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블러드 아이스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요리는 나강인만 맛있게 먹었다. 지현선과 백미소는 서로 견제하고 으르렁대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강인은 식사 중간에 전화를 받으러 레스토랑 한쪽으로 갔다.
“예. 거기서 뵙지요.”
나강인이 통화를 마치자마자 대표 셰프 오규철이 다가와 슬쩍 물었다.
“강인 씨. 어쩌다 라이벌 회사의 두 사람을 같이 데려오신 겁니까?”
“저 두 사람이 먼저 연락해서 밥을 산다고 한 겁니다. 근데 둘이 좀 많이 싸우죠?”
“작은 소리로 말하니까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는데, 분위기가 참 살벌하네요. 총이라도 주면 서로 쏘겠는데요?”
“앞으로 나올 요리 중에 칼로 썰어 먹는 게 있으면 그건 제외하시죠?”
“에이 설마 찌르…. 빼야겠네요.”
***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온 후에 나강인이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혼자만 잘 먹었다.
지현선은 다소곳이 서서 나강인이 다음에는 자기가 사겠다고 말하길 기다렸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럼 입단속 잘 해주시고, 저는 약속이 또 있어서 이만.”
“네?”
“갑니다.”
나강인이 차를 타고 먼저 가버렸다.
당황한 지현선이 백미소를 돌아보았다.
“그냥 갔어!”
“뭘 기대했니?”
“원래 밥은 주고받는 거 아니었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우리 연구소 방송실 현아가….”
“붕괴사고 났을 때 보니까 걔는 어리고 예쁘더라? 넌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니야.”
“나강인 씨도 없는데 옛날처럼 머리끄덩이 잡을까?”
“덤벼라!”
여기서 싸우면 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둘은 자세만 잡았다가 풀었다.
지현선이 멀어지는 차를 보며 백미소에게 물었다.
“야. 나강인 씨는 원래 얼굴이 알려지는 거 싫어해?”
“어. 진짜 싫어해. 연기도 엄청 잘해서 같이 일해본 감독이나 피디가 좋은 배역을 맡기고 싶어 한다더라. 그런데도 배우로 활동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해.”
“넌 그걸 알면서도 안 이상했냐?”
“뭐가?”
“저렇게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거.”
백미소가 히죽 웃었다.
“어머. 너 지금 강인 씨 의심하는 거야? 앞에서는 안 그런 척하더니, 이런 나쁜 년.”
지현선이 발끈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뭐?”
지현선이 나강인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그냥 이상해서 그런 거야. 배우를 할 기회를 마다한다는 게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잖아.”
백미소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야. 넌 사람 좀 많이 만나 봐 해. 강인 씨처럼 개인 생활을 유명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되게 많아.”
“그래?”
“그리고 강인 씨는 정부기관 사람들하고도 잘 아는 사이야.”
VTX-13 사건 때 나강인이 정부기관을 통해 백한수려에 정보를 주고 압력도 넣었다. 그래서 백한수려는 VTX-13이 폭탄이 될 수 있는지 검증하는 실험을 연구소 운동장에서 해야 했다.
백미소가 그때 일을 생각하며 몸을 움찔했다.
‘그게 폭탄인 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라도 우리 연구소에서 폭발했으면 다 죽을 뻔했지 뭐야.’
그래서 백미소는 한 가지는 확신했다.
“강인 씨가 얼굴이 공개되면 안 되는 범죄자라면 경찰 같은 정부기관이랑 어떻게 친하게 지내겠어? 벌써 체포됐겠지.”
지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나강인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범죄자라고 의심한 건 아니다.
그녀가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한 이야기 뭐야?”
“무슨 이야기?”
“나강인 씨가 화학의 천재라던 이야기. 그게 무슨 소리야?”
백미소는 아까 흥분해서 그런 소리를 잠깐 하긴 했다.
그녀가 얼른 운전석 문을 열며 말했다.
“알려고 하지 마라. 다친다.”
지현선이 그 문을 손으로 잡았다.
“야! 말해주고 가!”
“꺼져!”
***
나강인이 약속이 또 있다고 한 건 사실이다. 그는 저녁을 배부르게 잘 먹고 나서 카페에서 합수부 형사를 만났다.
형사가 목을 주물렀다.
“어우. 며칠 야근했더니 피곤합니다.”
“귀찮은 사건을 넘겨드렸나 봅니다.”
“그게 어디 선생님 잘못이겠습니까? 그래도 굳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형사가 슬쩍 웃었다.
“다음에 저희 부서에서 곤란한 사건이 터졌을 때, 와서 좀 도와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요.”
“합수부 일로요?”
“합수부는 조만간 해산할 테니까…. 하, 하하.”
“아아. 경찰 일 말이군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야 뭐.”
“아유. 당연히 도움이 되죠. 마포 사건 때도 박순기의 요청을 받고 오셔서 깔끔하게 해결하셨잖습니까?”
그때 나강인이 협상가로 위장해 들어간 후에 인질로 잡힌 사람들을 구출했다. 그중에 유나린 박사도 있었다.
오늘 두 사람이 만난 건 그 부탁을 하려던 게 아니다.
형사가 본론을 꺼냈다.
“선생님이 무너진 연구소 근처에서 붙잡은 그 다섯 놈 말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맞습니다. 예전엔 다른 마약을 하다가 최근에는 신종인 블러드 아이스를 투약했다더군요.”
“두목이 그 마약을 직접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던데요.”
“두목은 교수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놈이 원래 거래하던 마약상이 블러드 아이스도 취급했는데, 마약파티 사건 아시죠? 그때 그 마약상이 체포됐습니다.”
“어….”
나강인은 예전에 방화살인범의 몽타주를 그려준 적이 있다. 경찰이 그 방화살인범을 수사하다가 마약파티를 알아내고 현장을 급습해 참석자를 모두 체포했다.
합수부 형사가 계속 설명했다.
“교수는 그 후에 다른 조직과 접촉해 약을 구했는데, 이번엔 그 조직이 청평 사건으로 일망타진되었지요.”
“어…. 그런 일도 있었군요.”
“왜 모른척하십니까? 둘 다 선생님이 개입하신 거잖습니까? 마약파티는 단서만 제공하셨지만, 청평 쪽은 조직을 아예 박살 냈으면서.”
“그러게요. 그냥 이번 일이…. 나비가 날갯짓을 참 많이도 했다 싶어서요.”
“예?”
“나비효과가 이렇게 튀어나오네요.”
“아…. 그래도 그 연구소 건물이 나중에 사람 많을 때 무너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이번에 인명피해는 없었으니까요. 하, 하하.”
나강인이 물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그 마약을 직접 만들기로 한 겁니까?”
“예. 다섯 놈 모두 마약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인데, 교수가 나머지 넷을 모았더군요. 자기가 마약을 만들 테니까 원료를 모으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서요.”
“마약을 공급하던 조직이 둘이나 날아간 상황에서, 앞으로는 직접 만들어서 쓰자고 하니까 좋다고 합류했겠군요.”
“그렇죠. 마약만 손에 넣을 수 있으면 뭐든 다 할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블러드 아이스가 만들기 쉬운 겁니까?”
합수부 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신종 마약이라 제조법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원료도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게 셋이나 있습니다. 설사 원료가 다 준비된다 해도 높은 수준의 화학자라야 합성할 수 있다더군요.”
“그럼 두목이 진짜 화학 교수입니까?”
“아닙니다. 화학 쪽 전문가는 맞는데,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마약 문제로 잘린 사람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약을 만든 겁니까?”
“잘릴 때는 중독자로 걸린 게 아니라, 몽롱한 상태로 일하다가 사고를 쳐서 잘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회사의 협조를 받아서 당시 자료를 조사해보니까, 그 회사에서 근무할 때 서류를 조작해서 원료를 빼돌렸더군요.”
“블러드 아이스는 마약상한테서 샀다면서요?”
“놈이 입을 다물고는 있는데, 회사에서 다른 마약을 합성해서 마약상에게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블러드 아이스를 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차액은 따로 챙겨서 숨겨놨겠죠.”
“회사는 몰랐고요?”
“자기들도 이번에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나강인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VTX-13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정보는 비공개일 텐데요?”
“그게…. 그놈이 다니다가 사고 쳐서 잘린 회사가 백한수려입니다.”
“네?”
***
이튿날 백한수려 홍보실 대리 백미소가 나강인을 만나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도 어젯밤에 알았어요. 지구뷰티의 연구소에서 폭탄을 터트린 놈이 원래 우리 회사 연구원이었을 줄이야.”
“이미 그만둔 사람이 저지른 일로 사과할 건 없습니다.”
“고마워요. 근데 지구뷰티에서 이 사실을 알면 아마 우리 탓을 할 걸요? 현선이는 아주 신나서 내 욕을 하겠죠.”
“거긴 연구소가 무너졌으니까 욕할 대상이 필요할 겁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그 대상이 우리만 아니면 됩니다.
백미소가 장담했다.
“VTX-13를 폭탄으로 만드는 방법이 어디서 샜는지도 조사해서 처리할게요. 그건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정보였거든요.”
“그건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전에 전부 회수하라고 한 거였습니다만.”
“지구뷰티는 남은 걸 분명히 다 반납했다고 했단 말이에요.”
“다 안 하고 숨겨둔 지구뷰티 쪽 잘못도 있네요?”
백미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쵸? 역시 강인 씨는 우리 편이라니까.”
“딱히 그건….”
“우리 편 해주세요! 쟤네 편은 안돼요!”
***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은 얼마 전부터 한국에 들어와서 산다.
그녀는 요즘은 호텔에서 지냈다. 기자들이 예전 아파트를 조사하면 곤란해서 일부러 호텔을 이용하며 위치를 노출했다.
하지만 공연이나 방송출연 같은 공식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인터뷰도 모두 거절했다.
알레이나가 미국으로 국제전화를 하며 말했다.
“아빠. 수술 준비는 언제 다 되는 거야?”
- 한국에 연구 목적의 회사를 설립하고 필요한 장비와 약품을 옮겨야 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시간이 더 필요해졌다.
“빨리 건강해지고 싶은데.”
- 성공 케이스 두 번 다 수술 후에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더라. 너도 건강해질 테니까 그때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아. 대신에 그날이 올 때까지는 절대로 무리하지 마라.
“나 진짜 엄청 조용히 지낸다고.”
알레이나가 통화를 마치고 창밖을 보았다. 조용히 지낸다고 했지, 호텔 방에만 있겠다고 하진 않았다.
“같이 놀 남친도 없고.”
남자친구가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 해도 같이 돌아다니는 사진을 찍히면 큰일 난다. 기사가 너무 많이 나가면 수술 날짜는 더 늦어진다.
“연지는 학교 갔으니까 같이 못 놀아주고.”
이연지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알레이나의 노트북 모니터에 르네상스 미술전 정보가 떠 있었다.
“오늘은 미술관에 가서 놀아야지.”
***
유나린이 나강인에게 연락해 인공 근육 연구에 큰 진전이 있다면서 와달라고 요청했다. 나강인은 한국대학교로 찾아갔다.
유나린은 신이 나서 연구 성과를 설명했다.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지인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냐?”
- 연구가 잘 되고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건 저 신나 하는 표정만 봐도 알겠다.”
유나린이 설명을 끝내고 눈을 반짝였다.
나강인이 일단 박수를 쳤다.
“수고 많이 하셨네요.”
“흐흐. 고마워요. 연구 진척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요.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어요.”
“좀 쉬면서 하세요.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 싶군요.”
“그래서 지금부터 내일까지 쉬려고요. 그런데 어때요? 의견을 좀 주세요.”
나강인은 유나린의 설명을 들었지만 기술적인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말을 돌려야겠다.’
마침 좋은 게 생각났다.
“이 연구로 노벨상을 타실 겁니다.”
유나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립서비스로 한 말이 아니다. AI 전지인의 초기 메모리에 유나린은 우리나라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과학 분야 최초의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만 기록되어 있지 정확히 무슨 연구로 상을 탔는지에 관한 데이터가 없었다.
“지인아. 설마 우리가 연구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니겠지? 더 대단한 다른 연구를 할 사람을 우리가 이쪽으로 끌어들인 거면 곤란한데.”
-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이 연구가 맞기만 바라십시오.
나강인은 어제 형사와 블러드 아이스 이야기를 했다. 그는 유나린을 만난 김에 물었다.
“생화학 쪽으로 권위자시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네. 뭔데요?”
“블러드 아이스라고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신종 마약이잖아요. 만들 줄도 알아요.”
“아. 그걸 아는 게 당연한 거였군요.”
그는 유나린이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중독자도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유나린이 얼른 설명했다.
“아. 당연히 아는 건요. 그걸 업그레이드해줄 수 있냐는 요청을 몇 군데에서 받았기 때문이에요.”
“예? 마약을 업그레이드해요?”
“그러니까 중독성을 줄이고 부작용도 감소시키면서 효과는 늘리는 연구를 제안받았죠.”
“마약이 아니라 약으로 만들겠다?”
“그렇죠.”
“그런 거면 개인이 의뢰한 건 아니겠네요?”
“연구소도 있고 재단도 있고 그래요.”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지인아. 혹시 블러드 아이스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 걸까?”
- 2082년에도 블러드 아이스는 여전히 부작용이 심한 마약입니다. 실패한 연구에 노벨상을 줄 리 없습니다.
“그건 그렇겠네.”
나강인이 유나린에게 말했다.
“누군가 허튼 꿈을 꾸는군요. 그거 연구해봤자 안 될 텐데.”
“잘 아시네요. 맞아요. 될 리가 없는 연구죠. 그래서 다 거절했어요.”
나강인은 왜 유나린 박사에게 연구 의뢰가 들어왔는지 짐작이 갔다.
‘얼마 전까지 정부에서 관리할 정도로 대단한 과학자니까, 유나린 박사의 실력이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 진행 상황은 잘 봤습니다. 유 박사님은 푹 쉬시죠. 저는 스케줄이 또 있어서요.”
“어머. 바쁘신가 보다. 네. 알았어요.”
나강인이 연구실을 나간 후에, 유나린이 기지개를 켰다. 그동안 너무 연구만 해서 좀 쉬긴 해야 한다.
“오랜만에 미술관에 가서 르네상스 미술전이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