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게이머
나강인은 방송국에서 드라마 제작 회의를 마치고 피시방으로 갔다.
오늘은 피시방 사장 조카 차은서가 일하고 있었다.
“넌 연기 연습으로 바쁘다더니 어쩐 일이야?”
차은서는 최진욱 피디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캐스팅됐다. 요즘은 신은하와 이보라에게 연기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내주는 연기 숙제가 워낙 많아서, 그동안은 그걸 연습하느라 피시방은 대타를 자주 세웠다.
“언니들이 그만하면 걸음마는 하게 됐다고 숙제를 줄여줬어요. 언니들도 배역 경쟁으로 바쁘기도 하고요.”
“은하는 주연 경쟁을 하고 있다고 듣긴 했는데, 보라는 왜?”
“보라 언니는 주연 경쟁에는 못 끼었지만, 중요 조연 자리가 몇 개 있잖아요. 그거 해야죠.”
“보라는 그중 하나에 거의 됐다고 들었는데?”
“보라 언니가 그러는데요. 주연은 진짜 별들의 전쟁이라 참전을 포기한 작은 별들이 중요 조연 자리를 노리고 있대요. 남은 자리보다 노리는 작은 별이 더 많아서 안심할 수 없대요.”
“보라도 작은 별이고?”
차은서가 웃었다.
“보라 언니도 이제 작지만 반짝이는 별 정도는 되잖아요.”
나강인이 차은서를 보았다. 그녀가 맡은 배역은 알레이나 사건으로 최도화가 쫓겨나면서 공석이 된 자리다.
그 배역은 대사는 별로 없다. 대신에 중요 등장인물들과 함께 다닐 일이 많아서 화면에 얼굴을 자주 보여준다. 그런 배역이라면 신인을 알리고 싶은 기획사에서 탐낼 만하다.
그런데 차은서는 다른 기획사가 치고 들어올 때 막아줄 소속사가 없다.
“보라만 그런 거야? 네 배역에도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
나강인이 그녀를 그 배역에 추천했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배역이 확정이라서 괜찮아요. 최 피디님이랑 도 작가님이 직접 전화 주셔서 제 자리는 고정이라고 해주셨어요. 저 같은 신인 단역한테 두 분 다 전화를 주신 거 보면, 참 친절한 분들이신가 봐요.”
“어…. 그러냐.”
나강인은 잡담을 조금 더 하다가 피시방 구석에 있는 그의 고정석으로 갔다.
알레이나가 자주 이용하던 근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바로 옆 신은하과 이보라의 고정석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피시방이 좀 휑한 느낌이 드네.”
- 손님은 많습니다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느낌.”
나강인은 피시방에서는 설계 작업은 하지 않는다. 피시방 컴퓨터의 성능으로는 하기 어려운 작업인 데다가, 여기엔 설계 프로그램도 없다.
그는 평소에는 이곳에서 쉬거나 정보 수집을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요즘은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으니까 오늘은 좀 쉬자. 간만에 게임이나 해야겠다.”
나강인이 가끔 즐기는 게임을 실행했다. 다섯 명씩 편을 먹고 서로 싸우는 AOS 게임이었다.
첫 번째 게임에서 나강인은 탑 포지션을 맡았다. 그 게임은 30분 만에 그가 편을 먹은 팀이 졌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우리 정글이 트롤이라서 진 거야.”
- 그럼 요원님이 정글을 하십시오.
두 번째 게임이 진행됐다. 이번에는 나강인이 정글 포지션을 맡았다.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팀원들이 채팅으로 욕을 했다.
- 우리 정글 뭐하냐? 자냐?
- 정글 차이 보소.
- 갱은 언제 오냐?
나강인이 말했다.
“간다. 가.”
그는 다른 라인의 전투를 지원하러 갔다. 그런데도 욕을 먹었다.
- 갱을 왔으면 이겨야지 왜 정글이 먼저 죽냐!
- 왜 킬을 상납하냐고!
AI 전지인도 한마디 말했다.
- 요원님.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야. 이게 실전이면 내가 진짜 잘할 텐데, 모니터 속 영웅은 내 현실 피지컬을 못 쫓아오잖아. 그래서 이런 거야.”
-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면 네가 해 보던가.”
- 손의 권한을 넘겨주십시오.
“이건 이미 진 게임인데 진짜 하게?”
- 제가 어떻게든 뒤집어보겠습니다.
“알았다. 어디 한번 해 봐라.”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으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화면 아래쪽에서 2:2 전투가 벌어졌다. AI 전지인이 조종하는 정글 영웅이 그 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상대편 정글 영웅도 달려와 AI 전지인의 영웅을 차단했다. 상대 영웅은 이미 더 많이 성장해서 공격력이 훨씬 더 강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거봐. 네가 해도 마찬가지라니까.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AI 전지인이 손가락을 고속으로 움직여 정글 영웅을 조종했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활을 쏘는 특징을 가진 영웅이 적 정글 영웅의 주변을 돌면서 화살을 날렸다.
적 영웅도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즉시 강력한 스킬로 반격했다.
AI 전지인이 조종하는 영웅이 옆으로 이동해 스킬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후에 다시 공격했다. 화살이 연달아 적 정글 영웅에게 박혔다. 한 발 한 발의 데미지는 약한데 빗나가는 게 없었다.
“어….”
탑 라인에서 싸우던 영웅 플레이어가 그 모습을 보며 채팅을 쳤다.
- 미쳤다! 평타에 저쪽 정글이 녹는다!
중앙 라인에서 싸우던 플레이어도 한마디 했다.
- 스킬은 쓰지도 않아!
- 양쪽 정글이 다 논타켓 타입인데, 한 대도 안 맞고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해!
- 정글 차이 쩌네!
적 정글 영웅은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하려 했다. AI 전지인은 놓아주지 않았다. 적은 도주에 실패했다. 순식간에 적 영웅 하나가 녹아서 사라졌다.
“좀 하네.”
- 아직 안 끝났습니다.
AI 전지인이 조종하는 영웅이 곧바로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2:2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적의 체력이 반이나 빠졌지만 아군 영웅 둘은 거의 빈사 상태였다.
그 전장에 AI 전지인의 정글 영웅이 나타났다.
치열하게 싸우던 적 플레이어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자기네 정글이 더 강하니까 당연히 상대편 정글 영웅을 차단할 줄 알았다.
AI 전지인은 아껴뒀던 스킬들을 모조리 쏟아내며 적 영웅 중 하나를 공격했다.
적의 체력이 쭉쭉 빠졌다. 스킬이 모조리 명중하고 사이사이에 평타까지 들어가면서 영웅 하나가 순식간에 소멸했다.
먼저 소멸한 영웅은 무빙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소멸하는 바람에 그걸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남은 영웅은 피지컬만 되면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논타겟 스킬을 썼다.
AI 전지인이 조종하는 영웅은 적의 공격을 현란한 무빙으로 피하며 화살을 쏟아냈다. 적의 히어로는 농락당하다가 소멸했다.
[트리플 킬!]
시스템이 AI 전지인이 방금 적 영웅 셋을 연달아 소멸시켰다고 선언했다.
채팅창에 글이 연달아 올라왔다.
- 무빙 쩐다!
- 와.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 최소 마스터 최대 챌린저께서 이 미천한 심해에 왕림하셨나?
- 이건 이상한데? 저 닉네임 과거 전적을 확인해봤는데 이렇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
- 맞아. 아까도 갱 왔다가 죽었다고.
- 옆에 있던 챌린저가 보다가 하도 답답해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빼앗으신 거다.
- 그러면 말이 되지.
나강인이 할 때는 패색이 짙던 두 번째 게임을 AI 전지인이 뒤집었다. 아군 정글 영웅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적을 학살했다. 전장에 여유가 생겼다. 그 틈에 다른 플레이어들의 영웅도 강해졌다.
결국 상대는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했다.
- 이걸 이겼다!
- 이걸 지네.
화면에 뜬 승리 표시를 보며 AI 전지인이 말했다.
- 게임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 지인이가 사람 되더니 이제 게임도 좋아하는구나.”
- 이것도 일종의 전투입니다. 전투는 제 전문 분야입니다.
“많이 해라.”
AI 전지인은 한 시간 동안 세 판을 더 해 모두 승리했다. 너무 일방적인 게임이라 그중 두 번은 상대가 중간에 항복했다. 마지막 게임은 적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본진이 터지면서 끝났다.
- 뿌듯합니다.
“야. 이제 정보 수집이나 하자. 어차피 이기는 게임을 무슨 재미로 하냐?”
- 요원님.
“왜?”
-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습니다.
“시끄러워. 이럴 거면 아예 네 계정을 새로 파. 내 게임 계정의 전투 이력을 이상하게 만들어놓지 말고.”
- 좋은 생각이십니다.
게임 계정만 새로 판 후에 그들은 인터넷 웹서핑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 작업은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을 빌려서 했다.
정보 수집 활동 10분 만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요원님. 복경산 팬클럽을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은 살짝 당황했다.
“어? 혹시 동명이인이냐?”
- 세부 카테고리에 복경산 장군과 복경산 부장이 있습니다. 영화 ‘운명의 창’의 캐릭터 팬클럽이 확실합니다.
“나는 팬클럽이 만들어질 만큼 대중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는데?”
- 요원님의 팬이 아닙니다. 팬클럽 회장은 배우의 신상정보를 몰라서 영화 속 캐릭터로 인터넷에만 존재하는 팬클럽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아. 그냥 인터넷에 카페만 하나 만든 거구나. 특이한 사람이네. 그래서 회원은 몇 명인데?”
- 열두 명입니다.
나강인이 투덜댔다.
“너무 적은 거 아냐?”
- 단역으로 출연하셨으면서 톱스타라도 되기를 바라셨습니까?
“그래도 열두 명은 너무하잖아.”
- 팬클럽 카페가 오늘 만들어졌습니다.
나강인이 슬쩍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도 내가 출연한 배역인데 카페 회원이 백 명은 넘어야지 말이야.”
- 무려 열 배의 성장을 원하십니까? 많은 걸 바라십니다.
“말이 그렇다고. 어쨌든 카페지기가 누군지 희한한 사람이네. 배우 이름도 모르면서 왜 팬카페를 만들어?”
- 카페지기의 정보를 조사하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 찾았습니다. 유나린 박사입니다.
나강인이 눈을 껌뻑였다.
“어? 아니, 왜?”
- 저도 의문입니다.
“취미생활인가?”
***
유나린은 경찰에 여고 동창이 있다. 그 동창이 그녀를 만나서 말했다.
“나린아. 너 이번에 산에서 고생 많이 했다며? 오늘 고기는 내가 살 테니까 많이 먹어라.”
“술은 안 사주나? 매화 들어있는 거로.”
“술은 네가 사고 싶냐?”
유나린이 소주를 주문했다. 그런 후에 친구에게 물었다.
“내가 납치당했던 것 때문에 위로해 주러 온 거야?”
“겸사겸사.”
“응? 겸사가 있어?”
경찰 친구가 주변을 둘러본 후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전에 마포 인질 사건 때 말이야.”
유나린은 그때 연구비 지원 신청을 하러 마포에 있는 재단 건물에 방문했다가 그곳에 있던 직원들과 함께 인질로 붙잡혔었다.
유나린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그때도 나는 나쁜 놈들에게 붙잡혔었지. 나한테 나쁜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걸까?”
“이년이 술을 마시기도 전에 취했나? 설마 그러겠냐?”
유나린이 발끈했다.
“왜 너도 설마래? 왜 설마야? 나 아직 젊어!”
“네가 원래 미모로 승부 보는 타입은 아니잖아? 아니지. 승부를 본 적이나 있냐? 맨날 연구나 하고 자빠져서는.”
“놀리러 왔니?”
소주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경찰 친구가 뚜껑을 따더니 바로 한 잔을 자작해서 마셨다.
“아니. 마포 인질 사건 때 네가 찾아달라던 사람 말이야. 누군지 드디어 알아냈거든.”
유나린이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얼른 병을 내려놓고 활짝 핀 얼굴로 물었다.
“진짜 그때 그 요원님을 찾은 거야?”
“어. 찾았지.”
“결혼은 했대?”
친구가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년이 어떻게 그것부터 묻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아주 그냥 눈이 휙 돌아가셨네.”
“야. 농담이야. 농담.”
“농담 맞냐?”
“대답이나 하시지?”
경찰 친구가 대답했다.
“유부남인지는 나도 몰라. 개인 정보까지 아는 건 아니라서.”
“찾았다며?”
“누군지 알아내긴 했지.”
그녀가 다시 주변을 슬쩍 본 후에 말했다.
“그동안 네가 말한 사람을 경찰 내부에서 찾았기 때문에 조건이 맞는 사람이 없었던 거야. 네가 그 사람이 경찰이라고 해서 나도 그런 줄 알았다고.”
유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럼 아니야? 경찰 요원이 아닌데 마포 사건 때 왜 협상가로 위장하고 들어왔어?”
“그때는 네가 정부의 특별관리대상이었잖아. 그 사람은 너를 구하려고 외부에서 급하게 초빙한 전문가야. 인질구출의 스페셜리스트지.”
“나를 구하려고? 흐흐.”
“좋냐?”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유명한 분이야?”
“일반인은 잘 모를걸? 근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이야.”
유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실력이 진짜 대단하긴 했어. 총알 사이를 막 날아다녔다니까?”
경찰 친구가 술을 한 잔 더 마신 후에 말했다.
“나도 아는 건 몇 개 없어. 그래도 이름은 알아왔다. 어서 언니한테 고마워해라.”
유나린이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며 물었다.
“고마우니까 빨리 말해. 그분 이름이 뭔데?”
“나강인.”
유나린은 안주를 놓쳤다.
“어? 뭐? 누구?”
“왜 그렇게 놀라? 들어본 이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