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68화 (268/411)

268. 미술관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의 전작 ‘푸른 하늘’은 나강인이 참여한 중반부터 액션 청춘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청률이 올라갔다.

드라마가 종방한 후에 도주희는 쉬지도 않고 차기작을 썼다. 이번에는 액션을 대폭 강화하고 속도감도 높였다.

드라마 앞부분 대본은 초고가 이미 나온 상태였다.

도주희가 술잔을 들고 소리쳤다.

“명품 액션 로코 드라마 한 번 만들어보자!”

도주희와 단짝인 최진욱 피디도 같이 술을 마시며 외쳤다.

“가즈아!”

그런데 그 신작 드라마는 주요 배역 캐스팅에 난항을 겪었다. 특히 주연이 문제였다. 하겠다는 배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최진욱이 술잔을 내려놓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늘 남현주 소속사에서 그러더라. 남현주가 대본 들어온 거 다 반려했대.”

“내 대본을?”

“당연히 다른 데서 들어온 대본들을 반려했지. 남현주는 지금 네가 쓴 대본 1, 2화를 종이가 까매질 정도로 분석하고 있다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톱스타 남현주가 그런다니까 좀 부담스럽긴 하다.”

“너 부담가지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다. 남현주만 그러는 줄 알아? 최선희는 트레이너 고용해서 몸 만들고 있단다. 왜? 우리 드라마 주연 하려고. 김성현은 유럽에서 여행하면서 찍는 힐링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그걸 깠대.”

“우리 드라마 하려고?”

“어. 지금 외국으로 나가면 경쟁하기 어렵잖아.”

“김성현이 국내에 없다고 해서 캐스팅이 안 되는 급은 아닌데? 여배우 중에서는 탑급이잖아.”

“탑급이지. 그런데 경쟁상대가 남현주, 최선희, 오세나, 신은하잖아. 아무리 김성현이 잘나가는 여배우라도 자리를 비우고 싶겠냐?”

도주희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V를 만들었다.

“최 피디. 내가 이렇게 잘나간다. 요즘 잘나가는 배우 다섯 명이 다 내 드라마 하고 싶어 하잖아. 알아서 잘 모셔라.”

“야. 이게 좋아만 할 일이냐? 사방에서 들어오는 압력에 내가 갈려 나가는 거 안 보이냐?”

“어…. 안주 많이 먹어.”

“그리고 주연 자리는 하나인데, 탑급 여배우 넷을 탈락시키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냐? 다들 한 성깔 하는 다섯 명이 진심으로 달려드는데?”

“그래서 이 상황이 싫어?”

최진욱이 술을 마시며 웃었다.

“흐흐. 좋지. 우리가 언제 이런 대우를 받아보겠냐? 좋긴 좋은데…. 뒷일이 좀 무섭긴 하다.”

도주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러네. 내가 국내 최고의 드라마 작가라서 다들 하겠다는 거면 걱정할 것도 없는데.”

그런 상황이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그게 아니니까 걱정은 된다.”

남현주, 최선희, 김성현은 나강인의 드라마 참여가 결정된 후에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신은하와 오세나도 나강인이 아니었으면 먼저 덤볐을 리가 없다.

최진욱이 말했다.

“다들 명품 액션으로 이미지를 변신하거나 연기의 폭을 늘리겠다고 오는 거지. ‘운명의 창’까지 3연타로 대박이 났으니까 우리 드라마도 대박이 날 거라는 예측도 있을 거고.”

“떨어진 네 명이 자기 깠다고 앞으로 우리가 만드는 드라마는 쳐다도 안 보면 어떻게 하지?”

“너랑 나랑 큰일 나는 거야. 앞으로 우리 방송국 작품에는 출연 안 하겠다고 하면 국장님까지 뒷목 잡는 거고.”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그 사람들 성격 몰라? 진짜로 그러면?”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도 작가. 그냥 주연 자리를 다섯 개로 늘릴까?”

“되겠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

오세나가 신은하에게 말했다.

“‘운명의 창’ 덕분에 너 요즘 떴더라?”

신은하가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머그컵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원래 뜨고 있었잖아요? 운명의 창 덕분에 더 뜬 거죠. 그 영화로 경쟁할 때는 급이 달랐는데도 내가 주연을 땄는데, 이번 경쟁에서는 언니랑 급이 비슷해졌죠?”

“요망한 것. 그런데 너 그거 아니? 그때는 네가 선수를 쳤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움직였어. 이젠 누가 유리할까?”

신은하가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 이래요? 우리 당분간 손잡기로 했으면 견제하진 말죠?”

“그래.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오세나와 신은하는 이번 드라마의 주연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다. 이보라도 주연을 원했지만 급에서 밀렸다.

경쟁 초기만 해도 오세나의 인기가 더 높았다. 인기만 높은 게 아니라 연기력 평가도 오세나가 나았다.

그런데 ‘운명의 창’이 대박이 나면서 신은하의 인기와 평가가 급격히 높아졌다. 그러면서 판세가 변했다.

오세나의 인기는 오랜 기간 쌓아온 것이라 쉽게 내려가지 않지만, 신은하의 인기는 갑자기 높아진 것이라서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면 금방 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내려가는 것보다 드라마 주연이 확정되는 게 더 빠르다. 그때까지는 신은하의 인기도 내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올라갈 수도 있다.

그래서 오세나는 그녀와 손을 잡은 걸 살짝 후회했다.

‘얘가 떠도 너무 떴어. 이제 둘이 경합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도 신은하와 손잡은 걸 놓을 순 없다. 오세나 못지않은 여배우 세 명이 주연 자리를 노리고 참전했다.

오세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어디 가서 배역 가지고 경쟁하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내가 낙점하면 배역이 알아서 넘어왔는데 말이야.”

“저도 요즘 대접 좀 받거든요?”

“지금 신난 건 최 피디랑 도 작가겠지?”

“그렇죠. 그 두 분은 아무런 걱정이 없을 테니까요.”

***

신난 건 그 두 사람이 아니라 KMTV 방송국 국장이었다.

국장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탑급 여배우 다섯 명이 우리 드라마 주연을 달라고 한다. 최 피디. 이 상황이 믿어져?”

최진욱이 대답했다.

“안 믿어지죠.”

“전에는 우리가 대본을 보내도 다른 대본들 사이에서 간택되기만 기다려야 했는데, 이젠 거꾸로 우리가 저 다섯 명 중에 간택해야 하는 상황이잖아. 진짜 이게 무슨 상황이냐? 내가 평소에 착하게 살아서 복 받는 걸까?”

“국장님 때문이겠습니까? 나중에 참전한 세 명은 명품 액션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어서 온 건데.”

“하긴. 오세나와 신은하도 나강인만 보고 온 거지? 나강인 씨가 밥은 뭘 좋아한대?”

“본인이 워낙 대단한 요리사니까 직접 만들어 먹지 않을까요?”

“그럼 소고기라도 한 팩, 아니, 한우 꽃등심 선물세트라도 보내.”

“국장님. 나강인 씨는 그런 게 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물이 효과가 있으면 다른 제작사들은 소를 통째로 잡아다 바쳤을 겁니다.”

“그런가?”

“모르는 사람은 잘 만나주지도 않는데요. 말도 없이 선물을 보내면 실례라고 생각할 거라는 게 이 바닥 상식입니다.”

“그럼 할 수 없지. 그래도 최 피디는 그 귀하다는 아는 사람이잖아? 친하게 지내봐.”

***

나강인이 말했다.

“소고기 먹고 싶다. 한우 꽃등심 같은 거.”

AI 전지인이 말했다.

- 현재 활동예산으로 꽃등심은 무리입니다.

“누가 선물로 한 팩쯤 보내주면 좋겠다.”

-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어떻게 하셨길래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네가 수상하다고 판단하고 경계하는 사람들을 피했지. 그래서 까칠하게 보였나?”

- 오늘 점심은 뚝불을 드십시오. 그래야 고기 맛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

신은하가 방송국 복도에서 남현주와 마주쳤다. 남현주는 주연 경쟁에 새로 참전한 탑급 여배우다.

“어머. 은하야. 오랜만이다.”

“언니도 잘 지내셨죠?”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에 남현주가 말했다.

“은하야. 넌 이미 나강인 감독님하고 두 번이나 작품을 했잖아. 강렬한 느낌의 배역으로 말이야.”

“그랬죠.”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이미지가 필요해. 넌 좀 청순한 배역을 맡을 때가 됐어. 나한테 들어온 게 하나 있는데 그거 네가 할래? 내가 제작사에 이야기 잘해줄게. 필요하면 카메오로 출연해줄 수도 있고.”

“대신에 언니는 이 드라마 하고요?”

“난 강한 여자로 이미지를 바꿀 때가 됐거든. 넌 이미 두 번이나 했으니까 나 감독님은 나한테 넘겨.”

“현주 언니. 근데요.”

“응?”

“전 또 하고 싶은데요?”

***

신은하가 그날 오후에 카페에서 나강인을 만나 불평을 쏟아냈다.

“아니, 자기가 배역을 맡겨놨어? 강인 오빠가 물건이냐고!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으면 자기가 알아서 하지 왜 나한테 넘기라 마라야!”

“그래서 뭐라고 했어?”

“공정하게 파인플레이 하자고 했지.”

“잘했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잘했네? 지금 잘했다는 말이 나와?”

“뭐가?”

“지금 주연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아? 이럴 때 강인 오빠가 날 팍팍 밀어줘야 내가 유리해지지!”

“공정하게 파인플레이 하자며?”

“걔들은 회사 차원에서 인맥을 동원할 텐데 그러면 이게 파인플레이야?”

“너희 회사는?”

“우리 회사는 가수 쪽 인맥만 좋아!”

“어…. 그러냐?”

“그렇거든? 그러니까 나는 개인플레이라도 해야 하거든?”

나강인이 두 손을 들었다.

“근데 난 힘 없다.”

“있을 것 같은데!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힘이 없어!”

“최 피디님이랑 도 작가님 때문인가?”

“아니라고!”

그녀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빠르게 사라졌다.

나강인이 말렸다.

“그러다 배탈 날라.”

“열을 식혀야지!”

“뭔가 좀 차분한 거라도 즐기면서 식혀봐.”

“차분한 거?”

신은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차분한 곳으로 놀러 가자. 그것까지 거절하면 화낼 거야.”

“거기가 어디든 같이 가려고 했다. 어디로 가게?”

“르네상스 미술전이 열리는 미술관이 있어. 그림을 유럽에서 대여해서 하는 거라서 전시 기간 끝나기 전에 가야 해. 그거 보러 가자.”

나강인이 같이 일어났다.

“그래. 오늘은 그렇게 차분하고 지적인 취미를….”

“감상 끝나면 그 앞에서 술이나 마시자. 취할 때까지 마실 거다?”

“혹시나 했다.”

“이 분노를 풀려면 술이 필요하다고!”

***

나강인은 신은하와 함께 미술관을 찾아갔다.

나강인이 건물을 보며 말했다.

“미술관이 재미있게 생겼네?”

“사립 미술관인데 좀 특이하게 생기긴 했지? 유명한 건축가가 만들었나?”

AI 전지인이 말했다.

- 건물에 창문이 거의 없으며 출입구에는 비상차단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유사시에 이곳을 점령하면 벙커로 쓸 수 있습니다.

“미술품 도난 방지를 위해서 저렇게 설계한 건가?”

신은하가 대답했다.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지은 거니까 아마 그렇겠지.”

나강인이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외부에 르네상스 미술전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시 기간은 며칠 남지 않았다.

신은하가 설명했다.

“파리 미술관에서 전시를 위해 빌려온 그림들이래.”

“비싸냐?”

“당연한 거 아냐?”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은 미술관 내의 특별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었다.

신은하는 그곳에 들어가고 나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난 이 시대 그림이 제일 좋아. 보고 있으면 가슴에 직접 꽂히는 느낌이 있거든.”

나강인이 그녀의 옆에서 그림을 보면서 작게 물었다.

“지인아. 너도 이런 그림에 조예가 좀 있냐?”

- 저는 전투지원을 잘합니다.

“나도 그래. 난 전투를 잘하지.”

평일 낮이라 관람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특별 전시실에만 계속 있을 수는 없다. 신은하와 나강인은 다른 전시실로 넘어갔다.

신은하는 뿔테 안경과 마스크,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전시실에서 비슷하게 얼굴을 가린 사람과 마주쳤다.

연예인은 그런 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그녀는 상대도 연예인이라고 추측했다.

‘누구지? 느낌이 우리나라 연예인이 아니라 외국인…. 응? 외국?’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보았다. 풀테 안경 속으로 보이는 눈이 익숙했다.

‘설마?’

그런데 상대가 먼저 그녀 쪽을 알아보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아니라 나강인을 알아보았다.

“어? 광돌이다!”

신은하는 그 호칭을 듣고 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깨달았다.

“알레이나 민?”

알레이나도 상대가 누군지 뒤늦게 눈치챘다.

“응? 신은하?”

알레이나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좋아한다.

신은하가 말했다.

“알레이나. 우리 영화 시사회에 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홍보가 됐어요.”

“간다고 했잖아요. 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영화 재미있었어요.”

신은하는 알레이나와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알레이나가 나강인의 옆집에 잠깐이나마 살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좀 껄끄러웠다.

알레이나는 생각이 달랐다.

‘이렇게 신은하와 마주친 김에 그 영화의 액션 CG나 특수효과를 어디서 한 건지 물어볼까?’

신은하가 일부러 나강인의 팔에 손을 살짝 걸치며 말했다.

“그럼 감상 잘해요. 우리는 저쪽 전시실로 갈 거라서 이만.”

알레이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깐만요. 신은하 씨. 물어볼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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