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덕
구출된 지현선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처음 세 명 외에도 더 있었다.
그들은 무너지고 산사태가 난 땅이 또 무너지지 않는지 경계하며 지현선에게 다가왔다.
“지 실장님이 건물에서 안 나가면 퇴직시킨다고 방송해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도요. 그 방송이 아니었으면 저는 아직도 저 무너지는 건물에….”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최선의 판단을 하셨어요?”
지현선은 당황했다.
“저기, 그게 사실은 저 혼자 판단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점점 지현선에게 모여들었다.
나강인은 연구소가 있던 곳을 보았다. 땅은 쩍쩍 갈라져 있고 산사태로 밀려온 토사도 곳곳을 덮쳤다. 연구소는 완전히 무너졌다. 정문 구조물도 파괴되었다.
나강인이 그걸 보며 말했다.
“지인아. 안전구역과 위험구역을 색으로 표현해준 거 말이야. 도움이 되더라. 잘했다.”
- 대충 찍었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나강인은 당황했다.
“응?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표시했잖아.”
- 빨간 영역은 사망지대, 노란 영역은 즉시 탈출해야 하는 위험지역, 파란 영역은 안전지대를 표시했습니다.
“그래. 그거 알고 한 거 아니었어?”
- 노란색 위험지역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AR 렌즈를 통해서 나한테 보여준 건?”
- 더 힘내시라고 발밑에만 노란색으로 칠해서 보여드렸습니다.
“야 이…. 아니다. 살았으니까 됐다.”
- 그걸 보고 힘내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힘냈다고는 안 했다.”
- 구역을 색으로 표시한 후부터 달리는 속도가 20% 이상 증가했습니다.
“잘했다고.”
몇 사람이 지현선의 주변에 모여 이야기하는 걸 본 다른 사람들도 점점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나강인이 백미소에게 말했다.
“우린 여기서 빠져나갑시다. 남아있어 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이 지현선이 아니라 나강인에게 관심을 가지면 귀찮아진다.
주저앉아있던 백미소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과 같은 이유로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맞아요. 빨리 이 위험한 곳에서 떠나요.”
나강인의 차는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백미소의 차는 다른 공터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차는 폭발 당시에 날아온 돌에 맞아 철판이 찌그러지고 유리창이 박살 난 상태였다.
나강인이 그 차를 보며 말했다.
“정통으로 당했네요.”
백미소는 걱정하지 않았다.
“보험 들었으니까 괜찮아요.”
“이번 일이 보험처리가 되나 모르겠군요.”
“네? 설마 이 사고가 천재지변이나 전쟁에 들어가진 않겠죠?”
“모릅니다. 규모만 보면 그 수준인데.”
이곳에서 폭탄도 터지고 절벽도 무너지고 산사태도 일어나고 건물도 붕괴했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내 차 타고 갑시다. 연구소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네!”
그녀가 나강인의 차 조수석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이 차를 타고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녀가 차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이 무거워. 내 착각이 아니었어.’
그녀가 차의 외부도 슬쩍 보았다. 길 위에 넘어진 나무나 장애물을 부수고 튕겨내면서 달렸는데도 범퍼 외에는 찌그러진 곳이 없었다. 도색이 조금 벗겨지긴 했다.
‘차가 도대체 얼마나 튼튼한 거야?’
그녀가 차에 타면서 나강인에게 물었다.
“이 차 말이에요. 보통 차 아니죠?”
“흔한 국산 승용차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나강인이 차를 출발시켰다.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 멀리서 119구급차와 소방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길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스마트폰으로 112나 119에 신고한 사람은 많았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화해 이곳의 다급한 상황을 알린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통 사람은 영상이나 사진을 자기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때 찍는다. 현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걸 찍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현장에서 멀어지려고 산에서 내려가는 사람들은 겁을 먹은 상태라 촬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현선이 연구소 건물에서 탈출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에서 사장 딸을 한가하게 찍다가 걸리면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다.
그래서 지현선이 구출되고 나강인이 떠날 때까지는 그곳에서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강인과 백미소가 아까 들렀던 산속 식당은 상황이 달랐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폭발 직후에 파편이 날아온 것 외에는 위험한 일을 겪지 않았다.
그 식당 손님 중에 스마트폰으로 연구소 상황을 촬영한 사람이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사람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도는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나강인이 두 사람을 데리고 탈출하는 모습을 찍으며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대박. 저거 실화야?”
나강인이 근처에 있는 백한수려의 연구소에 도착했다.
폭발할 때 날아간 돌멩이나 잔해가 백한수려의 연구소에도 떨어졌다. 지상 주차장에 세워둔 차 여러 대가 돌에 맞아 손상됐다.
연구소의 콘크리트 벽에도 뭔가 충돌한 자국이 여럿 남아있었다.
백미소가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우리 연구소의 유리창도 깨진 게 좀 있네요. 돌에 맞아서 깨진 거겠죠?”
“아니요. 대부분은 폭발 충격으로 깨졌습니다.”
“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식당 평상에서 같이 봤잖습니까?”
“그게 보였어요?
“안 보일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닌데.”
“그게 아니라, 그때는 돌멩이들이 식당까지 날아와서 꽂혔는데 여기를 볼 여유가….”
그녀는 아까 일이 생각났다.
나강인이 평상에서 그녀를 끌어당긴 덕분에 날아오는 돌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돌에 맞았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정말 강인 씨는 저를 여러 번 구해줬네요. 우리 회사도 구해줬고요.”
화장품회사 백한수려는 VTX-13 사건 때 나강인의 신세를 톡톡히 졌다.
나강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난 돌아갈 테니까.”
“네? 같이 안 들어가세요?”
“내가 여기서 할 일은 없으니까요.”
백미소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연구소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뒷정리를 도와야 한다.
그건 홍보실 대리인 그녀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본사에서 온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돕지 않고 혼자만 쏙 빠져나가면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요. 서울에 가면 제가 연락할게요.”
“그렇게 해요. 또 바쁜 때 하지 말고.”
“네!”
***
폭발 사건을 일으킨 건 교수를 포함한 중독자 다섯 명이다. 그들은 급조폭발물을 땅에 수직으로 파놓은 구멍에 집어넣은 후에 승합차를 타고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VTX-13으로 만든 폭탄은 원래 불안정해서 쉽게 터진다. 그 사제 폭탄은 교수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폭발했다. 그때 그들은 정문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그 충격으로 그들이 탄 승합차에 문제가 생겼다. 뒷유리도 깨지고 타이어에도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때는 차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빨리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차를 몰고 산 아래쪽까지 도망쳤을 때 손상된 타이어가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타이어 터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다들 깜짝 놀랐다.
“으아아악!”
“폭탄이 또 터진다아!”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펑크야! 펑크! 차 세워!”
운전을 맡은 중독자가 펑크가 난 승합차를 길가에 급히 세웠다.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중독자 동료가 교수에게 따졌다.
“교수님! 폭탄을 너무 많이 터트렸잖습니까!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화력을 조절하셨어야죠!”
“나도 VTX-13의 폭발력이 저렇게 강한 줄은 몰랐어! 폭탄의 원료라는 것만 알았다고!”
“왜 그렇게 빨리 터트린 겁니까! 우리가 도망친 후에 터졌어야죠!”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알아서 터진 거야!”
다른 동료가 물었다.
“교수님. 폭발력이 너무 강한데요? 포탄을 터트려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어떻게 된 겁니까?”
“구멍 속에서 터지니까 폭발력이 분산이 안 돼서 더 강하게 느껴진 것 같아. 그래서 파편이 위쪽으로 그렇게 높이 날아간 거겠지.”
“파편이 굉장히 멀리까지 날아갔겠죠?”
“박격포탄이 날아가듯이 발사됐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래도 이제 다 끝났….”
뒤를 돌아본 동료가 갑자기 외쳤다.
“어? 저기 보십쇼! 산사태가 났습니다!”
“건물도 무너졌습니다!”
다섯 명 모두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사건의 규모가 그들의 예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
교수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타이어 빨리 갈아 끼워!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일이 너무 커졌다고! 잡히면 끝장이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절벽과 그 앞 약품 창고만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다른 네 명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저기서 죽은 사람이 있겠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죽었겠지.”
“그럼 우리는 잡히면 다 사형….”
“스, 스페어타이어 어디 있어? 빨리 갈아 끼워!”
***
나강인이 차를 몰고 산길을 내려갔다.
그런데 산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고장 난 차량을 발견했습니다.
“타이어를 바꾸는 거잖아. 저 정도는 알아서 하겠…. 음? 저 차 뒷유리가 깨져 있네?
- 폭발 직전에 지구뷰티의 연구소 정문을 빠져나간 차량입니다.
AI 전지인이 당시의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허공에 띄웠다.
그 홀로그램은 아까 나강인이 산속 식당에서 눈으로 본 것을 영상으로 저장했다가 확대한 것이다. 워낙 멀리서 본 모습이라 영상을 확대해도 차량이 선명하지 않았다. 번호판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같은 차종에 같은 색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필 그때 거길 빠져나간 차? 우연일 수도 있지만, 수상한데?”
- 확인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나강인이 차를 승합차 근처에 세웠다.
어차피 길가에 공터가 많아서 차는 아무 곳에나 세울 수 있었다.
나강인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펑크가 났나 봅니다. 도와드릴까요?”
타이어 교체는 두 명이 하고 있었다. 다른 세 명은 옆에 서 있었다.
교수가 나강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가세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승합차 뒷유리가 깨졌네요? 저 위 폭발 현장에 있었나 보죠?”
교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동료가 얼른 말했다.
“아뇨! 우리는 거기 없었습니다. 유리는 그냥 날아온 파편에 맞아서 깨진 겁니다.”
“아. 거기 없으셨구나.”
이미 동료가 아니라고 했는데 교수가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다. 교수가 둘러댔다.
“예. 이 아래에서 보고 저희도 많이 놀랐습니다. 저 위에서 오시는 분입니까?”
“저기서 오는 건 맞습니다. 맞는데.”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폭탄이 폭발하기 직전에 이 차가 연구소를 빠져나가는 걸 봤는데, 아니라고 하시네? 왜 거짓말을 하실까? 이거 되게 수상한 상황인데?”
“어?”
“혹시 폭탄을 설치하고 도망쳤는데 너무 일찍 터진 건가? 폭탄의 타이머 설정을 실수하셨나 보다.”
교수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비슷한 차를 잘못 보셨겠지요.”
“이 차 맞아. 번호판도 맞고. 2884.”
차량 번호는 지금 보고 그대로 부른 것뿐이다. 그런데 그 미끼를 한 놈이 물었다.
타이어 교환용 공구로 쓰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던 중독자가 갑자기 욕을 내뱉었다.
“씨발! 들켰어! 목격자를 남겨두면 안 돼!”
그는 쇠파이프를 들고 나강인 쪽으로 움직였다.
다른 중독자들도 곧바로 동조했다.
“저 건물이 무너질 때 여럿 죽었을 거야. 하나 더 죽는다고 해서 다를 거 없잖아?”
스패너를 챙긴 중독자가 나강인이 도망칠 길을 막으려고 뒤쪽으로 움직였다.
“저 새끼 반드시 잡아야 해. 여기서 놓치면 우리가 죽어!”
중독자 네 명이 나강인을 포위했다.
뒤쪽에서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나강인에게 말했다.
“이봐. 당신. 그냥 가라고 할 때 갔으면 서로 좋았잖아.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쯧쯧.”
나강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저기서 폭탄을 터트린 놈들이 맞네?”
“그걸 안다고 해서 혼자서 어쩌려고?”
AI 전지인이 말했다.
- 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니….
“지인아. 너 사람 다 된 건 아는데, 그렇다고 흑염룡을 키울 필요는 없잖아.”
교수가 중독자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저놈이 도망치면 우린 다 죽는다. 확실히 잡아!”
쇠파이프를 든 놈이 제일 먼저 나강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파이프를 위로 높이 들었다가 나강인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쳤다.
나강인이 왼손을 뻗어 그 파이프를 덥석 잡았다.
같은 힘을 가진 사람끼리 싸운다면 상대가 내리치는 쇠파이프를 맨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그런데 나강인은 너무 쉽게 쇠파이프를 잡았다.
적의 눈이 동그래졌다. 쇠파이프는 마치 콘크리트 속에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보아라. 이것이 격이 다른 힘의 차이….
“지인아.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