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66화 (266/411)

266. 개꿀

나강인이 백미소의 전화를 받았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에 백미소가 상황을 설명했다.

- 그래서 현선이가, 그러니까 지구뷰티의 바이오 헬스 연구소 지현선 실장이 고맙다고 밥이라도 한 번 사겠대요.

“뭘 굳이….”

백미소가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 그쵸? 내가 사야 할 밥이 훨씬 더 많은데, 그것도 아직 못 샀는데 말이죠.

“그것도 뭐….”

AI 전지인이 끼어들었다.

- 요원님. 좋은 거 먹으러 가시죠. 목숨 구해준 값으로 식사 한 번 정도는 받아도 되잖습니까?

“넌 역시 밥이 목적이냐?”

- 활동예산이 떨어져 갑니다. 현재 예산 상황으로는 국밥은 먹어도 페넬로페는 못 갑니다. 남이 사준다고 할 때 가면 우리도 좋고 페넬로페도 좋습니다.

나강인이 모니터 속 영상을 보았다. 지구뷰티 연구소 붕괴 현장에서 나강인이 지현선을 구출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상황을 정리하려면 만나긴 해야겠지.”

나강인이 백미소에게 말했다.

“굳이 밥을 사겠다면야, 한 끼 정도는 뭐 괜찮겠지요.”

말을 전해준 백미소가 오히려 툴툴댔다.

- 괜찮으시구나. 한 방에 그러자고 하시는구나. 내가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나랑은 안 먹더니.

“그건 시간이 안 맞았죠. 백 대리님은 바쁠 때만 전화하던데요.”

“알았어요. 그리고 두 사람만 만나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내가 사이에 있을게요.

“그것도 좋겠네요.”

백미소의 목소리가 대놓고 밝아졌다.

- 그쵸? 역시 그래야 맞죠? 그럼 장소는 내가 섭외할게요.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 페넬로페!

나강인이 물었다.

“레스토랑 페넬로페를 아십니까? 난 거기가 좋은데.”

- 아. 거기요. 알죠. 그런데 거기는 예약이 이미…. 아니다. 그거야 현선이가 알아서 해결하겠죠.

***

지현선은 화장품회사 지구뷰티의 연예계 인맥을 동원해 그날 당장 자리를 만들어냈다.

백미소와 지현선이 비슷하게 페넬로페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백미소가 먼저 물었다.

“일찍 왔네?”

“나 약속에 늦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웃기시네. 너 평소에는 사람 기다리게 하는 일 많잖아.”

“그거야 실험하던 걸 멈출 수가 없어서 몇 번 그런 거고.”

“여러 번이라던데? 소문이 파다해.”

“아니거든?”

이번에는 지현선이 물었다.

“진짜 오시는 거 맞지?”

“속고만 살았니?”

“그런데 왜 아직도 안 오셔?”

“우리가 일찍 왔다는 생각은 안 드니?”

지현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남자가 일찍 오는 거 아녔어?”

백미소가 즉시 타박했다.

“얘가 어디서 남자 타령이야? 순수하게 감사의 표시로 밥 한 끼 사는 거라며?”

“그야 그치만….”

“어째 안 순수해 보인다?”

나강인이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앉은 자리의 차이 때문에 지현선이 나강인을 먼저 발견했다.

“어? 왔다!”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직원들은 나강인을 안다. 그들이 국제 용병 자칼 일당에게 붙잡혔을 때 나강인이 구하러 와준 데다가, 그 이후에도 가끔 들러 식사를 했다. 나강인이 직원들에게 요리를 만들어준 적도 있다.

입구에 있던 젊은 여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어머. 나 감독님 오셨어요?”

“갑자기 감독님이라니요?”

“호호. 휴일에 ‘운명의 창’을 보고 엄청 감동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감독님이라고 부르려고요.”

“그러지 말아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라.”

“에이. 왜요. 여기 자주 오시냐고 물어본 손님들이 있었는데, 그분들도 나 감독님이라고 하던데요?”

나강인이 안으로 들어가며 혼잣말을 했다.

“이상하게 요새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늘었단 말이야.”

이번에는 대표 셰프 오규철이 다가왔다.

“강인 씨가 연락도 없이 온 걸 보면, 오늘 예약한 일행이 따로 있겠군요.”

나강인이 안쪽을 보았다. 백미소가 손을 흔들었다.

“저기 있네요.”

“아. 저 자리는 지구뷰티….”

오규철은 멈칫했다.

“어? 잠깐만요. 아까 지구뷰티에서 갑자기 연예계 인맥을 동원해서 예약석을 부탁했거든요? 테이블을 새로 꺼내서라도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왜 꼭 여기여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오규철이 목소리를 낮췄다.

“강인 씨군요?”

“뭐가요?”

“지구뷰티 연구소 붕괴 동영상은 저도 봤습니다. 그 영상 속 사람 말입니다.”

“뭐, 그렇죠.”

오규철이 활짝 웃었다.

“이야아. 역시! 하긴.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강인 씨밖에 없죠. 진즉에 깨달았어야 했는데요.”

“오늘은 지구뷰티에 그걸 소문내지 말라고 말하려고 왔습니다.”

“아! 이번에도 그렇군요. 저도 우리 직원들하고만 알고 있겠습니다. 흐흐흐.”

지현선은 나강인이 입구 쪽 여자 직원과 웃으면서 대화하는 걸 보고 상황을 잠깐 오해했다.

‘저 여자 직원하고 잘 아는 사이라서 여기서 보자고 했나? 무슨 사이지?’

그런데 오규철과도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걸 보고 살짝 놀랐다.

‘응? 오규철 셰프와도 아는 사이였어?’

오규철은 방송활동을 하는 셰프다. 그가 참여하는 예능 ‘가면 셰프’는 지현선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 즐겨 보던 방송이다.

‘무술감독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들었는데, 예능 쪽도 인맥이 꽤 있나 보다.’

나강인이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지현선과 백미소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백미소가 씩 웃었다.

‘누구 옆자리에 앉을까? 강인 씨가 쟤는 싸가지가 좀 없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내 옆자리겠지?’

나강인이 의자를 하나 빼서 두 사람의 중간인 사각형 테이블의 다른 면에 앉았다.

백미소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쳇.”

‘거리를 좁혀주질 않는단 말이야.’

나강인이 말했다.

“오늘 누가 밥을 산다길래 왔습니다.”

지현선이 얼른 대답했다.

“네! 제가 살 거예요.”

페넬로페는 손님이 주문하는 곳이 아니라 셰프가 주는 대로 먹는 곳이다.

오규철이 싱글벙글 웃으며 요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오규철이 요리를 두고 간 후에 지현선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인사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밥이라고 사고 싶었어요.”

백미소가 자랑했다.

“넌 고마운 일이 한 번이지? 난 강인 씨가 그날 하루에 두 번이나 구해주셨다?”

“그날 우리 연구소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구해주셨는지 알잖아.”

“우리 회사는 안 그런 줄 알아? 그렇게 따지면 서울 시민 중에도…. 아, 아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알면 다쳐. 알려고 하지도 마.”

VTX-13을 싣고 가던 화물차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폭발할 뻔했다는 건,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공개 정보다.

두 사람이 서로 신경전을 하든 말든 나강인은 밥이나 먹었다.

“오늘도 맛있네.”

- 오규철 셰프의 요리는 역시 맛있습니다.

두 사람도 나강인이 먹는 걸 보고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을 먹는 도중에 지현선이 슬쩍 제안했다.

“우리 회사에서 스포츠 화장품 CF를 하나 제작할 건데요. 연구소 사건 때 도와주신 것도 고맙고 해서, 저희 쪽에서 최고의 대우로 나강인 씨를 모시고 싶어요.”

그건 CF 제작팀장이 제발 말이라도 꺼내달라고 부탁한 일이다. 팀장의 부탁과는 별개로, 지현선도 회사 CF에 나강인이 나왔으면 한다.

백미소가 즉시 견제했다.

“야. 강인 씨는 우리 회사랑 먼저 화장품 CF를 찍었잖아! 경쟁사 걸 또 찍으면 도의적으로 아니지! 애당초 제안하는 것부터가 무례한 짓이라고!”

“어머. 나도 그 CF 봤거든? 나강인 씨가 직접 출연한 건 아니던데? 카메라 앞에 나온 건 아니니까 경쟁사 작품을 맡을 수도 있지.”

“강인 씨도 카메라 앞에 있었어!”

“거짓말.”

“녹색 쫄쫄이를 입고….”

나강인이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백미소가 얼른 사과했다.

“아, 죄송. 그 쫄쫄이 안 좋아하시죠.”

지현선은 백미소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즉시 추가 제안을 했다.

“나강인 씨. 우리 회사에 화장품 CF만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회사의 건강식품 CF에 직접 출연하시면….”

CF 제작팀장은 스포츠 화장품 CF를 더 원하지만, 실패하면 차선책으로 건강식품 CF라도 제안해달라고 부탁했다.

나강인이 딱 잘라 거절했다.

“방송에 얼굴 나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일반인들이 쉽게 알 정도로 얼굴이 팔리면 임무 수행에 방해된다.

“그럼 무술감독으로 참여하셔도 되죠!”

그 건강식품 CF에는 액션이 없다. 그런데 CF 제작팀장은 나강인을 데려오면 콘셉트를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무술감독이라…. 지 실장님은 연예계와 상관없는 분으로 아는데,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군요.”

“우리 회사 CF 제작팀장님이 나강인 씨의 이름을 아시더라고요.”

나강인이 도로 물었다.

“연구소 붕괴 사건과 CF를 연결해서 홍보에 활용할 계획도 있겠네요?”

“그렇죠. 생존자 구출 장면과 CF를 연결하면 효과가 진짜 좋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름이 퍼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지금처럼 연예계 내에서만 조금 알려진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

그녀가 아쉬워했다.

“회사 차원에서 나강인 씨가 우리 연구소 사람들을 구해준 이야기를 널리 알리려고 했어요. 의인상 같은 것도 드리고요. 아직 나강인 씨의 의견을 못 여쭤봐서 내부적으로 준비만 하고 있는데….”

백미소가 끼어들었다.

“위해주는 척하네. 연구소가 무너진 일로 회사가 욕먹는 사태를 미리 막으려고 그러는 거겠지.”

“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나도 화장품회사 다니는데 어딜 아닌 척은. 사장 딸인 연구원이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구출됐다는 이야기. 그거 크게 띄우면 회사 이미지가 괜찮아질 거 같지?”

지현선은 당당했다.

“사실이잖아.”

“사실이긴 하지. 그럼 경쟁 회사 사장 딸이 강인 씨하고 같이 가서 미리 경고했는데, 너희 회사 사장 딸인 네가 무시한 것도 알려야겠네?”

“으응?”

“네가 사람들을 대피시킨 방법도 우리가 전화로 알려줬다는 것도 공개할 거지? 와아. 그럼 네가 아니라 경쟁사 사람들을 위해 경고한 내가 뜨겠네?”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

백미소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거봐. 의도가 순수하지 않아.”

지현선이 반박했다.

“난 순수한 마음이야!”

“실속은 다 챙기려고 하면서 순수하기는.”

“내가 아니라 홍보팀이 안 순수한 거야! 그 사람들은 그게 일이니까!”

나강인이 선언했다.

“상을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미리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도 달갑지 않고요.”

지현선이 백미소를 째려본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홍보실에서 강인 씨에 관한 건 따로 언급하지 않게 잘 단속할게요. 어차피 쟤까지 띄우긴 싫었으니까요.”

대화가 그쪽으로 간 김에 나강인이 오늘 여기 온 이유를 꺼냈다.

“인터넷에 우리가 탈출하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떴더군요.”

“아. 그거요! 저도 봤어요.”

“영상을 내리게 해달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온 부분을 홍보에 이용하려고 하지 마시죠.”

“아…. 네. 그것도 제가 홍보팀에 확실히 이야기할게요.”

“그리고.”

나강인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지구뷰티 약품 창고에 VTX-13이 있었더군요.”

지현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화장품 원료잖아요. 그게 왜요?”

“모르셨군요.”

“왜 그 이야기를….”

옆에서 백미소가 화를 벌컥 냈다.

“야! 그게 왜 너희 회사에 있어!”

“왜 있기는. 우리 제품과 비교 테스트를 하려고 사뒀지. 성분을 분석하려고 산 건 아니야.”

“다 해봤을 텐데 아니긴! 그리고 그게 아니라, 전부 반납하라고 했잖아!”

“응? 왜?”

“왜냐니. 그건….”

VTX-13을 다른 물질과 섞으면 강력한 폭탄이 된다. 그 정보는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백한수려는 그 정보가 더 퍼지기 전에 외부에 있는 VTX-13을 모두 회수하려고 노력했다.

백미소는 걱정이 들었다.

‘혹시 아직도 숨겨둔 게 더 있는 거 아냐?’

이미 연구소 앞에서 폭탄이 터졌다. 그런 일이 또 생기는 건 막아야 한다.

백미소가 주변을 슬쩍 본 후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VTX-13은 폭탄의 원료로 쓸 수 있어.”

“응?”

백미소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이제 알겠다! 너희 연구소 앞에서 터진 폭탄! 범인들이 그걸로 폭탄을 만들어서 터트렸구나.”

“으응?”

“폭탄 재료가 너희 약품 창고에 있었다고.”

지현선도 상황을 깨닫고 항의했다.

“그렇게 위험한 걸 왜 우리한테 팔아!”

“원래는 피부재생 화장품 원료였어! 강인 씨가 가르쳐줄 때까지는 우리도 폭탄이 될 줄 몰랐어!”

“나강인 씨가 가르쳐줘? 그게 무슨 소리야? 지질학자 아니야?”

“화학의 천재시다! 그리고 너희 회사는 분명히 남은 재고를 다 반납했다고 했단 말이야! 왜 그걸 숨겨두는데!”

백미소가 화를 내자 지현선도 화가 난다.

“야! 그게 뭐든 우리가 돈 주고 산 거야! 돌려줄 의무는 없다고!”

“위험물질이니까 돌려줘야지! 이 문제는 정식으로 따질 거야!”

“따지든가!”

두 사람은 싸우느라 바빠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강인만 느긋하게 요리를 덜어 먹으며 말했다.

“맛있네.”

- 저 두 사람은 밥을 먹을 분위기가 아니니까, 이제부터 나오는 요리는 우리가 다 먹어도 됩니다. 개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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