 율명바이오처럼?”

율명바이오는 권수연의 아버지 권동진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다.

백미소가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니요. 거긴 본격적인 제약 회사잖아요. 우린 화장품을 만들면서 개발한 기술을 발전시킨 거예요. 율명바이오와는 연구 목적이 좀 달라요.”

백미소는 그녀가 오늘 방문해 조금 전까지 있던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가 우리 회사의 바이오 헬스 연구소예요. 일부러 공기 좋고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에 만들었죠.”

나강인이 앞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 연구소는 어느 회사 겁니까?”

“지구뷰티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름에 지구가 들어갑니다만, 지구연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름은 마음에 드네.”

백미소가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지구뷰티에 들어갈 거면 그냥 우리 회사로 오세요. 잘해줄게요.”

백미소는 물론이고 백한수려의 사장 백선철도 나강인을 스카우트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나강인이 화학 천재라고 생각했다.

백선철은 나강인을 스카우트하는 임무를 백미소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녀는 스카우트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연봉이 문제가 아니다.

백미소는 나강인이 영화나 드라마 업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안다. 그녀는 회사에서 연봉을 높게 제시해도 나강인이 그 일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만약 나강인이 경쟁사로 가려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백미소가 제안했다.

“지구뷰티에서 연봉으로 얼마를 불렀든 그것보다 더 줄게요. 나한테, 아니, 우리 회사로 와요.”

나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저 회사 이름조차 몰랐는데 가긴 왜 갑니까?”

백미소는 살짝 실망했다.

“아니구나.”

경쟁 회사에 취직할 생각이라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그만인데, 그게 아니면 스카우트는 어렵다.

실망하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그럼 저 회사에 대해서는 왜 물어본 거예요? 저한테 먼저 전화까지 걸어서?”

나강인이 지구뷰티의 바이오 헬스 연구소 앞쪽 절벽을 가리켰다.

“저 절벽 때문입니다.”

“저기서 보면 경치가 참 좋긴 하겠죠. 왜요? 저곳에 같이 가자고 부른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경치가 더 좋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나강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 절벽이 무너질 겁니다.”

백미소가 눈을 깜빡였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비유예요?”

나강인이 두 손으로 절벽과 산비탈이 무너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말 그대로 무너진다고요. 와르르. 그 여파로 저 산비탈도 무너지고요. 그 사이에 있는 저 건물은 당연히 휩쓸리겠죠.”

그녀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멀쩡한 산이 갑자기 무너져? 그게 말이 되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왜 무너진다는 거죠?”

AI 전지인이 가지고 있는 2082년 지형 데이터와 지금 눈에 보이는 지형은 다르다. 그런 큰 변화는 저곳이 무너져야 생길 수 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2082년의 지형 데이터를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진짜인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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