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창고
박순기가 거실 벽 앞에 주저앉아있는 놈을 가리켰다. 왼쪽 가슴에는 삐죽 튀어나온 칼 손잡이가 보였다.
“저기 저놈은 심장에 칼을 맞았잖습니까?”
나강인이 대답했다.
“저놈 안 죽었습니다.”
박순기는 나강인이 왜 기절한 놈에게 칼을 던졌는지 계속 의문이었다.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다 나강인의 말을 듣고 표정이 확 펴졌다.
“아! 칼날이 급소를 피하게 찔렀군요! 그래서 안 죽었군요!”
“그건 아니고요.”
“예? 그럼 어떻게 왼쪽 가슴에 칼을 맞고도 안 죽습니까?”
“저건 손잡이만 있지 칼날은 거의 없는 단검입니다. 그냥 아무 곳에나 꽂아놔도 안 죽습니다.”
나강인이 구석에 처박힌 놈에게 다가가 가슴에서 칼 손잡이를 뽑았다.
칼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있기는 있지만 1cm도 되지 않았다.
“옷 두께를 고려해서 꽂아놓은 겁니다. 피부에는 생채기만 살짝 났겠네요.”
그 절묘한 힘 조절은 AI 전지인이 했다.
박순기는 당황했다.
“어? 설마 가짜 칼?”
조금 전에 붙잡은 놈은 더 크게 당황했다.
“어? 내 칼은 진짜인데! 내가 직접 날을 갈았는데!”
박순기가 물었다.
“진짜 칼이었다는데요?”
나강인이 그의 등 뒤 옷에 꽂아둔 부러진 칼날을 뽑아서 흔들어 보였다.
“단검의 칼날을 먼저 저놈에게 보여준 후에, 허리 뒤로 돌리면서 칼날만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는 손잡이만 던진 겁니다. 칼날이 얇아서 부러뜨리기 쉽고, 단검이 손잡이까지 슬림형이라 가벼워서 옷에 꽂아놓기 좋던데요.”
박순기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역시 그렇죠? 하하하. 저는 진짜 죽이신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강인이 거실 TV 앞에 주저앉아있는 놈을 보며 말했다.
“목격자가 있는데 설마요.”
“히익!”
박순기가 물었다.
“그런데 칼날은 어떻게 부러뜨리신 겁니까? 등 뒤로 숨기자마자 던지시던데요.”
“힘으로?”
“예?”
“두 손으로 그냥 뚝?”
“아. 예. 칼날이 얇긴 하지만 그래도 쇠로 만든 건데 그냥 뚝….”
주저앉아있던 놈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럼 진짜 경찰인 거잖아!’
그놈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거기 아니야! 내가 말한 그 창고가 아니라고! 거짓말한 거야!”
그놈은 조금 전에 나강인이 보여준 단검 투척 퍼포먼스에 속아 납치한 두 사람이 산 밑 창고에 있다고 털어놓았었다. 그런데 다른 놈이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적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목적지의 신뢰도가 99%로 증가했습니다.
나강인이 그놈에게 말했다.
“협조 땡큐다.”
나강인은 적이 아지트로 쓰는 단독주택 밖으로 나왔다.
경찰 지원팀도 도착했다. 지원팀 중에는 경찰특공대도 있었다. 합수부 형사가 그들과 만났다.
지원팀이 현장으로 다가왔다.
박순기가 범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서 밖으로 끌고 나왔다. 기절한 놈도 수갑은 채워놓았다.
박순기가 비닐 봉투에 들어있는 권총을 보여주며 말했다.
“불법무기 소지 증거는 여기 있고, 부녀자 납치도 자백했습니다.”
합수부 형사가 나강인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순기가 집안에 납치된 사람이 있다고 판단하고 긴급 상황이라 진입한 거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납치된 사람들은 왜 안 데리고 나오셨습니까? 설마 이미….”
“아뇨. 다른 곳으로 옮겼더군요.”
“아…. 최악의 상황은 아니군요.”
“권총을 가진 놈을 잡았고 그놈이 자백도 했습니다. 자백은 녹음해뒀는데 나중에 녹음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자백이야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 정도면 오늘 일을 문제 삼을 곳은 없겠군요. 그럼 납치된 사람들만 찾으면 되는데….”
“어디로 갔는지 압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합수부 형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원팀도 왔으니까 당장 가서 구출하겠습니다.”
“제가 같이 가야겠는데요.”
“안 간다고 하시면 부탁이라도 드리려고 했습니다.”
***
나강인은 그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신은하는 지원팀이 도착하자마자 의자를 도로 세우고 조수석에서 기다렸다.
나강인이 운전석에 탔다. 신은하가 물었다.
“찾았어?”
“장소를 옮겼더라. 거기로 가려고.”
“나쁜 놈들에게 총이 있었다며? 총소리는 안 나던데?”
“쏘기 전에 잡았어.”
“에이. 시시해라.”
뒷좌석으로 옮겨가서 앉아 있던 지현선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시시해요? 총 쏘면 큰일 나지 않아요?”
“아…. 그렇죠? 농담이에요. 호호.”
지원팀 상당수가 창고를 향해 이동했다. 나강인도 차를 출발시켰다.
신은하가 물었다.
“거기 가서 다 쓸어버리게?”
나강인이 앞을 가리켰다. 지원팀이 타고 온 경찰 승합차가 보였다.
“이번엔 내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싶다.”
나강인은 새로 알아낸 창고로 이동했다.
박순기와 합수부 형사만 있을 때는 나강인이 먼저 적의 아지트에 들어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형사팀과 경찰특공대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그러기는 어렵다.
대신에 나강인은 자문역을 맡았다.
그들은 창고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적이 눈치챌 수 있어서 거리가 꽤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경특 팀장과 형사팀장, 박순기, 합수부 형사, 그리고 나강인이 따로 모여 구출 방법을 의논했다.
경찰특공대 팀장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마포 사건에서 인질을 구출한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박순기가 대신 자랑했다.
“최고의 전문가죠. 이론이든, 실전이든 베스트 오브 베스트입니다.”
“오늘 본 주택에서 용의자들을 제압한 실력을 보면 그런 거 같더군요. 그래도 구출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건 원래 저희 일입니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일단 상황 설명부터 듣고 이야기하시죠.”
그는 그 지역 지도를 인터넷에서 받아 태블릿에 띄워놓고 창고가 있는 곳을 확대하면서 설명했다.
“여기와 여기에 외부 CCTV가 있습니다. 창고 반대쪽도 마찬가지겠죠. 당연히 작동 중일 겁니다.”
AI 전지인이 CCTV의 감시 범위를 표시해주었다. 나강인이 그걸 참고해 태블릿 위에 선을 그었다.
“예상되는 감시 범위는 여기부터 여기입니다.”
경특 팀장이 물었다.
“잠깐만요. 이 밤중에 그게 다 보이십니까?”
이미 해가 떨어져 밤이 됐다. 창고 주변에도 조명이 있지만 사물이 낮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강인이 옆에 놓아둔 쌍안경을 가리켰다. 그 쌍안경은 차에서 꺼내왔다.
“야시경 기능이 들어있습니다.”
“처음 보는 모델인데…. 제가 한 번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경특 팀장이 망원경 기능이 있는 야간투시경으로 창고를 확인했다.
“와아! 이거 성능이 장난 아닌데요? 이걸 어디서 샀습니까?”
“수제품입니다.”
“아…. 그래서 이런 고스펙이…. 누가 만든 겁니까?”
“제가요.”
일부 부품은 인터넷에서 산 제품에서 뜯어냈고 나머지는 2082년 타입으로 새로 제작해서 만들었다.
경특 팀장이 야시경에서 눈을 떼고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예? 인질구출 전문가라면서요.”
“그렇죠.”
“그런 분이 이런 고성능 야시경을 어떻게 만든다는 겁니까? 이건 아마추어가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요.”
합수부 형사가 옆에서 설명했다.
“인질구출 전문가면서 동시에 공학자입니다.”
“아…. 잘하는 게 많으시네요.”
나강인이 말했다.
“장비 성능을 확인하셨으니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이쪽을 감시하는 CCTV는 2개이고, 감시 범위는 여기부터 여기까지이니까.”
그가 태블릿 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CCTV를 피해 진입할 수 있는 경로는 이쪽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경특 팀장이 말했다.
“하지만 거기는….”
“위에 철조망을 친 담장이 막고 있죠. CCTV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타입이라 느리게 철조망을 넘으면 걸릴 수 있습니다.”
“놈들이 모르게 진입해야 하는데 이러면 난감하네요. 반대쪽은 지형이 나빠서 진입하기 더 어려워 보이는데….”
나강인이 제안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먼저 적과 인질의 위치, 그리고 반대쪽 CCTV의 위치와 감시 범위를 알아내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시죠.”
“예? 어떻게 하시려고….”
“제가 원래 잠입과 정찰을 잘합니다. 가서 상황만 파악하고 오겠습니다.”
“그건….”
합수부 형사가 끼어들었다.
“믿고 맡겨 봐요. 이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인 분이니까. 나중에 외부 초빙 교관으로 만날 수도 있습니다.”
팀장이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은 민간인이데….”
“나 선생님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우리 작전에 여러 번 참여했습니다. 한 번쯤 더 한다고 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질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잖습니까?”
팀장이 합수부 형사에게 물었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해결하실 수 있습니까?”
“합수부가 그런 거 되게 잘 해결합니다.”
“음…. 알겠습니다.”
팀장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저격수가 엄호해드릴 겁니다. 하지만 총격전이 시작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정찰만 하셔야 합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러려고요. 남는 옷이 있으면 좀 빌려주시죠.”
“예?”
“혹시 목격자가 나오면 경찰 작전처럼 보이게요.”
“아! 예비로 가지고 있는 걸 한 세트 드리겠습니다.”
나강인은 경특 차량에서 전투복을 받아 갈아입었다. 겉으로 보면 경특 대원처럼 보였다.
경특 팀장이 물었다.
“헬멧은 안 쓰십니까?”
헬멧은 AI 전지인이 반대했다.
- 구형 헬멧을 쓰면 정보 수집 효율이 떨어집니다. 차라리 안 쓰는 게 낫습니다.
“안 쓰는 게 더 편합니다.”
나강인은 전투복을 입고 무전기를 챙긴 후에 혼자 창고 쪽으로 접근했다.
창고 근처까지는 CCTV가 찍을 수 없는 공간이 꽤 있었다. 그는 그런 곳을 이용해 이동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담장을 넘을 때는 그 앞의 공터를 지나가야 한다.
“지인아. 조용히 넘자.”
- 물론입니다.
CCTV가 조금 움직였다. 공터 사이에 사각지대가 생겼다.
AI 전지인이 그 사각지대를 실시간으로 표시했다.
나강인이 달렸다. 그는 30m 거리를 순식간에 뛴 후에 위로 점프했다. 그의 손이 담장의 윗부분을 잡았다. 더 위에는 가로로 세 줄짜리 일자형 철조망이 처져 있다.
나강인이 팔을 강하게 당기며 몸을 띄웠다. 점프하던 힘까지 있어서 몸이 위로 휙 치솟았다. 발끝이 머리 위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올라갔다.
그는 마치 높이뛰기 선수가 장대를 넘듯이 몸을 뒤집으며 철조망을 뛰어넘었다.
대기하고 있던 경특 팀장은 나강인의 망원 야시경으로 그가 침투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나강인이 담장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어? 어? 아니,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입니까?”
박순기가 옆에서 자랑했다.
“실력이 장난 아니지요?”
“혹시 육상 선수 출신입니까? 높이뛰기 메달리스트예요?”
박순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육상 선수를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왜 안 하시지?”
“저런 실력자인 걸 알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습니까?”
“격투기 대회에 나가면 다 씹어먹겠다는 생각만 했죠.”
“예?”
“육상 쪽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나강인은 담장을 넘자마자 소리 없이 전진해 창고 벽에 붙었다.
“지인아. 내부 상황 파악해.”
AI 전지인이 내부에서 들리는 소음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했다.
- 2명의 인기척을 감지했습니다.
“유 박사님과 수연이냐?”
- 아닙니다. 총기를 만지는 소음을 포착했습니다. 무장 상태입니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소음도 확인했습니다.
“그럼 둘 다 적이네. 수연이는?”
- 사람이 내는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습니다.
“한 놈이 무장한 걸 보면 여기가 맞는데 말이야.”
그가 옷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빛이 안쪽으로 반사되지 않으면서 창문으로 내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 위치와 각도를 찾아.”
- 적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들켰다 싶으면.”
나강인이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을 슬쩍 보았다.
“그냥 진입하지 뭐. 그게 문제가 되면 합수부가 해결한다잖아.”
나강인은 창고 내부를 볼 수 있게 손거울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다른 때라면 거울을 들고 한 번 돌려보는 것만으로 실내를 전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업해야 해서 그럴 수가 없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 창문 안쪽 공간의 겨우 37%만 확인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알아. 조금씩 안전하게 확인하려는 거야. 거울 위치 다시 계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