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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하는 히어로-264화 (26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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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선이 나강인에게 정체를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수맥 사기꾼’이었다.

수맥 사기꾼은 그녀가 나강인을 처음 봤을 때 정체를 의심하면서 썼던 말이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때는 제가 오해해서….”

그녀가 얼른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진짜 지질학자인 줄은 몰랐어요.”

“지 실장님은 오늘은 당당하고 도도하게 행동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남들 앞에서 인사하면 그 콘셉트가 깨집니다.”

그녀가 얼른 머리를 들었다.

“아. 네. 조심해야죠.”

그러다 살짝 놀랐다.

“어? 제 모습이 콘셉트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옷과 하이힐은 물론이고 걸음걸이까지 그 느낌에 맞춰져 있었으니까요. 충청도 연구소 앞에서 봤을 때는 흔들거리면서 걸었는데, 오늘은 어깨와 허리에 힘을 빡 주고 걷더군요.”

“어머. 어떻게 걸음걸이만 봐도 그런 게 다 구분되세요? 진짜 대단해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신체 어느 부위에 힘을 주고 걸었는지는 제가 분석했습니다.

“그냥 보니까 알겠더군요.”

지현선이 옷을 확인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도로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이라는 건 무슨 말이에요? 혹시 독립영화 같은 거 찍으신 적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액션만 조금 도와주는 겁니다.”

그녀는 액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강인이 무너지는 건물에서 그녀를 구출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나강인의 움직임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수준인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병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그날 밤에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 깨달았다.

“그날도 힘이나 움직임이 진짜 엄청나셨죠. 아! 그러면 액션 배우….”

그러면 조금 전에 그녀가 아는 배우가 나강인을 부른 호칭이 이상해진다.

“응? 저쪽으로 가신 분이 분명히 감독님이라고 불렀는데요? 어머! 혹시 무술감독?”

“그렇게 부르는 분도 있긴 한데….”

“그럼 혹시 소속 팀이 따로 있는 거예요?”

“저는 뭐, 혼자서 간단하게 합니다.”

“아….”

그녀는 상황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했다.

‘이제야 알았어. 혼자서 무술 대역으로 활동하는구나.’

그녀는 연구소는 알아도 연예계는 잘 모른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외부 업체 사람을 만나면, 혼자 일하는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녀는 방금 왔다 간 배우가 왜 나강인을 감독님이라고 불렀는지도 나름대로 짐작했다.

‘1인 회사가 있는 것처럼 연예계에는 1인 무술감독도 있나 보다. 액션 대역을 잘하는 사람은 그렇게 높여서 부르기도 하나 봐.’

그녀에게 호칭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가 다시 나강인을 보았다.

‘무술 대역 일만 해서는 생활비가 안 나오나 보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알바를 하지.’

나강인을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은 이미 거절당했다. 그 이유도 혼자 짐작했다.

‘연예계에서 일하려면 우리 회사에 정직원으로 입사할 수는 없겠지.’

그녀가 다른 도와줄 방법이 있을까 궁리하다가 손뼉을 쳤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우리 회사 CF에 액션이 들어가는 게 있으면 일을 좀 주자고 해야겠어! 내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빽을 써도 되겠지.’

그녀가 나강인을 보며 밝은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후후후. 조만간 저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선물이 있거든요.”

“나한테 이미 고마워하고 있어야 할 텐데요?”

“물론 고맙죠. 그러니까 이렇게 주고받고 하는 거죠. 호호호.”

다른 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파티에 그녀가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명은 있었다. 그들에게 영광의 상처를 보여줘야 한다.

그녀가 나강인을 향해 다시 웃어준 후에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다시 당당하고 도도해졌다.

나강인이 그런 그녀를 보며 작게 말했다.

“줄 게 있으면 그냥 현금으로 주지 말이야. 임무 활동예산으로 쓰게.”

- 그러게 말입니다.

***

지현선은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나강인 쪽을 힐끗거렸다. 백미소가 나강인의 곁에 가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둘이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괜히 그 근처를 슬쩍 지나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조금 엿들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처음 봤을 때는 백미소가 수맥으로 사기나 치고 다니는 제비에게 걸렸다고 착각했다.

이제 나강인이 수맥 사기꾼이나 제비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오간 대화를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또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그냥 잘 아는 사이인가 봐? 비즈니스 관계인가?’

***

나강인이 오늘 이 파티에서 하기로 한 일은 디저트를 만들어 제공하는 것뿐이다. 파티의 마무리나 뒷정리는 다른 업체의 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원하면 포장해 갈 수도 있을 만큼 디저트를 만들어주고 일을 마무리했다.

그는 파티가 끝나기 전에 그곳을 벗어났다.

백미소가 얼른 다가와 물었다.

“앗! 벌써 가게요?”

“내 일은 끝났으니까요.”

“좀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쳇.”

백미소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나도 지금 갈 테니까 강인 씨 차에 나 좀 태워줘요.”

“백 대리님 차는요?”

“지구뷰티 연구소 폭발 사건 때 망가진 거 봤잖아요. 정비소에 들어가 있어요.”

“부잣집 딸은 차가 여러 대일 줄 알았는데.”

“직급은 대리잖아요.”

직급이 대리라는 건 핑계지만, 차가 한 대라는 것과 그 차가 정비소에 들어가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녀는 이곳에 올 때는 모범택시를 이용했다. 갈 때도 그러면 된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뭐, 같이 갑시다.”

그녀가 씩 웃으며 나강인을 따라갔다.

차에 탄 후에 나강인이 물었다.

“전철역까지 태워드리면 되지요?”

그럴 거면 이 차를 얻어타지도 않았다.

“아뇨. 우리 동네에 커피 맛있게 하는 카페가 있어요. 오늘 커피를 안 마셨더니 지금 당장 카페인이 필요해요.”

“여기 커피도 맛있던데.”

“안 마셨다니까요?”

이 핑계를 만들려고 일부러 안 마셨다.

“얼른 가요. 고고!”

지현선은 나강인이 일을 마무리 짓고 나올 때 파티장을 떠났다.

그녀는 원래는 더 일찍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강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예정보다 오래 있었다.

그녀는 나강인을 따라 나왔다가 두 사람이 차에 타기 전에 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차가… 되게 낡았네.”

나강인은 폐차장에 갈 뻔한 차를 사서 고치고 개조했다. 차의 연식도 오래됐다.

게다가 지난번 폭발 사고 때 그 차로 도로 위의 나무들을 부수며 달렸다. 방탄판이 추가되고 차체도 보강되어 있어서 그러고도 찌그러진 곳은 없지만, 장애물을 쳐낼 때 차체 곳곳의 페인트가 긁히고 벗겨졌다.

그래서 그 차는 겉모습만 보면 겨우 굴러가는 낡은 차로 보였다.

“역시 어렵게 사는구나. 재야 지질학자라서 그 일은 돈이 안 되고, 무술 대역도 돈이 안 되는 일이라서 그렇겠지.”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역시 내가 좀 도와줘야겠어.”

***

지구뷰티가 새로 지은 바이오 헬스 연구소가 무너졌다.

그 회사의 바이오 헬스 연구 부서는 원래는 서울 외곽에 있는 화장품 연구소의 한 구역을 사용했다. 서울 연구소에 있던 바이오 헬스 연구원들은 충청도 연구소로 하나둘씩 옮겨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새로 지은 연구소가 무너졌다. 당연히 바이오 부서 이전 계획은 완전히 취소되었다. 이미 이사 갔던 팀들도 모두 서울 연구소로 복귀했다.

연구소 공간을 넓게 쓰게 될 줄 알았던 타 부서에서 불만이 쏟아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현선도 서울 연구소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사고로 팔을 다쳐서 며칠간 병가를 낸 상태다.

그녀는 연구소가 아니라 본사로 갔다. 그곳에서 홍보부서의 CF 제작팀장을 만났다.

팀장이 회의실에서 인사 삼아 걱정하는 말을 건넸다.

“다치신 팔은 괜찮으세요?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했습니다.”

“괜찮아요. 며칠 뒤에는 깁스도 풀 거예요.”

의사는 깁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회사 홍보팀에서는 며칠이라도 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사고 현장에서 지 실장님이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면서요? 요즘 회사 내에서 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장님도 자랑스러워하시겠네요.”

“아빠는… 연구소가 날아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계세요.”

“아…. 그러시겠죠. 그래도 보험이 있으니까….”

“돈은 보험사한테 받으면 되지만, 시간은 못 돌려받잖아요. 언제 다시 바이오 헬스 연구소를 짓겠어요.”

“그렇죠. 서울 연구소가 다시 북적거리겠네요.”

인사 삼아 오간 잡담이 끝나고 나서 지현선이 본론을 꺼냈다.

“혹시 우리 회사에서 CF 제작할 거 있나요?”

“많죠. 우리 정도 되는 화장품회사가 CF를 안 만들면 증권시장에 자금난 온 거 아니냐는 찌라시가 돌 겁니다.”

“그럼 제작 예정인 CF 중에 액션 대역이 필요한 것도 있어요?”

“스포츠 화장품이 하나 있습니다.”

지현선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 대역 자리에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액션 대역 배우인데요. 실력은 좋을 거예요. 혹시 가능할까요?”

CF 제작팀장이 활짝 웃었다.

“뜸을 들이면서 말씀하시길래 배우라도 꽂으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얼굴이 나오는 주연도 아니고 액션 대역인데 실장님이 원하는 사람을 쓰면 되죠. 하하하.”

“어머. 고마워요.”

“충청도 연구소에서 제가 아는 녀석이 몇 명 일했는데, 그 녀석들이 지 실장님 덕분에 살았다더군요. 제가 더 고맙지요.”

“아! 제가 추천하는 분이 그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그래요? 그럼 제가 더 적극적으로 밀어야겠네요. 그래서 그 액션 대역 배우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제가 오늘 당장 연락하겠습니다.”

지현선은 살짝 당황했다.

“어…. 그게요. 연락처는 모르고 이름만 알아요.”

팀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거면 됩니다. CF 제작을 맡길 업체에 대역 배우의 이름을 이야기해주면 간단히 찾아낼 겁니다.”

지현선은 나강인의 이름을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적은 없다. 그런데 파티에 참석했던 배우는 나강인을 ‘나 감독’이라고 불렀다.

“성은 나 씨고요.”

“예. 이름은요?”

그녀는 백미소가 나강인의 차에 탈 때 불렀던 이름을 말했다.

“강인이요.”

화장품회사 지구뷰티의 CF 제작팀장이 멈칫했다.

“예? 누구라고요?”

“나… 강인. 그러니까 나강인이요.”

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지현선은 팀장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혹시 아는 분이요?”

“직접 만난 적은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모릅니다만, 누군지는 압니다.”

지현선은 팀장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걱정이 들었다.

“혹시 무슨 나쁜 짓이라도…. 아! 수맥 사기 같은 거 치는 분은 절대로 아니에요.”

팀장이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그렇게 아는 게 아닙니다. 나강인 씨가 수맥 사기라뇨. 농담도 참. 하하하.”

이번에는 팀장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지 실장님. 제가 먼저 묻고 싶은데요. 나강인 씨가 우리 CF의 액션을 맡아주겠답니까?”

지현선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 CF에 액션 대역 자리가 있는지부터 확인하려고 왔어요. 이제 자리가 있는 걸 알았으니까 나강인 씨에게 그 자리를 주려고요.”

팀장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어…. 지 실장님. 제가 잘못 이해한 거면 말씀해 주시죠. 그러니까, 지금 나강인 씨를 우리 CF의 액션 대역 자리에 꽂으시겠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어떻게요?”

지현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방금 팀장님이 오케이 하셨잖아요. 그러면 된 거 아니에요?”

“제가 오케이 한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나강인 씨가 오케이 해야죠.”

지현선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팀장도 대답을 기다리다가 상황을 깨닫고 손뼉을 쳤다.

“아! 모르시는구나!”

“제가 뭘 모른다는 건데요?”

팀장이 설명했다.

“사실 그 CF는 나강인 씨에게 액션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이미 했습니다.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임시로 나강인 씨의 매니저를 봐준다고 알려진 박우섭 실장을 통해서 제안했죠.”

“네? 벌써요?”

“당연하죠.”

지현선이 반가워했다.

“아. 그럼 그분이 우리 CF를 하겠네요?”

‘내가 직접 그 자리에 꽂아주는 건 아니라 생색은 못 내겠지만,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는구나.’

팀장이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죠. 섭외에 실패했습니다.”

지현선은 당황했다.

“네? 왜요? 출연료를 너무 싸게 부르셨어요?”

“출연료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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