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탈출
전투지원 AI 전지인은 부상자 진단능력이 있다. 지구연합군 기준에 의하면 지현선이 다친 건 부상자 축에도 못 낀다.
나강인이 말했다.
“운이 좋군요.”
그건 팔이 방송장비에 깔리고 무너지는 건물 방송실에 갇히기까지 한 지현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제가요? 여기 갇혀 있었는데요? 팔도 다쳤는데요?”
“뼈는 골절은커녕 금조차 안 갔습니다. 팔에 타박상이 심하긴 하지만…. 음?”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이런.”
“왜, 왜요?”
“왼팔이 안 움직이죠?”
지현선은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외, 왼팔을 이제 못 쓰는 거예요? 저 외팔이가 된 거예요?”
“그 팔은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멀쩡해질 겁니다.”
“네? 저한테 뭔가 문제가 생긴 거 아니었어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데 왼팔은 못 쓰고 오른쪽 팔만 멀쩡하면….”
이곳은 지하층이다. 밖으로 빠져나가려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살려주세요!”
“살리려고 왔다니까요.”
“날 버리지 말아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말은 하지 마시고.”
나강인이 일단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고통을 호소했다.
“팔이 아파요.”
그는 방송실에 있는 천을 찢어 그녀의 목에 걸고 끝을 묶었다. 그런 후에 거기에 그녀의 왼팔을 걸었다.
“다른 보호 도구가 없으니까 일단 이걸로 때웁시다.”
“이러니까 덜 아파요!”
“그럼 갑시다.”
“네? 가다니요?”
“이 건물이 무너질 거라고 경고한 거 기억할 텐데요? 건물 붕괴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빠, 빨리 나가요!”
나강인이 그녀를 데리고 방송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가 가는 방향은 계단 쪽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마트폰 플래시로 오른쪽을 비추었다.
“계단은 이쪽에 있어요!”
“거긴 무너져서 못 지나갑니다.”
“네? 그럼 어떻게 지하실로 내려오신 거예요?”
“엘리베이터 통로로요.”
“정전인데 엘리베이터가 다녀요?”
“그럴 리가.”
나강인이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데려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나강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타요.”
그녀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나강인이 위를 보았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 천장은 뻥 뚫려 있었다.
“헉! 천장이 부서진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안 움직여서 지붕에 구멍을 뚫고 내려왔습니다.”
“아….”
“여기서 탈출하려면 저 구멍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보았다.
지현선의 왼팔은 다쳐서 쓸 수가 없다. 두 팔이 다 멀쩡해도 그녀의 힘으로 위층까지 올라가는 건 어려운데, 한쪽 팔로는 당연히 무리다.
지현선도 그걸 깨닫고 다급히 말했다.
“살려주세요!”
“살리려고 왔다니까 아까부터, 아니, 오늘 점심 전부터 내 말은 진짜 안 믿네. 절벽이 붕괴한다는 것도, 이 건물이 산사태에 휘말려 무너진다는 것도 그때 다 경고했는데.”
“아까는 안 믿어서 미안해요.”
“그럼 지금은 좀 믿어요.”
“네! 네!”
나강인이 그녀의 팔을 보았다. 가늘었다.
“오른팔만으로 등에 매달리는 건 무리겠는데.”
“네? 그럼 어떻게 해요?”
“매미 알지요?”
“당연히 알죠.”
“업혀요.”
“네?”
“자꾸 따지지 말고 얼른.”
“아, 네!”
그녀가 나강인의 등 뒤에 붙었다.
나강인이 그녀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고 위로 들어서 업으며 말했다.
“오른팔을 내 어깨너머로 넘겨서 매달리고, 두 다리로는 내 허리를 감아요.”
“왼팔이 아파요.”
“살아있으니까 아픈 겁니다. 계속 살고 싶으면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요.”
“네!”
지현선이 나강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나강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등에서 떨어질 수 있다.
나강인이 로프로 그녀의 몸을 그의 몸에 묶었다.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에는 밧줄을 둘러 체중을 견디게 하고, 다리는 앞쪽에서 장딴지를 묶어서 풀어지지 않게 했다. 허리도 그의 몸과 겹쳐 묶어서 상체가 뒤로 젖혀지지 않게 했다.
나강인이 결속 작업을 순식간에 마친 후에 말했다.
“지금부터 올라갈 테니까 떨어지지 않게 잘 붙어 있어요.”
“어떻게 올라갈…. 꺅!”
나강인이 그 자리에서 점프해 엘리베이터 천장에 난 구멍의 턱을 두 손으로 잡았다.
사람을 등에 업고 그 정도 높이로 점프하는 건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군용 강화 시술 덕분에 인간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낼 수 있다.
구멍을 손으로 잡은 나강인이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몸이 천장 위로 쑥 올라갔다. 나강인이 엘리베이터 위에 발을 걸치고 몸을 완전히 빼냈다.
지현선이 등 뒤에서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된 거예요? 탈출했어요?”
연구소 지하는 기계실이나 특수 실험실 등을 넣어야 해서 천장의 높이가 굉장히 높았다. 방송실도 지하 깊은 곳에 있어서 1층이 손에 닿지 않았다.
“이제부터 케이블을 잡고 올라갈 겁니다.”
“네?”
나강인이 손에 낀 장갑을 점검한 후에 엘리베이터의 케이블을 잡았다.
수직 통로에는 엘리베이터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기다란 금속 레일이 있었다. 나강인은 그 레일이나 벽을 발로 밟거나 밀어 힘을 보탰다. 그러면서 손은 계속 케이블을 당겨 위로 올라갔다.
등 뒤에 업힌 지현선은 겁이 너무 나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 남자, 힘이 진짜 세구나.’
아까는 당황하고 무서워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나강인은 그녀를 등에 업은 채로 엘리베이터 수직 통로를 올라갔다.
1층 엘리베이터 통로의 외부 문은 이미 열어놓은 상태였다. 앞쪽에 1층 바닥의 턱이 보였다. 그런데 거리가 애매했다.
나강인아 말했다.
“뛸 겁니다. 꽉 잡아요.”
“네?”
나강인이 발로 수직 레일을 밀며 1층 바닥 턱을 향해 점프했다.
“꺅!”
두 손에 턱이 걸렸다. 그는 그대로 몸을 위로 끌어올려 1층 바닥에 발을 얹었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그는 1층으로 빠져나간 후에 일어서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현선이 등에 업힌 채로 급히 물었다.
“됐어요? 우리 살았어요?”
“이제 1층 로비를 통해서 2층 창문으로 빠져나갈 겁니다. 밧줄을 풀어줄 테니 걸어서….”
갑자기 경고 표시가 주르륵 떴다. 동시에 건물이 더 기울어졌다. 사방에서 비틀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건물이 붕괴합니다. 당장 탈출하십시오!
지현선을 등에서 내려놓을 시간은 없었다. 나강인은 그녀를 업고 그대로 달렸다.
지현선도 상황이 나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오른팔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1층 로비 천장에서 장식용 육면체가 떨어져 그들을 덮쳤다. 그 육면체는 속이 비어 있기는 하지만 겉은 금속이라 무게가 무거웠다. 그런 것에 정통으로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지현선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나강인이 손을 그 육면체 쪽으로 뻗었다. 손바닥이 추락하는 육면체에 닿자마자 팔을 굽혀 충격을 흡수하면서 옆으로 밀었다. 수직으로 추락하던 금속 육면체가 옆으로 날아가다가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건물 1층 로비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대형 계단이 있었다. 나강인이 그 계단으로 달렸다.
갑자기 계단에 금이 쩍쩍 갔다. 지현선은 공포에 질렸다.
“아, 안….”
나강인이 계단을 밟고 위로 뛰었다. 계단은 아래쪽부터 와르르 무너졌다.
그 계단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나강인이 바닥을 박찼다. 가죽장갑을 낀 두 손이 2층 창문의 턱에 걸렸다. 유리는 이미 박살 나서 없었다.
나강인이 두 팔을 강하게 당기며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건물 밖에는 밀려온 토사가 2층 창문까지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 토사가 움직이고 있었다.
AI 전지인이 즉시 흙더미 위에서 밟아도 될만한 것들을 표시했다. 돌이 섞이거나 나무가 있는 부분이 그나마 나았다.
나강인이 그런 부분을 징검다리 밟듯이 골라 밟으며 흙더미를 달려 아래로 내려갔다.
바깥쪽 공터에는 백미소가 혼자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나강인이 소리를 질렀다.
“튀어!”
“네?”
건물이 붕괴하고 있었다. 산사태가 추가로 일어났다. 땅바닥에도 균열이 쩍쩍 갔다.
이제 백미소가 있는 공터도 안전한 곳이 아니다.
백미소도 상황을 깨닫고 뒤로 돌아서서 뛰었다.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왔다. 그건 달리기에 좋은 신발은 아니다.
갑자기 하이힐이 삐끗하며 그녀의 몸이 옆으로 확 기울어졌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 했다.
“꺄….”
갑자기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강인이 그녀를 두 팔로 번쩍 들고 달리고 있었다.
“아….”
나강인은 백미소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고 달렸다. 그의 등 뒤에는 지현선이 매달려 있었다.
백미소의 눈에 나강인의 뒤쪽이 보였다. 연구소 건물이 붕괴했다. 산사태도 다시 일어났다.
공터 바닥도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조금만 머뭇거려도 거기 파묻힐 것 같았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나강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달려! 달려어!”
나강인이 두 사람을 업고 들고 달렸다.
AI 전지인이 지면의 위험도를 색깔로 표시했다. 그가 달리고 있는 곳은 붉은색이었다.
연구소 정문 근처까지는 노란색 구역이다. 파란색까지 가려면 정문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 붉은색 원은 점점 바깥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 더 달리십시오! 멈추면 다 죽습니다!
그래도 붉은색이 확장되는 것보다 나강인이 달리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그는 붉은색 지역을 벗어나 노란색 영역으로 넘어갔다.
- 이제 넘어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달리십시오! 빠라바라바라밤!
“그걸 응원이라고 하는 거냐!”
나강인이 바람처럼 달려서 순식간에 연구소 정문을 통과했다. 그러고 조금 더 달리자 드디어 파란색 영역에 도착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안전지대에 진입했습니다.
나강인이 속도를 줄이다가 멈추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더 멀리까지 도망쳐서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뒤로 돌아섰다.
땅은 점점 무너지다가 정문 구조물들을 부수고 나서야 붕괴를 멈추었다.
나강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그의 두 팔에 안겨 있는 백미소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 산 거예요? 우리 이제 괜찮아요?”
나강인이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여기는 벼랑 붕괴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니까 더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나강인의 등에 업힌 지현선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백미소는 지상에서만 위험한 일을 겪었지만, 그녀는 지하 방송실에서부터 계속 생명이 위험했다.
그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줬다니까 아직도 안 믿네.”
나강인이 로프를 풀고 등에 업힌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녀는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단한 땅바닥에 몸에 닿자 실감이 조금 났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더듬으며 말했다.
“나 진짜 살았구나….”
마음이 조금 놓이자마자 다친 왼팔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팔이 아파요.”
“구급차가 오면 병원부터 가요. 뼈는 안 부러졌고 근육도 심각한 손상은 없으니까, 금방 회복될 겁니다.”
“진짜요? 의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알아요?”
“내 말을 또 안 믿네.”
“믿을게요!”
나강인이 무너진 절벽과 연구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절벽은 오늘 안 무너졌어도 언젠가는 무너졌을 겁니다. 연구소를 다 짓고 사람이 잔뜩 있을 때 무너졌으면 큰일 났겠네요.”
“그, 그렇죠?”
“이제 내가 한 말이 믿어집니까?”
“믿어요! 이젠 진짜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을게요!”
연구소 주차장은 정문 안쪽에 있다. 모든 주차장이 무너진 건 아니지만 차가 정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
차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그곳에서 멀어지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길을 따라 산 아래로 걸어갔다.
그런데 대피했던 사람 중 일부는 붕괴가 멈춘 걸 보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명은 뛰어서 달려왔다.
연구소장이 제일 먼저 달려와 사장 딸인 지현선을 걱정했다.
“지 실장!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아. 소장님. 책임자가 먼저 도망가셨….”
“돌아왔잖아! 내가 지 실장이 어디 있는지 알았으면 안 도망갔을 거야!”
“아, 예. 그러셨겠죠.”
평소에 지현선의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잘생긴 젊은 남자도 다가왔다.
“누나!”
“나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 너 같은 동생은 둔 적 없다. 호칭 제대로 붙여라. 난 실장이고 넌 사원이다.”
남자 직원이 머뭇거리며 변명했다.
“지 실장님이 어디 계신지 알았으면….”
“내가 분명히 방송실 간다고 했잖아! 꺼져!”
방송실 여자 직원이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
“엉엉. 지 실장님.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너도….”
나강인이 옆에서 말했다.
“지하 방송실에 지 실장님이 있다고 알려준 분이군요. 우리가 탈출한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울고 있길래 먼저 구출했습니다.”
“실장님이라고 하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 이리 와서 나 좀 부축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