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65화 (265/411)

265. 나강인 효과

지현선이 지구뷰티의 CF 제작팀장에게 물었다.

“왜요? 나강인 씨 쪽에서 우리 회사 기준보다 높은 CF 출연료를 이야기하던가요? 큰 차이 안 나면 좀 맞춰주시지.”

“아니요. 출연료가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준다고 해서 섭외가 되는 분도 아니…. 어?”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 실장님이 나강인 씨를 우리 CF에 꽂고 싶다면서요? 그런데도 어떤 분인지 잘 모르시나요?”

“만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사실은 얼굴하고 이름밖에 몰라요.”

그녀가 나강인에 대해 아는 게 또 있긴 하다. 그건 바로 어제 파티에서 직접 보았다.

“아! 요리사 일도 해요. 디저트가 정말 맛있어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나강인표 요리 말씀이시군요.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네? 무슨 표 요리요?”

“나강인표 요리는 연예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그런데 나강인 씨가 식당을 운영하는 건 아니라서, 그 요리는 현장에서 같이 촬영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가까워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경도 못 해 봤죠.”

“네?”

“이거 괜히 요리 이야기를…. 하하하.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우리가 먼저 나강인 씨를 스포츠 화장품 CF에 섭외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

지현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나강인은 폐차 직전의 낡은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생활비는 무술 대역이나 어제 본 것처럼 파티 알바 일을 해서 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강인을 회사가 제작하는 CF의 무술 대역 자리에 꽂아주려고 제작팀장을 만났는데, 팀장의 이야기는 많이 달랐다.

그녀가 손을 들어 이마를 잠깐 짚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나강인 씨를 먼저 섭외하려고 했는데, 출연료 문제가 아니라 그냥 거절당했다는 거죠?”

“그렇죠. 나강인 씨는 원래 섭외하기 굉장히 어려운 분입니다.”

지현선이 자기 나름대로 그 말을 이해했다.

‘액션 대역배우 중에서 잘나가는 편인가보다.’

“그러면요. 나강인 씨는 우리가 섭외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에서 활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스케줄을 못 빼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지금은 들어간 작품이 없다고 들었거든요.”

“네? 없어요?”

지현선은 나강인이 가난하지만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일을 많이 받아야 하지 않나?’

“왜 거절했대요? 혹시 우리 회사가 부모님의 원수라든지….”

팀장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그런 거 아닙니다.”

팀장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나강인 씨가 무술감독으로 작품에 참여한 경우는 몇 번 없습니다. CF를 포함해도 몇 번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시간 많을 텐데, 섭외하기 어렵다면서요.”

“일을 잘 안 받으니까 섭외하기 어렵죠.”

“저 진짜 이해가 안 가요. 일을 왜 안 받아요?”

“저도 업계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들이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따로 하는 일이 많아서 무술감독 일은 거의 안 맡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따로 하는 일이라는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재야 지질학자로 활동하느라…. 본업이 액션 배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나처럼 과학자였구나.”

이번에는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지질학자요? 그건 처음 듣는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팀장님. 나강인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참여했다는 몇 개의 작품 중에 혹시 제가 아는 영화도 있을까요?”

“당연히 있겠죠?”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취미 중 하나는 영화를 보는 것이다.

“제가 본 영화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어떤 작품이에요?”

“일단 ‘햇살 좋은 날’ 아시죠?”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예요. 영화관에서 두 번 봤어요. 그럼 그 영화에서 액션을 연기한 배우들 중에….”

“나강인 씨가 그 영화의 무술감독입니다.”

그녀가 멈칫했다.

“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자막으로 나오는 엔딩 크래딧에는 무술감독 이름이 없었다. 나강인이 넣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팀장이 물었다.

“드라마 ‘푸른 하늘’ 아시죠?”

“아, 알죠. 특히 중반부터 나오는 명품 액션이 정말 좋았어요.”

“나강인 씨가 그 드라마 중반부터 무술감독을 맡았습니다.”

“진짜요?”

“그리고 ‘운명의 창’ 아시죠?”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그녀는 그 영화도 영화관에서 보았다. 너무 감동해서 또 보려고 영화표도 다시 예매했다.

그런데 영화를 봐야 하는 날에 연구소 붕괴사고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표를 날렸다.

CF 제작팀장이 말했다.

“나강인 씨가 그 영화의 무술감독입니다.”

“지, 진짜요?”

“영화 엔딩 크레딧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이 업계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 그 몇 개 없다는 작품이….”

“천만 영화 ‘햇살 좋은 날’, 청춘 드라마가 중반부터 명품 액션 드라마로 바뀌었다고 평가받고 시청률도 높아진 ‘푸른 하늘’, 그리고 현재 극장가 최고의 히트작인 ‘운명의 창’. 셋 다 대박을 쳤죠. 이쯤 되면 뭐, 흥행 보증수표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현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런 분이 왜 남의 파티에서 요리 알바를….”

“원래 요리를 좋아하셔서, 촬영장에서는 밥차도 하고 그러신답니다.”

“네?”

“취미 같은 거겠죠. 취미치고는 나강인표 요리가 연예계에서 워낙 유명하긴 합니다만.”

그녀는 파티장에서 만난 배우가 나강인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 나 감독님이 만드신 디저트라니. 어쩐지 맛있다 했습니다.

- 이러고 계시니까 그 유명한 촬영장의 밥차가 생각나네요.

그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래서….”

“생각난 게 있으십니까?”

“어제 파티에서 디저트를 만드셨거든요.”

“어제요? 미리 알았으면 그 파티에 참석할 사람이 많았을 텐데요. 우리 홍보실도 어떻게든 초대장을 구했을 테고요.”

“홍보실도 그 파티는 알았어요. 저보고 참석해달라고 했거든요.”

“아! 그 파티? 회의 시간에 들었습니다. 나강인 씨가 디저트를 만든다는 건 몰랐지만요.”

팀장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알았으면 제가 갔죠.”

“그, 그래요”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거기선 나강인 씨를 어떻게 섭외한 거지? 운이 좋았나?”

지현선은 어제 나강인에게 구내식당 취업을 제안했다. 그가 그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 이제 깨달았다. 보안팀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창피했다.

‘그런 사람한테 내가 뭘 제안한 거야. CF 액션 대역 자리 이야기는 미리 안 해서 다행이다. 그것까지 말했으면 창피해서 죽어버렸을 거야.’

CF 제작팀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지 실장님.”

“네?”

“나강인 씨와 따로 만날 수 있는 사이시면요. 우리 이번 CF 좀 맡아달라고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그럴 수 있는 사이인 줄 알았다. 자리를 제안하면 나강인이 고마워하면서 넙죽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듣고 보니 말해봤자 씨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CF 대역은 누가 맡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냥 없던 일이다 생각하시고 다른 분을 찾으시죠.”

“마찬가지라니요. 그건 아니죠.”

“네?”

“스포츠 화장품은 나강인 씨가 참여하면 CF의 격이 달라집니다.”

“영화도 아니고 CF인데….”

“백한수려에서 저번에 나온 스포츠 화장품 CF 아시죠?”

“알죠. 무명 아이돌이 여러 명 나온 CF요.”

그 CF는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이 찍었다.

유명 배우를 쓰지 않았는데도 그 CF에 나온 스포츠 화장품은 시장에서 잘 팔렸다. 그녀는 백미소가 그 CF의 담당자였다고 자랑하는 걸 들었다.

“그 CF의 액션을 나강인이 맡았습니다.”

“아. 그걸….”

‘그래서 둘이 아는 사이구나.’

팀장이 말했다.

“영화든 드라마든, 심지어 CF까지 나강인 효과는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팀장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지 실장님이 나강인 씨에게 이야기 좀 잘 해주십시오. 어떤 조건이든 회사에서 다 맞춰줄 테니까요.”

“아니, 전, 연락처도 몰라요.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까 그건 조금….”

“에이. 이제 와서 그런 말 하셔도 늦었습니다. 연락할 방법이 있으니까 나강인 씨를 우리 CF에 꽂아주자는 제한을 하셨을 거 아닙니까?”

그 말을 들으니 또 부끄러워졌다.

“아! 저는 약속이 또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호, 호호.”

당황한 지연선이 매달리는 팀장을 뿌리치고 본사를 나왔다.

그녀는 본사 건물 밖으로 나온 후에 달아오른 얼굴에 손바람을 부쳤다.

“와. 진짜 창피해서 죽을 뻔했다.”

그녀는 나강인의 연락처를 모른다. 그렇다고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음….”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백미소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 왜 전화야?

“나와. 커피나 마시자.”

- 우리가 둘이서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떠는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그 재난 현장에서 같이 살아나온 사람끼리 커피 한 잔은 괜찮잖아?”

- 으…. 알았어.

***

지구뷰티와 백한수려 본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두 사람은 중간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백미소가 물었다.

“팔 그거 아직도 깁스를 하고 있어? 크게 다친 거 아니라던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 아! 강인 씨가 그때 그렇게 진단했지. 지질 구조만 전문가가 아니라 의학지식도 상당한가 봐?”

“운동을 워낙 잘해서 그런지 사람 몸을 잘 알더라고.”

“되게 지적인 사람이다.”

백미소가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유를 깨달았다.

얼마 전에 병실에서 지현선이 나강인의 이름이라고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백미소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름을 알아왔다.

“야! 잠깐! 너 강인 씨 이름은 어떻게 알아냈어?”

파티장 주차장에서 두 사람이 차에 탈 때 백미소가 말한 이름을 엿들었다.

지현선이 씩 웃었다.

“훗. 업계에서 유명하더라? 숨기면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쳇. 계속 모를 줄 알았는데.”

“나강인 씨 좀 만나게 해줘.”

백미소가 정색했다.

“꺼져.”

“야!”

“다른 할 이야기 없으면 난 간다.”

“생명의 은인한테 밥이라도 사고 싶어서 그래!”

“어디 겨우 한 번 구해진 거로 비벼?”

“응?”

“그런 게 있어. 하여간 수작 부리지 마라.”

지현선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씨. 안 믿어지면 너도 같이 나오던가!”

같이 나오라는 말에 백미소가 멈칫했다.

‘어? 가만.’

그녀는 어제 나강인과 진짜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다. 원래는 술도 마시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강인 씨가 얘를 평가할 때 분명히 싸가지가 좀 없다고 했단 말이야. 일단 성격은 내가 확실히 이겼네?’

절벽이 붕괴하기 직전에 산속 식당에서 나강인이 백미소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렇게 말했다.

백미소는 그때 그 말이 마음에 들어서 그 식당의 음식을 종류별로 다 시켰다.

백미소가 지현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지현선은 연구소에 있을 때처럼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반면에 백미소는 스타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같이 있으면 딱 봐도 내가 훨씬 낫잖아? 그럼 얘가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겠는데? 내가 얘를 핑계로 강인 씨를 불러낼 수 있겠는데?’

백미소가 씩 웃었다.

“알았어. 연락은 해볼게.”

***

인터넷에 영상이 하나 떴다.

지구뷰티 연구소 붕괴 사건 때 나강인이 사람들을 구출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찍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속 식당에는 영상을 찍은 사람은 있었다.

그 영상도 절벽에서 폭탄이 터질 때부터 찍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산사태가 일어날 때부터는 영상이 쭉 찍혔다.

멀리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이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그 영상이 올라왔다. 그 밑에 댓글이 잔뜩 붙었다.

- 와. 이 붕괴사고를 뉴스에서 봤는데, 이런 영상이 있었네요.

- TV 뉴스는 다 무너진 잔해만 나왔는데 이건 현장 상황 영상이군요.

- 방송국 일해라.

- 사고가 터질 줄 어떻게 미리 알고 일하나요.

-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았다면, 방송국이 범인이죠.

영상 중간에 산사태로 기울어진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등장했다. 멀리서 찍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사람이 무너지기 직전인 건물에 들어간다는 걸 알아볼 수는 있었다.

- 와. 저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걸 보고 당황했는데, 생존자들을 연달아 구출하는 거 보고 감탄했습니다.

- 뉴스에 기사로 났습니다. 저 사람이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여섯 명이나 구출했다더라고요. 그래서 사망자가 없는 거랍니다.

-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 기자들이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른다던데요.

- 지나가던 사람인가?

-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지현선도 그때는 나강인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백미소가 안다는 것만 알았다.

게다가 지현선은 그때 병원으로 가는 바람에 취재 대상이 되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인터넷에서 그 영상을 찾아냈다.

- 찍혔습니다.

나강인이 영상을 확인하고 댓글을 읽으며 말했다.

“사진 찍은 위치가 그 식당이지?”

- 백미소와 점심을 먹던 산속 식당입니다. 맛있었는데 다 먹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영상 봤어도 모르는척하라고 이야기해야겠다.”

나강인이 백미소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가 먼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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