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블러드 아이스
적이 나강인에게 붙잡힌 쇠파이프를 빼내려고 힘껏 잡아당겼다. 나강인도 왼손으로 쇠파이프를 끌어당겼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적이 질질 끌려왔다.
나강인이 오른손으로 적의 목을 콱 잡았다.
“켁!”
다른 세 명은 당황했다.
“어? 어?”
“쇠파이프로 쳤는데 어떻게….”
그 셋 중에 둘은 좌우에서, 다른 하나는 뒤에서 나강인의 포위하고 있었다.
등 뒤에 있는 놈은 그가 지금 나강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저놈은 나를 못 봐! 지금 뒤통수를 치면 잡을 수 있어!’
마침 그의 손에는 강철로 만든 스패너가 쥐어져 있다. 그 스패너로 머리를 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그는 나강인을 향해 조용히 다가가며 스패너를 위로 높이 들었다.
‘한 방에 끝내면 돼!’
나강인은 뒤통수에는 눈이 없다.
그런데 그에게는 전투지원 AI 전지인이 있다. AI 전지인은 주변 소음을 증폭해 벽 너머의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벽조차 없는 등 뒤의 움직임을 아는 건 간단했다.
나강인의 눈앞에는 그를 중심으로 적의 위치가 표시된 홀로그램 미니 지도가 떠 있었다. 적의 위치는 그냥 점으로 표시한 게 아니라 사람 형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적이 뒤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알아.”
나강인이 뒤로 돌아서며 목을 붙잡은 놈을 적에게 던졌다. 70kg짜리 몸뚱이가 뒤쪽으로 날아갔다.
뒤에서 접근하던 놈은 스패너를 내리칠 틈도 없이 날아오는 동료와 충돌했다.
“케엑!”
“켁!”
그들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강인은 뒤쪽에서 덤비던 놈을 처리하자마자 왼쪽 놈을 향해 훌쩍 뛰었다. 그는 단 한걸음에 적이 있는 곳까지 점프한 후에 상대의 다리를 걷어찼다.
“악!”
적은 중심을 잃고 엎어졌다. 엎어지는 적의 머리를 나강인이 발로 툭 찼다.
그는 그런 후에 반대편을 보았다.
이제 서 있는 놈은 교수와 중독자 한 명뿐이었다.
교수는 쓰러진 세 놈을 보다가 갑자기 차로 달려갔다. 운전석 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운전석으로 뛰어들어 시동을 걸었다.
나강인의 손에는 방금 빼앗은 쇠파이프가 있다. 그가 그 쇠파이프를 뒤로 당겼다가 투창을 하듯이 던졌다.
전투지원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쇠파이프가 명중할 수 있도록 손의 움직임을 살짝 보정했다. 날아간 쇠파이프가 승합의 앞바퀴를 정확히 꿰뚫었다.
타이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승합차 한쪽이 털썩 주저앉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야. 내려.”
타이어 하나는 이미 터진 상태였다. 타이어가 두 개나 터진 차를 타고 도망칠 수는 없다.
교수가 잠시 갈등하다가 차에서 내렸다.
나강인이 다른 중독자를 향해 걸어갔다.
“야. 너도 그냥 무릎이나 꿇….”
AI 전지인이 갑자기 경고했다.
- 적이 기습합니다!
방금 쓰러뜨린 놈이 있는 쪽에 경고 표시가 떴다. 홀로그램 미니 지도에는 그놈이 움직이는 모습이 표시되었다.
왼쪽에서 쓰러졌던 놈이 자세를 낮추고 나강인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레슬링 선수가 태클을 거는 듯했다.
나강인이 땅을 박차며 위로 점프했다. 그의 몸이 높이 솟았다. 적이 나강인을 잡으려고 다급히 팔을 휘저었지만 닿지 않았다.
적의 돌진은 거칠고 빨랐지만, 균형 감각이나 방향전환 능력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나강인을 잡으려고 팔을 휘저을 때 중심도 흔들렸다.
적이 몇 걸음 더 뛰다가 앞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아직 나강인과 싸워보지 않은 중독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나강인이 다른 놈을 상대하는 틈에 터진 타이어에서 쇠파이프를 뽑았다.
그런데 그는 쇠파이프를 뽑아서 돌아서다가 깜짝 놀랐다. 나강인이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당황한 적이 큰 동작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공격이 너무 느렸다.
나강인은 적이 쇠파이프를 다 휘두르기도 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적은 몸이 옆으로 꺾이며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케에엑!”
쥐고 휘두르던 쇠파이프는 이미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강인이 돌아섰다.
돌진하다가 엎어진 놈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이놈 맷집이 장난 아닌데?”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적의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마약중독이 의심됩니다.
“다른 놈들은?”
- 의심 증상이 약간 보입니다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설마 딱 한 놈만 마약을 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나강인이 적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놈들 이거 다 중독자네?”
그 말을 들은 교수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맞지? 야. 너희들 무슨 약 하냐?”
교수가 눈알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약을 좀 아는 것 같군. 그래. 약을 해서 그렇게 힘이 센 거였어.”
“어…. 내 몸에 약이 좀 사용되긴 했을 거야.”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의료용 신체 강화 약물은 안정성이 높습니다. 저급한 마약 따위와 비교할 게 아닙니다.
“난 군용 신체 강화 시술을 받았다며. 군용에 사용된 약물도 괜찮냐?”
- 그런 건 기밀이라 저도 모릅니다.
“몸에 나쁜 거면, 나중에 사령부와 연락할 방법이 생겼을 때 제대로 따질 거다.”
- 그런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강인과 AI 전지인의 대화는 교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말은 확실히 들었다.
‘몸에 약이 사용됐다고? 역시 저놈도 중독자구나! 그러면 협상할 수 있지.’
교수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블러드 아이스를 아나?”
“몰라. 그런 거.”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상품이니까 모를 수 있지. 블러드 아이스는 다른 마약보다 효과는 좋은데 부작용이 적다. 정말 신이 내린 선물이다.”
“악마가 뿌린 저주겠지.”
교수가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블러드 아이스를 만들 줄 안다.”
그런 후에 승합차의 트렁크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필요한 원료는 저 차에 잔뜩 실려 있다.”
나강인은 교수 일당의 계획을 이해했다.
“아아. 폭탄을 왜 터트렸나 했더니 마약 원료를 훔치려고 그런 거냐? 바이오 연구소에 구하기 힘든 원료가 있었나 봐?”
“그게….”
“그래도 폭탄으로 건물까지 무너뜨린 건 선을 많이 넘었지.”
교수가 급히 설명했다.
“폭탄은 사고였다. 창고에 VTX-13이 있는 걸 보고 사제 폭탄을 현장에서 급조했는데, 양 조절에 실패했다. 그렇게 강력하게 폭발할 줄은 몰랐다.”
“응? VTX-13? 백한수려에서 다 회수한 거 아니었나?”
“지구뷰티에서 반납하지 않은 게 있더군. 그런데 너도 VTX-13을 아나?”
VTX-13과 특정 물질을 조합하면 폭탄이 된다는 걸 처음 알려준 사람이 나강인이다. 덕분에 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날 뻔한 일을 막았다.
그런데 오늘 사건에 VTX-13이 사용됐다.
“이거 혹시 나비효과인가?”
- 그 도심 폭발 사고는 막아야만 했습니다.
“알아.”
나강인이 교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피부재생에 좋은 물질이잖아.”
“보통은 그렇게 알고 있지. 하지만 그건 잘만 다루면 폭….”
나강인이 얼른 말을 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교수도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약을 주겠다. 그리고 블러드 아이스는 돈이 된다. 그 약을 팔면 로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돈을 벌 수 있단 말이다.”
“아아. 그러니까 약을 줄 테니까 풀어달라?”
교수가 눈알을 굴리며 얼마나 줘야 할지 계산했다.
“눈 한 번만 감아주면, 약의 절반을 주겠다. 그러면 너는 인생역전….”
“너나 많이 먹어라. 아. 이제 약은 못 먹겠구나. 교도소에 가야 하니까.”
당황한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블러드 아이스를 준다고! 너도 약이 필요하잖아!”
“그런 건 나한테는 아이스크림보다 가치가 없어. 아이스크림은 먹을 수나 있지.”
엎어졌던 중독자가 갑자기 나강인을 향해 다시 돌진했다.
“내 약은 못….”
나강인이 옆으로 회전하며 주먹을 크게 휘둘러 적의 턱을 후려쳤다. 돌진하던 적은 비명도 못 지르고 옆으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아무리 약을 처먹었어도 이번에는 기절하겠지.”
나강인이 교수를 돌아보았다.
교수는 협상이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등이 승합차에 닿았다.
“사, 살려….”
“안 죽여.”
“약을, 약을 다 줄 테니까 나만….”
나강인이 교수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켁!”
교수는 한 방에 기절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 전장의 모든 적을 제압했습니다.
나강인이 승합차의 뒷문을 열어보았다. 약품이 담긴 통이 몇 개 있었다.
“이게 블러드 아이스의 원료구나.”
다른 재료는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있다. 이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하기 어려운 원료들이다.
“지인아. 블러드 아이스가 뭔지 알아?”
- 위험한 마약입니다.
“저놈은 부작용이 적다고 주장하던데?”
- 초기에는 부작용은 적은 마약처럼 느껴지지만, 중독이 위험 수준을 넘어서면 부작용도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그러면 맷집도 좀 세지냐?”
- 고통을 덜 느끼고, 판단 능력이 떨어지며, 겁을 내지 않게 됩니다.
나강인이 턱을 얻어맞고 기절한 놈을 보며 말했다.
“저놈이 그 단계를 넘어섰거나, 넘어서던 중인가 보다.”
그가 다른 놈들도 보았다.
“이놈들은 다 그 마약에 중독됐어. 그래서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폭탄을 터트린 거야.”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강인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누구에게 연락해서 이놈들을 처리해야 하나….”
여기는 충청도다.
“박 형사님은 우리 동네가 관할이니까 충청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안 되겠고….”
나강인이 합동수사본부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사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갑자기 전화를 주시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별일 없으시지요?
“별일이 있습니다.”
합수부 형사가 머뭇거렸다.
- 어…. 큰일은 아니지요?
“그럼요. 다 해결됐습니다.”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 휴우. 다행입니다. 무슨 일인데 전화를 주셨습니까?
“충청도에 지구뷰티의 바이오 헬스 연구소가 있습니다.”
- 화장품회사 지구뷰티요?
“예. 그 회사가 새로 지은 연구소가 있는데, 앞마당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 예? 뭐가 터져요?
“그래서 절벽이 무너지고, 산사태도 나고, 연구소 건물도 붕괴했는데요.”
- 아니, 잠깐만요!
“범인은 다 잡아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 물론 그것도 문제지만!
“이 사건이 합수부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 미리 아시라고 전화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람 좀 보내서 이놈들 좀 데려가시죠.”
- 이, 이놈들이요?
“범인은 모두 다섯인데, 다섯 놈 다 블러드 아이스라는 마약 중독자입니다.”
- 그건 신종 마약인데….
“폭파에 사용된 건 VTX-13을 이용한 사제 폭탄입니다.”
합수부 형사가 우는소리를 했다.
- 아이고, 선생님! 이건 아니잖습니까! 이젠 전국에서 그런 사건을…. 선생님이 일으키신 건 아니지만, 왜 또 우리한테….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다른 기관에서 이 사건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알고 계시라고 전화했습니다.”
- 저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느낌이 싸합니다. 후우.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거기 위치 좀 보내주십시오.
***
119구조대와 소방차,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도 신고를 받고 달려왔다.
구조대장이 다급히 물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저 무너진 건물에 사람이 남아있습니까?”
연구소 사람들은 이미 서로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서 인원파악을 하는 중이다. 건설사도 마찬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연구소 직원이 대답했다.
“없는 것 같은데, 아직 확인 중이라 확실하진 않습니다.”
“확실해야 합니다!”
지현선이 나섰다.
“무너지기 전에 저희 연구소 건물을 수색한 분이 계세요. 그분이 저를 마지막으로 구출했어요.”
그녀의 옆에 있던 방송실 직원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지 실장님을 구출하기 직전에 저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나 구해주셨는데요. 그때 건물 내부에서 다른 사람은 못 찾았다고 하셨어요.”
구조대장이 난감해했다.
“그럼 확실한 건 아니군요. 저 건물 내부 상황을 물어보고 싶은데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지현선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나강인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가셨지?”
연구소 직원들은 건물이 무너진 후부터 서로 전화를 걸거나 단톡방을 이용해 위치를 확인했다. 그 정보를 모은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연구소 직원 중에는 실종된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건설사 쪽에서 생겼다.
“저희 쪽은 다섯 명이나 없습니다! 연락도 안 받습니다!”
구조대장이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장비 챙겨!”
“저긴 지금 너무 위험한데요? 성급하게 구조하러 들어갔다가 추가 붕괴가 일어나면 들어간 대원은 다 죽습니다.”
“알아! 일단 다섯 명 중에 생존자가 있는지만 조심해서 확인하자.”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구조대장에게 다가왔다.
“잠시만요. 안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안 구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 그게 아니라.”
경찰이 현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놈들 말입니다.”
“진짜 나쁜 놈들이죠.”
“방금 연락받았는데, 산 밑에서 도주하던 용의자들을 잡았답니다. 현장 인원 파악할 때 그것도 참고하라고 하던데요.”
“어? 붙잡은 용의자가 몇 명입니까?”
“다섯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