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붕괴 II
나강인이 2층 창문을 통해 연구소 건물에 진입했다.
백미소는 건물 밖에 남아서 지현선에게 전화를 반복해서 걸었다.
“전화 좀 받아. 맨날 땍땍거리면서도 전화는 잘 받더니 왜 이럴 땐 안 받….”
갑자기 지현선과 전화가 연결됐다.
조금 전에 연결됐을 때는 대답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끊겼다. 그래서 백미소는 이번에는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
“너 아직 건물 안에 있으면 소리라도 질러! 너 구하겠다고 지금….”
빠른 발음으로 총알같이 말했는데도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전화가 다시 끊어졌다.
“왜 또! 왜 또 끊어지는데! 어떻게 5초도 유지가 안 돼!”
걱정도 들었다.
“얘 지금 내 말을 들은 거 맞아?”
***
지현선은 백미소의 말을 듣긴 들었다. 그런데 제대로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뭐라고 한 거야?”
그녀 쪽에서 전화를 다시 걸 수도 없었다. 스마트폰에는 통화권 이탈 표시만 떴다.
그녀가 통화를 포기하고 스마트폰의 플래시로 주변을 비추었다.
사방에 빛이 없는 공간에서는 그 정도 불빛만 있어도 사물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기울어지거나 넘어진 방송장비들이 보였다. 전원이 들어온 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후회했다.
“나도 같이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그녀는 절벽이 무너진 직후에 백미소와 나강인의 대피 경고 전화를 받았다.
이미 꽤 많은 사람이 건물 바깥으로 나간 후였지만 남아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서 밖으로 내보내는 건 불가능했다. 모든 사람에게 한 번에 상황을 전달하려면 건물 스피커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하에 있는 방송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사내 방송으로 사람들에게 건물 밖으로 나가라고 지시했다.
그냥 나가라고 하면 버티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나중에 건물에서 발견되는 사람은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퇴사시키겠다고 말했다. 확실히 경고하려고 그녀의 아버지인 회사 사장의 이름도 팔아먹었다.
퇴사시킨다는 경고는 효과가 좋아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건물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탈출하지 못했다.
그녀가 스마트폰 플래시로 방송실 문을 비추었다.
“저것만 열렸어도….”
나가라는 방송을 한 후에도 탈출할 시간은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가지 못했다. 건물이 충격을 받았을 때 방송실 문이 고장 나서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문을 열어보겠다고 의자로 두드려도 보고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러다 건물이 산사태에 휘말려 기울어질 때 방송장비 몇 개가 넘어졌다.
그때 그녀도 장비와 같이 넘어졌다.
그녀가 바닥에 누운 채로 스마트폰 플래시를 왼쪽으로 돌려보았다. 왼팔이 무거운 방송장비 밑에 깔려있었다.
팔을 누르고 있는 그 장비 때문에 탈출은커녕 바닥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 건물이 곧 무너질 거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그녀는 방금 백미소가 뭐라고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순식간에 통화가 끊겨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소리를 내라고 했나?”
그녀는 혼자 남은 지하 방송실에서 천장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그건 그녀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노래인 가수 댕댕의 ‘오늘도 걷는다’였다.
***
지현선이 방송실에서 당장 나가라고 외쳤는데도 건물에서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3시 방향에서 인기척을 감지했습니다.
나강인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건물이 기울어질 때 문이 찌그러졌다. 그 찌그러진 문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여기 사람 있어요!”
나강인이 쇠파이프를 문에 끼워 비틀었다. 철문이 뜯겨나갔다.
방안에는 눈물범벅인 여자가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구하러 왔습니다. 나갑시다.”
“다, 다리에 힘이 없어요.”
나강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 후에 옆구리에 끼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2층 창문 밖에는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나강인이 그녀를 그곳에 내려놓고 아래를 가리켰다.
“내려가요.”
“다, 다리에 힘이 없어요. 아래로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네?”
“시간 없으니까 기어서라도 빠져나가요.”
나강인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백미소가 그녀가 있는 위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내려와요! 거긴 위험해요!”
나강인이 건물에 들어갈 때만 해도 밖에는 백미소 혼자만 있었다. 지금은 연구소 직원이 몇 명 더 모였다. 그들이 흙무더기를 밟고 올라가 구출된 사람을 데리고 내려왔다.
백미소는 나강인이 들어간 곳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해. 또 안으로 들어갔어.”
갑자기 건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금 더 기울어졌다. 흙무더기에서 막 내려온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 어?”
백미소도 동동거리던 발을 멈추었다. 발로 땅을 밟을 때 생기는 작은 진동조차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
나강인이 말했다.
“생존자를 계속 찾아.”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생존자 구출 모드를 가동 중입니다. 주변 소음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인기척을 찾았습니다.
AI 전지인이 생존자의 위치를 표시했다. 나강인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건물 내부에 남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생존자까지는 문이 고장 나거나 통로가 막혀 갇히는 바람에 탈출하지 못했다.
나강인이 그들을 구출해 2층 창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다섯 번째로 발견한 사람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채로 서 있었다.
나강인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구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돌아섰다가 나강인을 보고 밝아진 얼굴로 외쳤다.
“지, 진짜요? 구조대예요? 살았다!”
나강인이 그녀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두 다리는 멀쩡했다.
건물 내부에 손상이 심해서 1층에서 2층으로 탈출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걸을 수 있으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정전된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 정신적 충격이 크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나강인은 이 건물에 지현선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생존자를 다섯 명이나 찾아냈는데 정작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혹시 현선 씨를 아십니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군요.”
그녀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 실장님은 지금 방송실에 계세요! 빨리 구출해야 해요!”
“아직 거기 있는 게 확실합니까?”
“네! 방송실 문이 고장 났어요. 저보고 먼저 나가라고 하셨는데, 제가 나가자마자 건물이 흔들리면서 문이….”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제가 올라오고 나서 계단이 무너졌어요. 엘리베이터도 아래로 내려간 채로 움직이지 않아요. 빨리 구해야 하는데….”
“내가 구출할 테니까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요. 여기는 너무 위험합니다.”
“진짜요? 고맙습니다!”
“방송실 위치가 어디입니까?”
“지하실이요. 내려가서 저쪽이에요!”
나강인이 방송실 직원을 2층 창문을 통해 내보낸 후에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요원님. 건물 붕괴 위험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강인이 1층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아래쪽을 보며 물었다.
“위쪽에서는 더 감지한 생존자가 없지?”
- 없습니다.
“지하실은?”
-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소음을 수집해 증폭한 후에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음성을 감지했습니다. 아래쪽에서 여자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내는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노래를 불러?”
- 요원님의 노래 ‘오늘도 걷는다’를 부르고 있습니다.
“노래는 잘해?”
- 잘합니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갑자기 건물이 진동했다. 눈앞에 보이는 경고 표시가 몇 개 더 증가했다.
- 건물 붕괴 위험이 더 증가했습니다. 이제 이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어디 있는지 아는데 버리고 갈 순 없잖아. 저 사람만 구하고 나가자.”
***
백미소는 건물 밖에 서 있다가 건물이 진동과 함께 조금 더 기울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어? 무너지면 안 돼! 아직 사람이 안 나왔다고!”
구출을 도와주기 위해 와 있던 직원들이 다급히 외쳤다.
“위험해요! 정문 밖으로 피해야 합니다!”
“저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빨리 피해요!”
***
방송실에 갇혀 있는 지현선도 건물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 충격으로 방송장비가 하나 더 넘어졌다. 그 위치는 하필 그녀의 팔을 누른 장비 바로 위였다.
“까아악!”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건물 전원은 이미 완전히 나갔다. 방송실 내부에서 보이는 불빛은 스마트폰 플래시밖에 없었다.
“팔이 아파.”
팔이 너무 아파서 이제는 노래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건물이 곧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게 너무 많았다.
“나 진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사장 딸이라서 승진이 빠른 걸 욕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녀의 연구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 연구소 안에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만큼 우수했고 일도 열심히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백미소처럼 흥청망청 아무 남자나 만나면서 살걸.”
그녀는 아까 절벽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일어나면 이 건물도 무너진다는 경고를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을 비웃었는데,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아무 남자나 만난 건 아니구나. 수맥 사기꾼한테 눈이 멀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진짜 지질 전문가였어.”
그때 왜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 후회가 됐다.
“팔이 너무 아파.”
겁도 많이 났다.
“이제 여기가 무너지는 거야?”
절벽이 무너진 것도, 산비탈에 산사태가 일어난 것도 두 사람의 경고대로였다. 그녀는 절벽이 왜 무너졌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 경고대로라면 이 건물도 곧 붕괴한다.
“이렇게 죽는 거야?”
눈물은 아까부터 났다. 죽는다는 생각을 하자 더 무섭고 외로웠다.
“팔이 아파서 우는 거야. 팔이 아파서….”
이미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흘렀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갑자기 철문에서 텅텅 소리가 났다.
그녀는 처음에는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그런데 남자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비명을 지를 힘이 있는 걸 보니까 중상은 아니겠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철문에서 난 소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사람 있어요!”
나강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압니다.”
“살려주세요!”
“살리려고 왔습니다.”
쇠파이프 하나가 찌그러진 문틈으로 들어왔다. 그 쇠파이프가 옆으로 움직이면서 철문 중간을 더 찌그러뜨려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는 쇠파이프를 쓴다고 해서 사람의 힘으로 방송실 철문을 찌그러뜨리는 게 가능한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문틈이 점점 벌어진다는 게 중요했다.
“힘내요! 힘!”
나강인이 철문 밖에서 말했다.
“응원을 좀 더 성의있게 해봐요.”
“네? 아! 잘한다! 우리 편!”
“여기 빛도 좀 비춰주고.”
그녀가 얼른 스마트폰 플래시를 문으로 향했다.
철문은 철판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내며 계속 벌어지다가 옆으로 활짝 열렸다. 열린 철문이 복도 벽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
나강인이 방송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헬멧에는 전등이 붙어 있었다. 전등의 광량을 낮춰놔서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었다.
지현선의 눈에는 그 빛이 후광처럼 보였다. 그녀에게는 어둠 속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었다.
“고마워요. 살았어. 드디어 살았….”
나강인이 방송실 내부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전등의 빛이 옆으로 이동했다. 지현선의 스마트폰 플래시 불빛에 나강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맥 사기꾼?”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수맥 아니라니까.”
그녀가 얼른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지질 전문가시잖아요.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구하러 왔습니다.”
“네? 아! 구조대와 같이 오셨군요!”
“119구조대가 이 산속으로 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네? 그럼 설마 혼자….”
나강인이 지현선의 옆으로 다가갔다. 방송장비 두 개가 넘어져 그녀의 왼팔을 누르고 있었다.
“어디 보자.”
나강인이 지현선의 얼굴과 멀쩡한 오른손을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구출 대상자의 몸에서 위험한 증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가 아픕니까?”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통증이 밀려왔다.
“네! 아파요! 팔이 너무 아파요!”
나강인이 위쪽에 넘어진 방송장비부터 옆으로 치웠다. 그 아래에 깔린 장비가 보였다. 그 장비 밑에 그녀의 왼팔이 끼어 있었다.
“많이 아프긴 하겠네.”
“진짜 아파요. 그런데 이게 너무 무거워서 팔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요?”
나강인이 그 장비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나강인이 장비를 옆으로 치워놓고 그녀의 왼팔을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팔이 장비 사이의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외상은 심하지 않습니다.
나강인이 그녀의 팔에 손을 댔다. 그녀가 겁을 먹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전장에서는 이런 정도는 부상자로 치지도 않습니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엄살이 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