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복경산
나강인은 발목을 다친 유나린을 업고 산에서 내려갔다. 권수연이 바로 뒤에서 따라가며 말했다.
“창고에서는 교수님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잖아요. 이것저것 섞어서 연막탄 만드실 때 진짜 멋지셨어요.”
“그게 멋있었어?”
“그럼요. 근데 그 연막 만든 연기 진짜 몸에 안 나빠요?”
“그 정도 마신 거로는 괜찮아. 담배 연기가 몸에 더 나쁠 거야.”
“다행이다.”
이번에는 유나린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수연이 너는 나처럼 연구만 했으면서 체력이 왜 그렇게 좋아? 넌 아팠던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운동 많이 한 사람 같아.”
“어…. 그래요?”
“지금도 봐. 난 힘이 빠져서 발목까지 삐었는데 넌 기운이 넘치잖아.”
“병이 나은 후로 체력이 좋아지긴 했어요.”
***
신은하와 지현선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은하가 앞을 가리켰다.
“앗! 온다!”
손전등 불빛과 함께 나강인이 산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얼른 다가갔다.
“어디 다친 데는 없…. 잉? 누구를 업고 있는 거야??”
“유나린 박사님.”
“아아….”
지현선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유나린 박사님! 많이 다치신 거예요?”
“발목을 조금…. 그런데 누구?”
“박사님 팬이에요!”
“네?”
“지구뷰티 연구소의 지현선이에요. 저도 박사님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요. 저도 한국대 나왔어요!”
신은하가 투덜댔다.
“학교 이야기는 왜 한담.”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은하야. 여기서 네가 제일….”
“공부 못 한 거 안다고. 아니지. 저기 계신 분은?”
“수연이는 한국대에서 박사과정.”
“쳇. 한국대 동창회냐?”
지현선이 유나린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싸인 좀….”
“제가 지금 상황이….”
지현선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아…. 그렇죠.”
“나중에 시간 될 때 연구실로 찾아와요. 여기 계신 걸 보니까 오늘 나 때문에 고생하신 것 같은데.”
“네에!”
산 아래에는 구급차가 도착해 있었다. 유나린은 평지에서는 천천히 걸을 수 있어서 이송용 들것은 필요 없었다. 그녀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구급차에 탔다.
유나린이 권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도 같이 가자. 겉보기엔 멀쩡해도 검사는 받아봐야지.”
권수연은 권동진이 당부한 것을 떠올렸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진료는 이정호 과장님한테 받으라고 하셨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 괜찮아요. 병원은 원래 다니던 곳에 가볼게요. 거기 잘 아는 분이 계세요.”
“그럼 그냥 구급차로 같이 가기만 해줘. 보호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권수연이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친 사람이 먼저다.
“알았어요.”
유나린과 권수연은 구급차를 타고 떠났다.
나강인은 박순기나 합수부 형사와 이야기할 게 많았다. 신은하는 나강인과 같은 차를 타고 가야 한다면서 남았다.
남을 명분이 없는 지현선만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택시에서 오늘 일을 떠올렸다.
“나강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다 잘할 수 있어? 연구 능력만 해도 놀라운데 잘나가는 무술감독에 인명 구출 작전까지…. 진짜 정체가 뭐지?”
***
유나린은 발목을 접질린 것 외에는 다친 곳이 없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이튿날은 토요일이다. 토요일 오후에 권수연이 한국대학교 안에 있는 유나린의 숙소로 찾아왔다.
“교수님. 발목은 좀 어때요?”
유나린이 다리를 들고 발을 슬쩍 흔들었다.
“운동화를 신으면 걷는 정도는 괜찮아.”
“그럼 우리 놀러 가요.”
유나린은 당황했다.
“응? 어제 미술관에 가다가 그 고생을 해 놓고 또 어디 가자고?”
“그래도 놀아야죠. 안 그러면 교수님은 앞으로도 학교에서만 지내실 거잖아요. 안돼요.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야 해요.”
“그래도….”
“학교 근처 영화관에 가서 영화 봐요. 그럼 안전하잖아요.”
“영화? 요즘 유명한 영화가….”
“당연히 ‘운명의 창’이죠. 표는 제가 예매했어요.”
“그래. 가자. 나도 그 영화가 보고 싶었어. 요즘 연구가 바빠서 못 봤는데 오늘 봐야겠다.”
극장은 학교에서 가까웠다.
유나린이 극장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요즘은 연구가 바빠서 영화 보러 온 거 오랜만이야.”
“저도요.”
“넌 왜?”
“한동안 아팠잖아요. 그땐 걷는 것도 힘들었는데 영화관에 어떻게 가요.”
“그러던 네가 건강해져서 어제처럼 산에서 날아다니는 걸 보니까 진짜 잘됐다 싶어.”
“저도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불치병으로 죽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건강해졌으니까요.’
그들은 상영관에 들어갔다. 관객석은 순식간에 가득 찼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 많구나.”
“당연하죠. 올해 최대 대박은 천만 영화 ‘햇살 좋은 날’일 줄 알았는데, 이 영화가 그 기록을 깰 거래요.”
“둘 다 주연이 김유찬이지?”
“그래서 요즘 김유찬 인기가 쩔어요.”
“신은하도 두 영화에 다 나왔다던데….”
유나린은 어제 현장에서 신은하를 봤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왜 거기 있었지? 나 팀장님하고 아는 사이 같던데….’
영화가 시작됐다.
유나린은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에 감동하고 액션에 감탄했다. 중간중간 눈물도 제법 흘렸다.
그러다 영화 중간에 복경산 장군이 화면에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
그녀가 눈에 힘을 주고 스크린을 보았다. 복경산 장군의 얼굴이 무척 익숙했다.
‘마포에서 나를 구해주신 그분하고 되게 비슷한 느낌인데?’
그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포의 건물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러다 경찰 소속 협상가라면서 혼자 들어온 사람이 적을 다 쓸어버리고 인질들을 구출했다.
그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담당 형사에게 물어보고 경찰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까지 동원해 알아봤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똑같지는 않지만 꽤 비슷한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누구지?’
마포 사건 때 나강인은 종로에서 복경산 부장 역할을 촬영했다. 그러던 중에 박순기가 도와달라고 연락해서, 분장한 상태 그대로 마포로 이동했다.
그는 인질 협상가로 위장하기 위해 그 분장을 일부분만 손본 후에 구출 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두 얼굴이 어느 정도 비슷해 보였다.
유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느낌이 진짜 비슷한데?’
영화가 끝난 후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근처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면서 권수연이 물었다.
“영화 진짜 대박이죠?”
“응. 난 ‘햇살 좋은 날’보다 오늘 본 영화가 더 좋더라.”
“저도요. 그런데 뭐 하세요?”
유나린은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있었다.
“영화에 나온 사람 중에 궁금한 배우가 있어.”
유나린이 복경산 장군을 검색했다. 관련 블로그 글이나 커뮤니티 게시판에 복경산에 관한 글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복경산 역을 맡은 배우가 누군지 알려주는 글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배우가 누군지는 안 나오네. 조연이라서 그러나?”
권수연이 말했다.
“그럼 강인이한테 물어보세요.”
“응? 그걸 왜 나 팀장님한테 물어봐? 영화에 관심 많으셔?”
“강인이가 저 영화의 무술감독이잖아요.”
유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모르셨구나. 강인이가 ‘햇살 좋은 날’의 무술감독이에요. ‘운명의 창’ 무술감독도 맡았어요.”
유나린은 권수연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팀장님은 이공계 아녔어? 왜 갑자기 예체능계가 튀어나와?”
“강인이가 원래 옛날부터 특이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럼 방금 한 말도 진짜야? 나 팀장님이 진짜 저 영화의 무술감독이야?”
“그럼요. 제가 아는 동생 중에 연지라고 있는데요. 걔가 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거든요. 걔가 그랬어요.”
유나린이 인터넷 게시판을 다시 보았다. 복경산 역을 맡은 배우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가끔 있어도 이름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무술감독이면 조연 배우가 누군지 정도는 알겠지?”
“당연하죠.”
“다음에 나 팀장님이 연구실에 오시면 꼭 물어봐야겠다.”
***
유나린은 권수연과 밥을 먹고 학교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PC를 켜고 복경산 배역을 맡은 배우를 본격적으로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글은 없었다.
“진짜 정보가 없네.”
그녀는 권수연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무술감독이라고 했는데….”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강인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그녀가 일단 인사부터 했다.
“아! 잘 지내시죠? 제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바람에….”
- 괜찮습니다. 저도 그땐 바빴으니까요.
“저…. 이런 질문 갑자기 드리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 인공 근육 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인가요?
그녀는 상대가 보이지도 않는데 손을 흔들었다.
“아뇨! 하나도 안 중요한 질문이에요.”
옆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물었다.
“아! 다른 분하고 같이 계신가 봐요?”
- 예. 회의실입니다.
“어머. 그럼 일하셔야죠.”
- 질문이 있으시다고….
“괜찮아요.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젠 안 궁금해졌어요. 회의 잘하세요.”
유나린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복경산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은 부끄러워서 못 물어보겠다.”
그녀는 복경산과 마포 사건 때 투입된 요원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정부 요원이 배우로 출연할 리가 없지. 그것도 그렇게 특수 작전을 하는 분이 어떻게 영화에 나와? 말도 안 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혹시 친척일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물어보려던 건데, 막상 남자 이야기를 남에게 물으려니 창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복경산의 팬클럽을 찾아보았다.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팬클럽이 있을 리가 없었다.
“복경산 팬클럽, 내가 하나 만들까?”
***
KMTV 방송국 드라마 피디 최진욱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누군데 그러십니까?”
“아는 분인데, 뭔가 물어볼 게 있다더니 이제 괜찮다네요.”
“여자 목소리 같던데, 혹시 배우….”
“아뇨. 과학자입니다.”
“아. 그렇군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드라마 제작에 관한 여러 이슈를 논의했다. 나강인은 무술감독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논의 중간에 촬영장소 섭외 이야기가 나왔다. 영화를 세트장에서만 찍을 게 아니라면 여러 곳을 섭외해야 한다.
나강인이 최진욱에게 물었다.
“술집에서 찍어야 하는 장면이 여럿 있잖습니까? 그게 다 고급 술집은 아니던데요.”
“당연하죠.”
“촬영장소로 쓸 술집은 어떻게 선정하십니까?”
나강인은 유나린과 권수연의 실종을 조사할 때 술집의 외부 CCTV 영상을 받았다. 그는 그때 그 술집 주인에게 그곳을 촬영장소로 쓸 수 있는지 피디에게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PPL 광고도 있고요. 느낌이나 분위기가 적당한 곳은 허락을 받고 찍기도 하죠.”
“딱히 제한이 없다면, 저도 하나 추천해도 될까요?”
“좋은 곳이 있나요?”
“그냥 평범한 술집이라 특별한 건 없습니다.”
“분위기만 맞으면 평범한 곳도 쓸 수 있죠. 사진 가지고 계시죠?”
나강인이 그 술집의 사진이 올라온 블로그 링크를 보내주었다.
“이런 곳입니다. 꼭 여기서 찍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손 감독님한테 이야기해도 되니까요.”
블로그 링크를 열어보던 최진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손 감독님이라니요?”
“손태민 감독님이 다음 영화에 참여해달라고 하셔서요. 그 영화에 넣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진욱이 얼른 블로그 속 사진을 확인했다.
“이야아. 이런 평범한 술집을 쓸 장면이 마침 딱 있네요. 도 작가. 그렇지?”
도주희가 최진욱의 옆에서 스마트폰을 같이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없으면 만들어야지.”
나강인이 말했다.
“그 가게에 조금 신세 진 게 있어서 그냥 이야기만 한 겁니다.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최진욱이 손을 흔들었다.
“에이. 저희가 손태민 감독님보다 부족하게 해드릴 순 없죠.”
도주희도 맞장구쳤다.
“저희가 손 감독님만큼 유명한 것도 아닌데 해드리는 것까지 지다뇨. 그건 안 돼요.”
나강인이 말했다.
“아니, 이건 그냥 촬영 장소로 쓸 술집 이야기인데….”
최진욱이 제안했다.
“촬영 장소로 쓸 곳이 또 있으면 다 이야기하시죠. 저희가 드라마 찍을 때 다 집어넣겠습니다.”
“아뇨. 없습니다.”
회의 도중에 여자 주연 선정 문제도 나왔다.
최진욱이 머리를 긁었다.
“예전 같으면 이 다섯 명 중에 누가 하겠다고 하든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 텐데….”
도주희도 한숨을 내쉬었다.
“탈락하는 네 명이 자존심 상한다면서 우리랑은 앞으로 절대로 안 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야.”
도주희가 그 고민을 하는 건, 그 다섯 명이 최진욱이나 도주희만 보고 적극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강인을 보며 생각했다.
‘강인 씨가 탈락하는 네 명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면 다들 받아들일 것 같은데….’
그런데 차마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다. 나강인은 주연배우 선정에 관여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선정에 관여한 사람도 아닌데 탈락한 사람들을 만나 불편한 이야기를 대신 해달라고 하는 건 당연히 무리한 부탁이다.
도주희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이번 드라마에서 어떻게든 나랑 최 피디 이름값을 더 높여야겠네.”
최피디도 같은 생각이다.
“‘푸른 하늘’ 때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해. 이번 드라마가 대박이 나야 우리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