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파티
변형찬 감독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우리 영화 액션의 그 리얼한 느낌은 할리우드 CG로도 못 만듭니다. 게다가 모든 액션 촬영을 그렇게 빨리 끝낸 것도 강인 씨 덕분이죠. 고맙습니다.”
손태민 감독이 끼어들었다.
“야. 넌 강인 씨만 고맙고 스승은 안 고맙냐? 널 학교에서 가르친 거로 부족해서 조감독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도 가르쳐줬잖아. 그러다 강인 씨도 만나게 해줬지. 이런 스승이 어디 있냐?”
변형찬이 웃었다.
“그러게요.”
오규철 셰프가 물었다.
“변 감독님의 스승님이 누구신데요?”
“네? 당연히 손태민 감독님이죠.”
“어? 손 감독님 제자셨어요?”
손태민이 자랑했다.
“내가 왕년에 학교에서 강의할 때 말이야. 쟤가 내 영화 수업을 들었지.”
이번에는 나강인이 물었다.
“손 감독님이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세요?”
손태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왜 이래? 다들 앞으로 나를 손 교수 감독님이라고 부르라고.”
“요즘도 강의하시고요?”
“으응? 아니.”
손태민이 술을 홀짝 마셨다.
“힘들어서 관뒀어. 가르치는 건 할만한데, 난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날짜와 시간 정해놓고 출근하는 게 되게 힘들더라고.”
“역시.”
“뭐지? 왜 강인 씨가 날 막 게으름뱅이 취급하는 거 같지?”
“저도 그렇게 사는데요.”
“그치? 우리 자유로운 영혼끼리 마시자고.”
손태민이 술을 한 잔 더 마신 후에 변형찬에게 말했다.
“네 영화 말이야. 천만 넘겠더라.”
변형찬은 그저 좋아서 웃었다.
“흐흐.
손태민이 툴툴댔다.
“난 천만 넘는데 진짜 오래 걸렸는데 넌 어떻게 한 방에 넘냐? 비결이 뭐냐?”
변형찬이 일부러 손을 비비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아유. 비결이 뭐 따로 있겠습니까? 다 감독님, 아니, 우리 교수 감독님 덕분이죠. 알라뷰?”
“흐흐흐. 그치? 야. 마시자. 마셔.”
술을 몇 잔 더 마신 후에 조금 취한 손태민이 말했다.
“변 감독아. 우리 둘 다 칸에 가면 정말 좋겠지?”
변형찬이 손을 흔들었다.
“에이. 저는 칸은 무리죠.”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네 영화에는 메시지가 있어. 끝내주게 재미있는데 영상도 좋고 메시지까지 있으니까 칸에서 충분히 통해. 만약 그걸 못 알아본다면 심사위원들이 다 눈이 먼 거지.”
“흐흐. 감독님 영화도 진짜 좋잖아요. 칸에 같이 가시죠.”
“내 영화? 그러고 보니까 ‘햇살 좋은 날’은 네가 조감독을 맡았잖아. 두 영화가 다 칸에 가서 수상이라도 하면 넌 진짜 기록 세우겠다.”
“흐흐흐. 그쵸?”
손태민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런데 내 영화는 말이야. 영상이 아름답고 재미도 있는데, 메시지가 약해. 그래서 칸은 좀 어려워. 운이 좋으면 칸에 갈 수도 있겠지만, 수상은 글렀지.”
손태민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 시나리오는 달라.”
“새로 쓰신 시나리오요?”
“어. 영화가 흥행만 보장된다면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 그동안은 망하면 안 되니까 그 이야기를 제대로 못 했는데.”
손태민이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해도 돼. 망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강인이 물었다.
“그 이야기를 왜 저를 보면서 하세요?”
“흥행이 보장되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까?”
“그런데요?”
“강인 씨가 도와줘야 흥행이 보장되지.”
“영화가 액션만으로 흥행이 보장되는 건 아닌데요?”
“당연히.”
손태민이 안주로 차려진 요리를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상, 스토리, 메시지, 그리고 액션까지 재료를 이렇게 조화롭게 섞여야지. 섞는 건 내가 잘할게. 그런데 뚝불에 고기가 빠지면 그게 도대체 뭐야? 짜장면에 짜장이 빠지면 아무리 잘 섞어도 그게 짜장면이냐고.”
“그냥 면인가요?”
“그냥 망한 거지.”
손태민이 나강인을 대놓고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는 꼭 나랑 같이해야 한다?”
“한다니까요.”
“매번 안 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고 말하니까 그러지. 지금 도장 찍을까?”
나강인이 여지를 남겨서 말하는 건 임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해지면 영화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좀….”
손태민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거 봐! 확답을 안 하잖아!”
오규철이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손 감독님 같은 분도 저렇게 조르는데, 나도 강인 씨한테 가면 셰프에 나와달라고 좀 더 졸라봐야겠다.’
손태민이 술을 마시며 예전 이야기를 했다.
“강인 씨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안 그래도 재촬영 스케줄이 급한데 대역 배우까지 다쳐서, 강원도 세트장에서 밥차 땜빵하러 온 사람을 급히 썼잖아. 그게 강인 씨였는데, 써보고 진짜 깜짝 놀랐지.”
그때는 조감독이던 변형찬이 손가락을 꼽으면서 맞장구쳤다.
“그날 놀란 게 어디 한두 개인가요. 강인 씨가 그때 실전 리얼 액션을 처음 보여줬고요. 촬영 도중에 세트장이 무너지는데 거기서 신은하 씨를 데리고 나왔고요. 민지가 납치될 뻔한 것도 강인 씨가 구해줬죠.”
“맞아. 그리고 저녁 밥차에서 강인 씨가 밥을 하는데.”
손태민이 안주를 먹으면서 말했다.
“오 셰프 요리도 물론 맛있지만, 강인 씨가 밥차에서 만들어준 밥을 먹고는 다들 정말 깜짝 놀랐었지. 너무 맛있었거든.”
변형찬도 말했다.
“‘운명의 창’ 촬영 때는 강인 씨가 가끔 밥차에 들어가면 촬영하던 사람들이 다들 눈을 반짝였다니까요. 밥차를 매번 한 건 아니라서 다들 아쉬워했죠.”
오규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강인 씨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어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맛은 저도 낼 수 있는데, 요리하는 속도와 양이 말이 안 되더라고요.”
술이 좀 취한 손태민이 말했다.
“오 셰프는 강인 씨가 가면 셰프에 나갔을 때도 놀란 것 같던데?”
“어? 그건….”
변형찬이 물었다.
“예? 가면 셰프에 강인 씨가…. 어? 앗! 설마 로봇 가면을 쓰고 나왔던, 디저트가 기가 막히던 철인 셰프?”
오규철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출연자 정보는 비밀입니다. 어디 가서 이야기하시면 큰일 납니다.”
“어? 아, 그렇죠. 예. 물론이죠.”
오규철이 손태민을 슬쩍 째려보았다.
“오늘 보니까 손 감독님 입이 좀 가벼우시네요.”
손태민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미안. 편안한 사람들만 있어서 내가 말실수했어.”
밥차 이야기가 나온 후에는 피시방 이야기도 나왔다.
손태민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강인 씨는 요즘도 피시방에서 알바를 해? 거기 가면 밥차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거야?”
“그건 가끔 하는 알바라서요. 거기 가셔봤자 제가 없으면 요리는 안 나와요. 냉동 볶음밥은 나오겠네요.”
“쳇. 차라리 식당을 하나 차리…. 아니지. 차리면 안 되지. 나랑 영화 해야지.”
알바 이야기가 나오자 오규철이 말했다.
“굳이 알바를 하실 거면 단가가 높은 게 낫지 않나요? 내일 저녁때 디저트를 만드는 알바 자리가 하나 있는데, 아마 알바비의 자릿수가 다를 걸요?”
손태민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어허. 훠이. 이상한 거 제안하지 마. 나랑 영화 해야 한다니까?”
“제안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것도 있다고 말만 한 겁니다.”
***
나강인이 이튿날 집에서 일어났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나 보다.”
- 요원님이 숙취를 느낄 정도로 많이 마셨으면, 같이 마신 사람들은 급성 알코올중독으로 죽습니다. 어디서 약을 파십니까?
“넌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도로 누워서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임무 활동예산이 부족합니다. 나가서 예산을 보충하십시오.
“연구비로 들어가는 돈을 예산 쪽으로 좀 돌리면 그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잖아.”
- 유나린 박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비를 좀 챙기겠다고 인류의 미래를 팔아먹을 수는 없습니다.
“거봐. 네 목적은 결국 식비구나. 그리고 연구비 말고도 우리한테 돈 들어올 곳이 좀 있잖아.”
- 출연료 정산일까지 27일 남았습니다.
“어…. 그게 그렇게 많이 남았냐?”
- 앞으로 한 달은 활동예산이 부족합니다.
나강인이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비싼 알바를 뛰어야겠네.”
- 요원님의 강화된 신체 능력이 드러날 수 있는 육체노동형 알바는 자제하십시오.
“어제 술자리에서 들은 거 하려고.”
나강인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가 넘었다. 그는 오규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규철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아. 강인 씨. 잘 들어가셨지요? 어제 세 분이 꽤 마셨는데 말이죠.
오규철도 술을 마시긴 했지만, 그는 오늘 오후에 스케줄이 있어서 과음은 하지 않았다.
-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신지….
“어제 술자리에서 이야기하신 알바 자리 말입니다.”
- 아. 그거요. 오늘 저녁때 파티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디저트를 만드는 알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알바 해보려고요.”
- 예?
“그 자리가 아직 비어 있다면 말이죠.”
- 비어는 있습니다. 저한테 추천 의뢰가 들어와서 오늘 제가 한 명 섭외해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가게가 쉬는 날이라서 디저트 담당을 보내려고 했는데, 어젯밤에 그 녀석이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 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외부에서 새로 알아보려고 했죠.
“제가 하면 딱이겠네요.”
오규철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제 그건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강인 씨의 급이 있는데 그런 자리에 왜…. 아!
오규철은 자기가 말하다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 하긴. 영화나 드라마 현장에선 밥차도 하시고 피시방에서도 밥을 파신다니까, 이것도 그런 거군요.
“그런 거요?”
- 여러 현장에서 생생한 경험을 쌓고, 다양한 환경에서 손님에게 음식을 어떻게 제공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것 말입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런 자세를 배워야 하는데 말이죠.
“아니, 뭐….”
AI 전지인이 말했다.
- 그냥 넘어가십시오. 따져서 뭐하겠습니까?
“뭐, 그렇죠.”
오규철이 장담했다.
- 바로 연락처와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파티 주최 측에는 제가 따로 연락해놓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오 셰프님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네.”
- 알바비의 자릿수가 다르다고 했으니 오늘 수입은 꽤 짭짤할 겁니다. 이거면 며칠은 버틸 수 있습니다.
***
파티는 다섯 시부터 시작됐다.
중견기업 사장 아들이 주최한 그 파티에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사장 본인이 아니라 아들이 주최한 파티라서, 다른 기업에서는 주로 아들딸이 참석했다.
팔성테크 사장의 셋째아들 양용준도 그곳에 왔다.
평소에 좋은 걸 많이 먹고 다닌 그는 파티 요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입이 심심해서 디저트를 하나 집어 먹었다.
“어? 이거 맛있는데?”
그 디저트는 좋은 걸 많이 먹고 다니던 그의 입에도 맛있었다.
“다음 우리 집 파티 때 이 파티시에를 고용해야겠다. 이건 수연이도 좋아하겠어.”
그가 지나가는 직원에게 디저트를 만든 사람을 물었다.
“저쪽에 있습니다.”
그는 직원이 가르쳐준 곳을 보았다.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이 보였다.
양용준이 그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걸었다.
“거기. 잠깐 나 좀…. 어?”
양용준이 걸음을 천천히 멈췄다. 눈은 점점 커졌다.
“어? 어?”
나강인이 고개를 들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권수연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똥덩어리가 나타났습니다.
양용준이 나강인을 가리키며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디저트 만들잖아.”
“뭐? 내가 먹은 게 네가 만든 거였어? 퉤퉤퉤!”
“싸가지 업는 놈. 아예 토하지 그러냐?”
“내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여기서 토하겠냐!”
“너한테 그런 건 없어 보인다만.”
양용준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수연이도 왔어?”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전화라도 걸어보든가.”
“했지! 근데 내 번호를 차단했다고!”
“널 차단한 걸 보면 수연이가 똑똑하긴 해.”
- 권수연은 이라미드 태양전지 최초 개발자입니다. 당연히 똑똑합니다.
양용준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야. 수연이한테 내 번호 차단한 것 좀 풀어달라고 해주면 안 될까?”
“응. 안돼.”
“어? 왜?”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봐라. 왜 안되는지.”
“물어봐도 모르겠다고!”
“어. 그러냐. 계속 몰라라.”
양용준은 입으로 열심히 떠들고 시비도 걸었지만, 나강인의 손이 닿는 거리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양용준의 실수로 팔성테크 보안 창고가 무장 강도들에게 털릴 뻔한 일이 있었다. 그 강도들의 목적은 팔성테크가 개발에 참여한 신형 국산 대전차미사일 샘플이었다.
양용준은 그때 나강인이 그 총기 무장 강도들을 혼자 쓸어버리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그는 나강인의 손이 닿지 않을만한 거리를 유지했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양용준이 주변을 슬쩍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혹시 뭐?”
“여기는 임무 때문에 온 거냐?”
“무슨 헛소리야?”
“우리 회사 보안 창고를 습격했던 놈들처럼, 이 파티도 테러리스트가 습격할까 봐 비밀 신분으로 디저트를 만들…. 어? 근데 디저트가 너무 맛있는데? 도대체 위장이 얼마나 완벽한 거야?”
“위장 아니다. 알바 하러 왔다.”
“응? 정부의 특수요원이 왜 알바를 해?”
“특수요원 아니다.”
“아니, 내가 그날 분명히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