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미술관 II
신은하가 질문을 제한했다.
“이런 자리에서 사적인 질문은 좀 그런데요.”
알레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영화 이야기에요. 운명의 창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알레이나는 이미 이연지에게 그 영화의 CG에 관해 물어봤지만 알아낸 게 없었다. 그런데 이연지는 영화 ‘운명의 창’의 단역이고 신은하는 여자 주연이다.
미국 팝스타이면서 할리우드 영화에도 몇 번이나 출연한 알레이나가 신은하를 보며 생각했다.
‘주연배우가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리가 없지.’
신은하도 흥미가 생겼다.
‘알레이나가 우리 영화에 관심이 있어?’
신은하는 요즘 드라마 주연 경쟁을 치열하게 치르는 중이다.
‘가만. 내가 알레이나를 예능 방송에 데리고 나가서 우리 영화 이야기를 하면 경쟁에 도움이 되겠는데?’
신은하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죠. 뭐가 궁금해요? 다 알려줄게요. 아예 예능 방송에 나가서 본격적으로 이야기….”
알레이나는 그럴 수가 없다. 방송출연으로 기사가 쏟아지고 관심이 집중되면 그만큼 수술이 늦어진다. 그러면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녀가 단칼에 선을 그었다.
“방송은 제가 좀 그래서.”
“아…. 그렇군요.”
신은하도 선을 그었다.
“그럼 질문은 짧게 해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 영화의 CG는 어떻게 한 거예요?”
신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우리 영화에 CG가 들어갔어요?”
알레이나도 당황했다.
“엥? 몰라요?”
“CG 업체에서 배경을 좀 지웠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거 이야기에요?”
“아뇨. 그건 알아요. 근데 그거 말고요.”
“우리 영화에 들어간 CG는 그게 다인데요?”
“CG가 아니면, 그 특수효과는 어떻게 한 거예요?”
“무슨 특수효과요?”
알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액션 말이에요. 영화 전체에 나온 그 많은 명품 액션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낸 거예요?”
“아아. 그건….”
신은하가 말을 하다 멈칫했다. 그녀가 알레이나를 보며 씩 웃었다.
“아. 모르시는구나.”
“뭘요?”
신은하는 잠깐 갈등했다.
‘대답을 해주는 대가로 나랑 같이 방송에 나와달라고 협상해볼까?’
갈등은 짧았다. 곧바로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니, 잠깐. 알레이나는 할리우드 영화에 몇 번이나 출연했잖아. 그럼 강인 오빠를 할리우드에 소개할 수도 있겠네?’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실전 리얼 액션이라고 하는 건데요. 그걸 만든 사람은….”
알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름만 들어도 장난 아닌 포스가 느껴지네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신은하는 그 반짝임을 보자마자 다른 걱정이 들었다.
‘근데 강인 오빠 혼자 미국에 갔다가 저 미제 여우가 꼬시면….’
그녀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강인을 보았다. 결론은 즉시 나왔다.
‘그런다고 쉽게 넘어갈 인간이 아니지. 돌부처, 아니, 스뎅 부처이신데. 느낌이 싸해지면 그땐 내가 잡으러 가지 뭐.’
그녀가 복잡한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 액션을 만든 사람이….”
갑자기 건물 여기저기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신은하가 움찔했다.
“어머! 깜짝이야! 불 난 거야?”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이 건물의 보안장치가 작동했습니다.
나강인이 재빨리 물었다.
“타입은?”
- 출구 봉쇄입니다.
“탈출 경로는?”
- 모든 출입구와 창문에 보안 철문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뛰면 요원님은 탈출할 수 있습니다.
“나만?”
- 3초 안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눈앞에 뜬 숫자가 순식간에 2와 1로 바뀌었다가 0이 되면서 사라졌다.
- 제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뛰어도 늦습니다.
“알아. 나만 빠져나갈 수는 없잖아.”
나강인이 내부를 보며 말했다.
“상황이 그렇게 위험한 것 같지도 않지만.”
이번에는 시선이 신은하를 향했다.
“위험하면 더 내가 여기 있어야지.”
- 폭발형이나 섬멸형 보안장치가 추가로 작동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는 전장이 아니라 미술관이잖아. 뭔가 폭발하면 그림이 남아나겠냐?”
- 그건 그렇습니다.
신은하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분야 최고의 전문가는 나강인이다. 그녀가 물었다.
“강인 오빠. 무슨 일이 난 거야? 불이라도 난 거야?”
“아니. 미술관의 보안장치가 작동했어. 누가 그림을 건드렸나 보다.”
“혹시 도둑이야?”
“모르지.”
신은하는 나강인과 다니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갑자기 울린 경보음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런 일로는 겁먹지 않는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보석 전시장에서 화학무기가 터졌을 때보다는 상태가 좋은 거지?”
“아마도.”
“아마도? 으…. 그냥 여기서 나가자. 우린 도둑이 아니잖아.”
“못 나가.”
“왜? 우리가 도둑일까 봐 막는 거야?”
“이 건물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어.”
“어? 어? 진짜?”
“어. 진짜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 출입구 상황을 되게 잘 아네?”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허공에 건물 형상 홀로그램을 띄웠다. AR 렌즈는 나강인의 눈에 있는 독립 모듈이라서 그 홀로그램은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손가락을 까닥여 그 반투명한 건물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이 미술관은 출입구가 제한되어 있고 창문도 몇 개 없어. 환기는 공조장치를 이용해서 하겠지. 경보장치가 울리면 창문까지 모조리 폐쇄되는 구조야.”
“무슨 그런 건물이 다 있어?”
“고가의 미술품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그렇게 설계한 건물이야. 도둑놈이 그림을 가지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신은하가 나강인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뭐,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경찰이 오면 문을 열어주겠지.”
신은하는 나강인을 믿고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알레이나는 다르다. 그녀는 편의점 강도조차 권총을 쓰는 나라의 사람이다.
그녀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듣고 겁을 먹었다.
“미술품 도둑놈들이 총으로 무장했을지 몰라요. 빨리 숨어야 해요.”
신은하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에요. 한국 강도는 총이 아니라 칼을….”
그녀는 나강인을 만난 후로 총을 쏘는 놈을 여러 번 보았다. 국제 용병이나 해적단은 물론이고 팔성테크의 비밀 창고를 습격한 놈들이나 이보라를 납치했던 조직도 총을 난사했다.
“아. 한국 강도가 꼭 칼만 쓰는 건 아니구나. 총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알레이나도 한국이 총기 소지 금지 국가인 건 안다. 그런데 그녀는 올해에 한국에서 총기 관련 범죄가 여러 번 일어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녀가 더 겁을 먹었다.
“그쵸? 빨리 숨자니까요? 어디로 갈까요? 화장실? 아니야. 거긴 너무 쉽게 들켜. 환기구? 여기 환기구는 왜 저렇게 좁아!”
신은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진정해요. 단순한 그림 도둑일 거예요. 직원이 오길 기다…. 아. 저기 직원이 오네요.”
미술관 직원이 보안 요원과 함께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 중앙 로비로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협조 부탁드려요!”
나강인이 그 직원에게 물었다.
“그런 이야기는 스피커로 안내하는 게 더 빠를 텐데요?”
“방송시설이 고장 나서요. 수리 업체를 불렀는데 도착하기 전에 이런 사고까지 터져서…. 죄송합니다. 로비로 이동해 주세요.”
나강인이 미술관 중앙 로비로 가면서 말했다.
“방송시설 고장? 우연은 아니겠지?”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전장에서 우연을 믿으면 혼자만 죽는 게 아닙니다. 부대가 전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네. 방송시설이 도둑질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고장을….”
나강인이 멈칫했다.
국제 용병 자칼은 강남 7층 건물 사건 때 통제실부터 장악했다. 그 건물은 그곳을 장악하면 유선 통신망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강인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권 이탈이네? 이거 되게 익숙한 상황이지?”
- 적의 통신 교란이 감지됐습니다.
“유선망도 확인해야겠어.”
나강인이 직원에게 물었다.
“방송실이 어디 있습니까? 상태를 좀 보고 싶은데요.”
“네? 아. 네. 저희가 고쳐보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고요.”
“제가 그런 기계를 좀 알아서.”
“그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나강인이 직원과 보안 요원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신은하와 알레이나에게 손짓했다.
신은하가 얼른 나강인을 따라갔다.
알레이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 있었다. 신은하가 얼른 돌아와 알레이나의 팔을 당겼다.
“뭐해요? 빨리 따라와요.”
나강인이 돌아서서 알레이나에게 말했다.
“뛰지 마라.”
알레이나가 대답했다.
“알아. 난 뛰면…. 어? 광돌이가 그걸 어떻게….”
알레이나는 뛰면 위험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공개할 수는 없다.
나강인이 말을 슬쩍 돌렸다.
“넘어지면 다친다. 이 상황에서 다치면 민폐다. 그러니까 뛰지 마라.”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알았어.”
직원이 나강인을 방송장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원래 외부인은 못 들어오는 곳인데요. 비상 상황이니까 예외로 하는 거예요.”
직원은 보안 요원과 같이 방송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나강인이 방송실로 들어가 내부 장비를 둘러보았다.
“지인아. 예상대로 여기는 그냥 방송실이 아니네?”
- 건물 중앙 통제실에 진입했습니다.
그곳에는 방송장비와 함께 통신 장비, 내부 시설 제어 서버 등이 있었다.
“좀 보자.”
나강인이 장비를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장비의 현재 상태를 표시했다.
미술관 직원이 물었다.
“어때요?”
나강인은 AI 전지인에 분석한 결과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송장비가 먼저 고장 난 게 아니군요.”
“네?”
“CCTV용 서버에 문제가 생기면서 방송장비가 같이 고장 난 겁니다.”
“네? CCTV도 나갔어요? 어? 아까는 잘 됐는데!”
“화면만 나오고 녹화는 안 됐을 겁니다. 지금은 더 고장 나서 화면도 안 나오는 상태가 됐고요.”
“안 되는데…. 지금 비상 상황인데.”
나강인이 방송실의 유선전화를 들어보았다.
“그러면서 유선 전화망도 고장이 났고.”
그가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여전히 통화권 이탈 상태였다.
“무선망도 차단됐는데.”
- 무선 차단과 관련된 장비는 이 통제실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경보기가 작동하고 건물 정문이 차단됐다.
“도난방지 보안시스템은 또 살아있단 말이야.”
- 도난방지 장치는 독립된 시스템으로 판단됩니다.
“상황이 재미있네.”
직원이 물었다.
“어떤 상황이에요? 수리가 가능해요?”
“못 고칩니다.”
“네?”
“부품이 없어서요.”
“아, 네. 그럼 중앙 로비로 이동해 주시겠어?”
“갑시다.”
나강인은 직원과 함께 미술관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 미술관의 관장이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신은하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 나 저 사람 TV에서 본 적 있어. 서양 미술사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야.”
직원이 얼른 미술관장에게 다가가 방금 겪은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미술관장이 나강인을 슬쩍 본 후에 직원에게 물었다.
“관람객을 왜 거기 데려간 거야?”
“방송실 장비를 고칠 수 있는지 보시겠다고 해서요.”
“보안 요원하고 같이 갔다 온 거지?”
“그럼요. 다른 거 안 하는지 잘 보고 있었어요.”
로비에 모인 손님 중에는 지구뷰티 연구소 실장 지현선이 있었다.
그녀가 나강인에게 다가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나강인 씨가 왜 여기 계세요?”
“그림 보러 왔죠.”
“혼자요?”
나강인이 신은하를 가리켰다.
“그럴 리가.”
지현선이 신은하를 돌아보았다. 신은하는 알레이나와 같이 있었다.
두 사람 다 마스크와 안경, 모자로 변장 중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가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다 스타일이 일반인 느낌이 아닌데? 연예인인가? 아. 나강인 씨가 유명한 무술감독이라서 아는 연예인들이 많구나.’
생각이 많은 그녀에게 나강인이 물었다.
“지 실장님은 여기 어쩐 일입니까?”
지현선이 깁스를 보여주었다.
“팔을 다쳐서 며칠 휴가를 냈거든요. 쉬는 김에 그림을 보러 왔어요. 전시회가 며칠 안 남았잖아요. 이거 지금 안 보면 유럽까지 가서 봐야 해서요.”
신은하가 슬쩍 다가와 팔을 찔렀다.
“누구셔?”
“화장품회사 연구원.”
미술관장이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누군가 전시된 미술품을 건드렸어요. 그것 때문에 보안장치가 작동한 거예요. 단순한 해프닝이니까 여러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 로비에 계시면 우리 보안 요원들이 지켜드릴 거예요.”
보안 요원 네 명이 미술관장의 뒤에 서 있었다.
관람객이 손을 들었다.
“그럼 그림을 도둑맞은 건가요?”
“이번 르네상스 미술전을 위해 대여한 그림들은 모두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요. 아마 누가 실수로 건드린 거겠죠.”
“그럼 그냥 나가는 문을 열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미술관장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싶지만, 이 건물의 보안장치는 특수해서 저 혼자서는 못 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