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경고
연구소 앞 절벽이 무너진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 그 이유를 사실대로 말해줄 수는 없다.
나강인이 적당히 둘러댔다.
“제가 토목과 지질 구조에 관심이 좀 있습니다.”
백미소는 당황했다.
“네? 강인 씨는 화학의 고수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냥 이거저거 좀 합니다. 화학도 그중 하나고요.”
“아니, 재능이 많은 건 알지만….”
나강인이 계속 둘러댔다.
“이 주변 지형과 땅의 상태를 좀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저 절벽이 무너지면 저 산비탈도 무너집니다.”
2082년 지형 데이터로 알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그의 추측이다.
“사이에 낀 저 건물은 당연히 휘말릴 겁니다. 그럼 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지죠.”
백미소가 건물과 절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해는 안 가지만 그래도 강인 씨 말이니까 믿을게요.”
그녀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대로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나강인이 화장품회사 지구뷰티의 바이오 헬스 연구소 건물을 가리켰다.
“저 회사에 경고해야죠. 백한수려가 아는 사이면 대신 경고 좀 해달라고 연락한 겁니다.”
백미소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강인 씨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 있어요. 만약 우리 연구소의 땅이 무너진다고 했으면 돈이 얼마가 들든 지질 전문 회사를 동원해서 철저히 확인했을 거예요.”
그런데 나강인이 경고한 곳은 백한수려가 아니라 경쟁사인 지구뷰티의 연구소 근처다.
“하지만 저 회사에서 강인 씨의 경고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해요.”
“역시 그렇겠지요?”
백미소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맞다! 강인 씨가 전문가니까 직접 설명하면 되죠. 분석하신 그 데이터를 도면이나 표, 수식으로 만들어서 설명할 수 있죠? 저 회사에서 아무 소리도 못 할 정도로 완벽하게요. 브리핑 룸은 제가 준비할게요.”
당연히 설명할 수 없다.
“음…. 그 노하우는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기존 이론과 많이 달라서 전문가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아니, 그게 말이….”
나강인이 백미소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날 믿어요.”
백미소는 조금 전까지 나강인의 말을 믿는다고 큰소리쳤다. 이제 와서 못 믿는다고 할 순 없다.
그녀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알았어요. 한번 말은 해볼게요.”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스마트폰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 뭐야?
“나 지금 너희 회사 바이오 헬스 연구소 앞인데, 좀 나오지?”
- 바빠.
“나도 바쁘거든? 그 연구소 안전에 관한 이야기니까 빨리 나와.”
- 으…. 알았어.
전화를 끊은 후에 백미소가 말했다.
“제가 아는 애가 저기서 일해요. 나온다니까 직접 설명해줘요.”
백미소는 사장 딸이라서 회사의 윗선에 영향을 끼칠 수단이 있다.
그런데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평범한 직원이라면 나강인의 말을 위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힘은 좀 있는 사람입니까?”
“힘이야 있겠죠. 걔도 사장 딸이니까.”
“아. 친합니까?”
“아뇨. 서로 싫어해요.”
잠시 후에 연구소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나왔다.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나강인이 물었다.
“연구원인가 보군요.”
“쟤는 바이오 전공이에요. 성격은 나쁜데 연구하는 실력은 좋대요.”
지현선이 다가와 나강인을 힐끗 보며 백미소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구시냐? 남자친구 자랑하려고 불렀냐?”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백미소는 당황했다.
“어? 야. 그게….”
나강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친구 아닙니다.”
백미소가 나강인을 슬쩍 째려본 후에 말했다.
“이 분은 지질 구조 전문가야.”
그녀는 나강인이 화학의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보는 일부러 숨겼다.
지현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지질 구조? 우리랑 상관없는 분야잖아.”
“상관있을걸? 이분이 그러는데 너희 연구소 앞에 있는 저 절벽이 무너질 거래. 그러면 너희 연구소도 휘말려서 같이 무너질 거야.”
지현선이 코웃음을 쳤다.
“지질 구조 전문 무당이신가 보다. 수맥 같은 거 찾으시는 분인가?”
백미소가 발끈했다.
“야.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새로 지은 건물이 왜 무너져? 우리가 연구소 지을 때 모래밭에 지었겠니? 지질조사 다 해보고 건물을 지어도 되니까 지은 거야.”
백미소가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쟤가 내 말은 안 믿으니까 직접 설명해줘요.”
지현선이 팔짱을 끼고 나강인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말해보시죠?”
나강인이 간단히 설명했다.
“저 절벽이 무너질 겁니다. 연구소 뒤에 있는 산비탈은 산사태가 일어날 거고요. 그 사이에 있는 저 건물은 당연히 휘말릴 텐데, 그러면 모래성처럼 무너지겠네요.”
“그래서 언제 무너진다는 거예요?”
“모르지요. 일 년 뒤가 될지, 십 년 뒤가 될지.”
지현선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흥. 사짜 냄새 나는 소리 하네.”
백미소가 편들었다.
“야! 사짜 아니라니까! 이 분은 말이야! 아, 진짜 답답해!”
나강인이 지현선에게 한마디 더 했다.
“아니면 오늘 당장 무너질지도 모르죠.”
지현선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나강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절벽이 무너진다고 협박해서 나한테 생기는 게 있습니까?”
“안 무너지게 해줄 테니까 돈을 요구하려는 거 아녜요?”
“붕괴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만?”
지현선이 나강인을 노려보다가 따져 물었다.
“그럼 저 절벽이 무너진다는 근거는요? 안 무너진다는 검사 서류는 우리 회사에 잔뜩 있거든요.”
나강인은 저 절벽이 언제 무너지는지는 모른다. 언젠가 무너진다는 것만 안다.
“음….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지현선이 손을 흔들었다.
“됐어요. 수맥이나 많이 찾으러 다니세요.”
그녀가 백미소에게도 한소리 했다.
“야! 넌 이런 일로 나 불러내지 마! 우리가 언제 서로 걱정해주는 사이였다고 이래?”
백미소가 받아쳤다.
“이게 걱정해줘도 난리야!”
“하지 마! 내 걱정 같은 거!”
지현선이 휙 돌아서서 연구소로 돌아갔다.
나강인이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설득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데…. 어떻게 할까? 작은 폭탄이라도 터트려서 절벽을 조금 무너뜨릴까?”
- 조금만 무너질 정도로 정밀하게 터트릴 줄 아십니까?
“네가 아는 줄 알았지.”
- 그런 계산은 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다 절벽 전체가 무너지면 오늘 당장 참사가 벌어집니다.
“폭발물은 쓰면 안 되겠다.”
- 당연합니다.
“그러면 지구뷰티에 영향을 끼칠만한 회사에 부탁해서 이야기할까?”
- 요원님이 부탁할만한 회사는 군경용 장비 회사, 미국 무기와 로봇 개발 회사, 제약 회사, 영화와 공연 전문 기획사, 화장품회사가 있습니다. 동종업계인 화장품회사 백한수려는 아시다시피 저곳과 사이가 나쁩니다.
“다른 회사들은 분야가 달라서 안 되겠다. 그럼 수사기관을 움직이는 건….”
나강인은 아는 형사도 있고 합동수사본부와 인연도 많다.
“에이. 그건 더 말이 안 되지.”
- 물론입니다.
결론이 나왔다.
“이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네.”
- 새로운 지질 분석 기술이 나올 때까지 저 절벽이 안 무너지기만 바라야 합니다.
“60년에서 절반 딱 잘라서 30년쯤 버티면 그동안 새 검사 기술이 나오지 않겠냐? 어쨌든 우리 손을 떠난 문제다.”
나강인이 백미소에게 말했다.
“깔끔하게 포기합시다.”
“네?”
“경고해도 못 알아듣는 데다가, 언제 무너질지는 나도 모르니까 포기. 그만하려고요.”
백미소가 당황한 얼굴로 그런 나강인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하긴. 이만하면 할 만큼 하셨죠.”
어차피 백미소도 나강인의 말을 다 믿은 건 아니다. 그녀는 그의 설명을 ‘저곳이 무너질 가능성이 조금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표정이 밝아진 백미소가 제안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백한수려 연구소 구내식당에서요?”
백미소는 잠깐 갈등했다. 나강인이 구내식당에서 요리해주면 그녀가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다. 게다가 나강인의 요리는 맛있다.
하지만 갈등은 짧았다. 구내식당에는 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녀가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아뇨. 이 근처 경치 좋은 곳에 맛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 가서 둘이서 먹어요.”
AI 전지인은 남이 만든 맛있는 요리를 좋아한다.
- 요원님. 어서 밥부터 먹으러 가시죠. 밥은 반드시 백미소에게 사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활동비가 부족합니다.
나강인도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그가 백미소에게 말했다.
“내 차 타고 갑시다. 밥을 사면 운전은 해드리지.”
“호호. 당연히 제가 사야죠. 멀리서 오셨는데 설마 사달라고 하겠어요?”
***
지현선이 지구뷰티의 바이오 헬스 연구소로 돌아갔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중얼댔다.
“어디서 사기꾼을 데려와서 나를 떠봐?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이나?”
회사 직원이 옆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 실장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지현선은 지구뷰티 사장의 딸이라서 승진이 빨랐다. 흔히 말하는 낙하산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평범한 낙하산이 아니라 공수부대급으로 연구 능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그녀가 실장이 되고 나서 연구소 복지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녀는 연구소 내에서 평이 좋았다. 비슷한 나잇대의 여자 직원들과는 친하게 지냈다.
그녀보다 한 살 어린 직원의 물음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거울을 보았다.
“저 옆에 백한수려의 연구소 알지?”
“알죠. 우리 경쟁 연구소잖아요.”
“거기 사장 딸이 갑자기 보자고 해서 나갔거든? 걔가 지나가는 길에 내 얼굴 보러 올 사이는 아닌데 부르길래,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서 우리 연구소 앞으로 나갔지.”
“왜 왔는데요?”
“지질학자인 척하는 수맥 찾는 사기꾼을 데려왔어. 그 사기꾼이 우리 연구소 앞에 있는 절벽이 무너질 거래.”
“네? 저 튼튼한 절벽이 왜 무너져요?”
지현선이 옆을 돌아보았다.
“박 대리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걔 진짜 미친 거 아냐?”
박 대리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음…. 혹시 그 사기꾼이 젊던가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우리 또래더라.”
“생긴 건요?”
“멀쩡하던데?”
그녀가 손뼉을 쳤다.
“그럼 그거네! 제비 사기꾼한테 걸린 거네!”
“응?”
“그래서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예요. 사기꾼에게 현혹돼서 무슨 말을 하든 다 믿는 거죠.”
지현선이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걔가 옛날부터 흥청망청 놀기만 좋아하고 머리도 좀 나쁘긴 했어. 공부도 나보다 못했거든.”
***
백미소가 안내한 식당은 근처 산길을 차를 타고 올라가면 나오는 곳에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진짜 맛집인데, 들어오는 길이 이래서 아는 사람만 와요.”
“그래도 손님이 꽤 있네요.”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오니까요. 음식값이 평범했으면 아마 자리가 없었을 걸요?”
나강인이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를 보았다. 비싼 차가 몇 대 서 있었다.
그가 그 옆에 차를 세웠다.
백미소가 차에서 내린 후에 옆에 주차된 차와 비교해보았다.
‘진짜 차 한 대 사줄까? 강인 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회사 경영진 절반이 구속됐을 텐데, 그걸 막아준 걸 생각하면 빨간 스포츠카로도 부족한데 말이야. 준다고 덥석 받을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가 그 생각을 털어버리고 말했다.
“가요. 여기는 산채와 고기, 밥, 국수까지 다 맛있어요.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요.”
두 사람은 마당 평상에 앉았다.
그 자리에 있으면 지구뷰티의 연구소와 그 앞 절벽이 확실히 보였다.
나강인이 말했다.
“여기 경치가 진짜 좋군요.”
“아까 그 절벽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좋죠? 그래서 일부러 이 산속까지 와서 드시는 분들도 많아요.”
나강인이 지구뷰티의 연구소 앞 절벽을 보며 물었다.
“방금 만난 친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현선이요? 친구 아닌데요?”
“잘 아는 사이 같던데요.”
“둘 다 화장품회사 사장 딸이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만날 일이 많아서 아는 거예요. 그리고 전 걔 별로 안 좋아해요.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 잘한다고 얼마나 비교하고 유세를 떨었는데요.”
“공부요?”
“걔만 그런 게 아니에요. 걔 한국대 갔을 때는 지구뷰티 사장님이 우리 아빠한테 전화해서 자랑했다니까요. 아빠 그때 표정이 진짜 안 좋았어요. 덕분에 그날 내 대학 합격 소식은 빛이 바랬죠.”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선을 넘긴 했네요.”
“많이 넘었죠.”
“가운을 입은 걸 보면 연구직인 것 같던데, 일은 잘합니까?”
“걔가 옛날부터 공부만 해서 연구는 잘해요.”
“싸가지는 좀 없던데요.”
“그쵸? 그렇게 보셨죠? 역시 사람 볼 줄 아신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벽에 걸린 메뉴판을 가리켰다.
“오늘 이 식당에 있는 거 다 시켜요! 제가 다 살게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말 한마디로 이곳의 모든 요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얻어먹는데 이 정도 립서비스는 해줘야지.”
- 잘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