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프레임
미술관에 갇힌 관람객들은 당장 그곳을 벗어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술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이 건물의 보안장치는 안쪽에서 두 명이 동시에 해제하거나, 안쪽과 바깥쪽에서 한 명씩 같이 해제해야 해요.”
관람객이 항의했다.
“여기가 무슨 핵미사일 발사기지도 아닌데 그런 장치가 왜 있는 겁니까?”
“미술품을 사랑하는 설립자께서 그만큼 확실한 보안장치를 원하셨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설사 관장인 제가 그림을 훔치려고 해도, 일단 보안장치가 작동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우리 미술관의 보안이 이렇게 확실하니까,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들을 빌려서 이렇게 미술전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다른 관람객이 물었다.
“그럼 지금 이 미술관 안에 보안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다 있습니까?”
미술관장이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저는 여기 있는데, 다른 한 명인 부관장이 출장을 갔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돌아와야 하는 게 규정인데….”
그녀가 옆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부관장이 오려면 얼마나 걸리지?”
“아침에 대전으로 갔어요. 거기서 바로 와도 최소한 두세 시간은 필요해요. 더 걸릴 수도 있고요.”
관람객이 항의했다.
“그런 중요한 사람이 왜 대전까지 간 겁니까?”
미술관장이 사과했다.
“이 보안장치가 작동한 건 작년에도 한 번밖에 없었고, 올해는 한 번도 없었어요. 이건 진짜 특별한 상황이라서 미리 대비할 수가 없었죠. 죄송해요.”
“죄송하다고만 하지 말고 해결책을….”
“대신에!”
그녀가 보상을 제안했다.
“제가 직접 여러분들과 함께 다니면서 우리 미술관의 명화 감상을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나가실 때 선물도 챙겨드리고요. 저희 미술관 앞 레스토랑 식사권이 포함된 선물이에요. 물론 티켓은 당연히 환불해 드려야죠.”
오늘 이 미술관에 온 사람 중에 다음 일정이 급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통은 시간에 여유를 두고 그림을 보러 왔다.
몇 사람은 불평했다.
“아니, 이런 이 분위기에서 뭘….”
“그림 볼 기분이 나겠냐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화를 낸다고 해서 잠긴 문이 열리는 건 아니니까.”
“그 레스토랑 꽤 괜찮은 데라던데.”
“어차피 우리는 두 시간은 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예정이었잖아.”
“여기 관장님은 TV에 종종 나오는 분이야. 이러면 개이득이지.”
사람들은 미술관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관장에 앞에서 걸어가며 전시된 그림을 천천히 설명했다. 보안 요원 몇 명은 뒤에서 따라왔다.
관람객들의 만족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이러니까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그러게? 아까보다 더 좋은데?”
나강인과 일행들도 사람들과 같이 움직였다.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 명화 특별 전시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직원과 보안 요원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나강인이 전시된 그림을 보며 작게 말했다.
“CCTV를 먹통으로 만든 놈이 정작 그림은 그냥 건드리기만 하고 훔치지는 않았단 말이지.”
- 유선 통신망이 끊기면 외부 경비업체와 연결된 경보 시스템도 차단됩니다. 그런데도 보안시스템이 작동했습니다.
“유선 통신을 끊고, CCTV도 망가뜨리고, 그런 후에 그림을 훔치려고 했나? 그런데 이 건물은 외부 경비업체 외에도 자체 보안시스템이 있어서 철문을 다 내려버렸네?”
- 보안시스템이 독자적으로 작동 가능한 구조입니다.
“중앙 통제실의 장비를 고장 낸 놈이 보안시스템은 모른다?”
-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긴 합니다.
“어쨌든 그림을 건드린 사람은 지금 이 안에 있을 거야. 누군지 찾는다 해도 지금은 붙잡을 증거가 없지만 말이야.”
나강인이 관람객들을 보았다.
“누굴까?”
- 표정 분석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 지인이는 또 아는 게 없다.”
- 저는 최고수준의 지구연합군 전투지원 AI입니다. 전문 분야가 다릅니다.
“잘났다.”
- 요원님도 잘났습니다.
“내가 잘나긴 했지.”
- 제가 워낙 잘나서, 뭘 좀 찾아냈습니다.
“뭔데?”
미술관장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가 설명하는 것보다 좀 더 안쪽에 걸려 있는 그림에 AI 전지인이 표시를 띄웠다.
- 저 그림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응? 너 그림은 감상할 줄 모른다며.”
- 경보장치가 작동하기 전에 관람했을 때와 현재 상태가 다릅니다.
“액자가 움직였다는 소리야? 그럼 범인이 저걸 건드린 거겠네.”
- 액자가 바뀌었습니다.
“어?”
- 그림도 미세하게 다릅니다.
AI 전지인이 차이점을 허공에 표시했다.
나강인이 그 그림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아.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나강인이 한창 설명 중인 미술관장에게 물었다.
“관장님. 이 미술관에 전시된 것 중에 제일 비싼 게 어느 겁니까?”
“네?”
평소라면 조금 예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미술관장이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 중인 르네상스 시대 명화들이겠지요?”
나강인이 AI 전지인이 표시한 그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면 저건 얼마나 합니까?”
미술관장의 얼굴에서 결국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요. 명화의 가치가 정찰제로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나강인을 따라다니던 알레이나가 대신 대답했다.
“저 그림은 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다른 대표작은 작년 경매에서 100억에 팔렸어. 아마 여기 있는 그림 중에서 제일 비쌀걸? 근데 역시 광돌이야. 이 분위기에서 그것부터 묻다니.”
“이야아. 광년이 너 그림 좀 볼 줄 아나 보다?”
“내가 원래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어쨌든 100억쯤 한다는 말이지. 그 정도 되니까 이런 짓을 저질렀구나.”
“응? 이런 짓이라니?”
나강인이 벽에 걸린 그림을 다시 가리켰다.
“저건 가짜야.”
“으응?”
미술관장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것 보세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우리 미술관이 위작을 전시했다는 건가요?”
“아.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 분명히 가짜라고 했잖아요!”
“가짜라서 가짜라고 했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어요! 저 그림이 들어올 때 나와 부관장이 같이 확인했으니까요!”
“두 분이 진품과 위작을 구분하는 전문가인가 보군요. 그런데 이 건물의 보안시스템이 작동한 후에도 직접 확인했습니까?”
“네? 그건….”
미술관장은 로비에서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부관장은 대전으로 출장을 갔다.
나강인이 물었다.
“통제실에 문제가 생겨서 어느 감지기가 작동했는지 확인이 안 되지요?”
“그건 또 어떻게….”
“아까 저 직원분과 같이 가서 통제실의 장비 상태를 확인했으니까요. 내가 전문가라서 아는데, 그거 외부인이 일부러 고장 낸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림을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다. 미술관장과 직원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 그림 쪽으로 걸어갔다.
“이게 위작이라고?”
직원 중에도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전공하지 않았다 해도 가까이 가서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 바로 앞에서 보니까 그림이 조금….”
“질감이 이상한데?”
미술관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가짜야.”
그녀가 갑자기 나강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그럼 진짜 그림을 훔친 범인은 도망치고 우리만 갇힌 건가요?”
나강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아니고요.”
“네?”
“일단 범인은 아직 이 안에 있을 겁니다. 경보장치가 작동하자마자 문이 모두 봉쇄됐으니까요.”
“그 말은.”
미술관장이 관객들을 보며 말했다.
“범인이 이 안에 있다는 거군요.”
보안 요원들이 긴장하며 사람들을 포위했다.
관객 중에는 화를 벌컥 내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당신! 책임질 수 있어?”
미술관장이 두 손을 앞으로 들며 책임을 떠넘겼다.
“제 생각이 아니라, 저분 말대로면 그렇다는 거죠.”
나강인을 의심하는 사람도 나왔다.
“잠깐! 저 사람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알고 있지? 저 사람이 범인인데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 아냐?”
미술관장이 나강인을 휙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이 우리 통제실 장비를 굳이 확인했다면서요?”
“그랬지요. 고장 났다고 들어서요. 알고 있겠지만 내가 가기도 전에 이미 고장 났더군요.”
“아. 그건 그래요.”
미술관장은 그래도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몸수색을 좀 했으면 하는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실례가 됩니다. 아주 많이.”
“그래도 양해를….”
“양해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관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렇게 나오시면 강제로 몸수색을 할 수밖에 없어요.”
갑자기 나강인의 옆에서 알레이나가 말했다.
“아. 이게 그거구나.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거.”
같이 서 있던 신은하는 여유가 넘쳤다.
“뭐, 능력이 되면 어디 강제로 해보시든가. 그러다 얻어터지고 나자빠지는 사람을 내가 참 많이 봤는데 말이야.”
알레이나도 나강인이 잘 싸운다는 건 안다. 게다가 그녀는 한술 더 떴다.
“날 건드리기만 해봐. 이 미술관을 상대로 그림값보다 비싼 소송을 걸어줄 테니까.”
미술관장은 처음 보는 사람을 평가할 때 입고 있는 옷과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를 기준으로 삼는다.
나강인은 동네 옷가게에서 산 저렴한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나강인을 만만하게 봤는데, 옆에 있던 여자 두 명이 반발하자 살짝 당황했다.
그녀가 신은하가 몸에 걸친 것부터 확인했다.
‘옷의 가격대가 상당한데? 안경도 그냥 뿔테가 아니야. 명품이야.’
그녀의 시선이 알레이나 쪽으로 넘어갔다.
‘헉!’
신은하가 걸친 것도 비싼 옷과 액세서리지만, 알레이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비싼 옷을 입었다.
‘저 정도면 일반인은 아니겠구나.’
미술관장이 태도를 바꾸었다.
“흠흠. 그러면 우리 보안 요원과 같이 움직이세요. 그 정도로 양보할게요.”
신은하는 짜증이 났다.
“양보? 지금 양보라고 했어요?”
“그래요. 이만하면 적절한….”
그녀가 화를 버럭 냈다.
“진짜 선을 많이 넘었잖아요! 저 그림이 가짜라고 가르쳐준 사람한테 고맙다는 소리는 못할망정 이게 무슨 태도야!”
미술관장은 신은하를 알레이나보다는 낮게 보았다. 그녀의 옷도 비싼 편이지만 알레이나만큼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관장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슬쩍 올리며 말했다.
“우리 미술관 입장도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교양 없게 왜 이래요?”
“교양 없는 게 뭔지 보여줘요? 알았어요.”
신은하가 안경과 마스크를 벗었다.
“앞으로 예능 방송에 나갈 때마다 이 미술관이 얼마나 교양 넘치는 곳인지 열심히 홍보해줄게요. 아주 교양 철철 넘치는 곳이라고, 오늘 일을 자세히 설명해주면 되겠네!”
관람객들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신은하다!”
“영화배우다!”
“‘운명의 창’ 여주인공이잖아!”
나강인이 말리는 척했다.
“은하야. 진정해.”
“놔봐!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고!”
AI 전지인이 말했다.
- 신은하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습니다.
“종종 도움이 되잖아.”
- 신은하를 더 부추기십시오.
미술관장은 신은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왜 영화배우가…. 죄, 죄송해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나한테만 죄송해요?”
그녀가 나강인을 가리켰다.
“이분이 누군지 알아요?”
미술관장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헉! 이분도 유명한 영화배우신가요?”
“그건 아니지만!”
“휴우. 그러면 이분은 인터뷰에 나가실 일은 없겠네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강인은 신은하가 화를 내게 놔두다가 적당한 때 끼어들었다.
나강인이 관장에게 물었다.
“그림을 찾아주면 됩니까?”
“네? 그림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역시 범인….”
신은하가 다시 폭발했다.
“누구 보고 범인이래!”
“하지만 범인이 아니면 진품의 행방을 어떻게 안다는 거죠?”
나강인이 제안했다.
“난 그림을 찾아주고, 관장님은 사과하고. 오케이?”
신은하가 옆에서 물었다.
“그럼 나는?”
“넌 이 에피소드를 예능에서 써먹고.”
그녀가 손뼉을 쳤다.
“좋았어. 내가 아주 그냥 카메라만 보이면 이 이야기할 거야!”
미술관장이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건 곤란….”
나강인이 벽에 걸린 위작을 가리켰다.
“저게 가짜라는 건 여기 직원이라면 이제 알 텐데.”
그가 벽에 걸린 위작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 액자가 아까보다 조금 더 두꺼워진 것도 알아보셨는지?”
그 그림 근처에 서 있던 미술관 직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액자가 다르다는 말인가요? 똑같은 거 같은데요?”
AI 전지인이 제공한 정보에는 액자의 두께 차이가 mm 단위로 적혀 있었다.
나강인이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가 살짝 뗐다.
“액자의 상하좌우 프레임이 아까보다 각각 2mm 정도 두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