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86화 (286/411)

286. 회의실

유나린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나강인이라고 있어서….”

그녀의 고교 동창인 경찰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인’이 드문 이름은 아니지.”

“이번에 산에서 날 구출해준 사람도 나 팀장, 그러니까 나강인 씨인데….”

“그래? 그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당연히 같은 사람이겠…. 어? 설마 같은 사람한테 두 번이나 구출된 거야?”

유나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얼굴도 다르고 나이도 달라. 마포 인질 사건 때 본 그분은 마흔 살로 보였는데, 나강인 씨는 나보다 젊어.”

경찰 친구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린아. 네가 마흔 살쯤이라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을 찾는데 더 오래 걸린 거야.”

“응? 그럼 아니야? 딱 그 나이로 보였는데?”

“네 눈대중은 오차가 대충 열 살쯤 난다.”

“오십? 동안이시네.”

“왜 더하니? 아래로 빼야지.”

“말도 안 돼. 그럼 나보다 어리…. 어? 나이도 두 사람이 비슷하네? 에이. 그래도 얼굴이 다른데 아니지.”

“마포 작전 때는 변장했겠지. 편안한 외모로 변장해서 범인들을 방심시키려고 했나?”

유나린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변장….”

짚이는 게 있었다.

그녀는 나강인이 영화 ‘운명의 창’의 무술감독이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그 영화에 등장하는 ‘복경산’의 외모가 마포 사건 때 본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팬클럽까지 만들었다.

“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진짜 같은 사람이구나.”

“네가 아는 나강인이 그 나강인 맞아?”

“응. 맞는 거 같아.”

경찰 친구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했다.

“언니가 너 위해서 이거 알아내느라 힘들었다. 근데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어떻게 같은 사람한테 두 번이나 구출되냐?”

유나린의 눈이 반짝였다.

“그치? 인연….”

그러다 새로운 문제가 생각났다.

“아. 마흔 살인 줄 알았는데 열 살쯤 젊으면….”

“나도 정확한 나이를 아는 건 아니니까 참고만 해. 대충 서른 살쯤이라더라.”

유나린이 슬그머니 물었다.

“몇 살 연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너한테는 땡큐지.”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치? 땡큐지?”

“근데 상대 의견도 물어봤냐?”

“아니, 그거야….”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따져 물었다.

“너 말이야. 좀 전에 왜 내 마성의 매력 이야기에 설마라고 한 거야? 왜 의문을 가져? 내가 어때서?”

“어….”

“이번에 마약상 놈한테 붙잡혔을 때, 수연이도 나한테 설마라고 했어. 왜?”

“술 마시자. 매화 들어간 술 시킬까?”

“그러니까 내가 왜 설마인데!”

***

KMTV의 드라마 캐스팅은 조연급까지는 대부분 확정됐다.

이보라는 막판에 약간의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좋은 배역을 따냈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에 원한 배역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녀가 방송국 1층 카페에서 투덜댔다.

“나 진짜 주연시켜주면 잘할 수 있었는데.”

일찌감치 단역으로 확정된 차은서가 위로했다.

“언니 연기력은 충분히 주연 잘할 수 있죠. 근데 이번엔 상대가 너무 강했어요. 잘나가는 톱스타들이 그렇게 많이 참전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치? 이런 이상한 상황만 아니었으면 나도 해볼 만했지?”

“그럼요. 저번 드라마 때도 좋았고, 이번 ‘운명의 창’에서도 언니 연기 정말 좋잖아요. 그 두 작품으로 인기도 많이 얻었고요.”

이보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쳇. 경쟁상대가 은하 혼자면 이길 자신이 있었는데.”

차은서는 그 말에는 맞장구는 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신은하와 이보라 두 명 다 동네 친한 언니다. 아무리 위로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한쪽 편을 드는 건 곤란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카페의 바로 옆 테이블에 공지현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대본을 보고 있었다.

이보라가 그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지현이 너는 우리 드라마를 왜 하는 거야?”

이보라와 공지현은 운명의 창에서 같이 연기했다. 이보라도 이 드라마에 일찌감치 도전해 배역을 확정받았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선생님한테 좀 더 배우고 싶어서요.”

“강인 오빠?”

“네.”

“넌 강인 오빠를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라? 그 오빠는 우리가 물어보면 연기 못한다고 하던데….”

공지현이 손을 흔들었다.

“아녜요. 선생님 연기 진짜 잘하세요.”

“아니까 그렇게 적극적으로 편들 필요 없어. 강인 오빠가 복경산 역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나도 봤잖아.”

“그쵸?”

“근데 강인 오빠 말로는 그 배역하고 마침 딱 맞아서 어쩌다 잘할 수 있었다더라.”

공지현은 슬럼프에 빠져 드라마 촬영장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나강인을 처음 만났다. 그때 그녀를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준 나강인의 연기가 생각났다.

“아닌데…. 표정 연기 진짜 어마어마하신데.”

그때 보여준 나강인의 표정 연기는 AI 전지인의 보정 덕분에 나왔다.

이보라가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아참. 둘이 인사해. 얘는 공지현. 자칭 강인 오빠 연기 제자. 얘는 차은서. 우리 중에서 강인 오빠랑 제일 오래 아는 애야.”

공지현의 눈이 반짝였다.

“앗! 선생님을 오래전부터 아신 거예요?”

차은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래전부터는 아니고, 언니들보다 좀 먼저….”

“와아. 어떻게요?”

“우리 삼촌 피시방에서 강인 오빠를 처음 봤는데요. 그 오빠가 거기서 알바도 하고, 밥도 팔고, 한동안 거기서 먹고 자고 했어요.”

“와. 좋았겠다.”

“좋긴 했죠. 피시방 장사에 엄청 도움이 됐거든요. 진짜 그렇게 이것저것 다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특히 요리는 와…. 대단하죠.”

“맞아요. 선생님 밥차 요리 진짜 맛있어요.”

이연지가 갑자기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세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연지는 학교에서 바로 오는 바람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보라가 손을 들었다.

“연지 왔구나?”

이연지는 친화력 레벨이 워낙 높아서 같이 출연한 배우나 촬영장 스태프들과 잘 알고 지낸다. 이보라는 옆 동네 언니라 더 잘 안다.

그녀가 이보라에게 다급히 말했다.

“보라 언니! 이 카페 망고 파르페가 진짜 맛있어 보여요! 밖에서 침만 삼키다가 언니들 있는 거 보고 안으로 들어왔어요!”

“응. 사 먹어.”

“고딩이 돈이 어디 있어요?”

“용돈 안 받아?”

“먹는 데 다 썼죠.”

이보라가 우아한 동작으로 가방에서 지갑을 꺼낸 후에 손가락 두 개로 카드를 뽑아 내밀었다.

“옜다.”

이연지가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았다.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운명의 창’ 촬영 끝난 지가 언제인데 마마는 무슨.”

“절찬 상영 중이잖아요.”

이연지는 망고 파르페에 추가로 케이크까지 사 왔다. 그런 후에 숟가락으로 파르페부터 떠먹었다. 원래 밝던 그녀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맛있다!”

이보라가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잘 먹으니까 좋긴 한데, 넌 그렇게 먹고도 어떻게 살이 안 찌니?”

“고딩이라서?”

“나 고딩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 너 그거 병에 걸렸다가 나으면서 살 안 찌는 부작용이 생긴 거라고 했지?”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하는 거죠. 퇴원한 후부터 체질이 이렇게 변했으니까요.”

“나도 그 병에 걸려봤으면 좋겠다.”

“저는 무슨 병인지도 몰라요. 걸린 줄도 몰랐고요. 아빠가 입원하라니까 한 거죠.”

“그런데 그 체질 불편하진 않아? 혹시 1인분만 먹으면 배가 많이 고파?”

“아뇨. 1인분만 먹어도 안 죽어요. 대신에 많이 먹으면 힘이 더 나요.”

“진짜 부럽다.”

이연지가 케이크를 먹으며 물었다.

“근데 우리 오늘 왜 방송국에 모이는 거예요?”

“모르면서 왜 왔어?”

“그냥 오늘 회의실로 오라던데요?”

“나한테는 자세하게 설명해주던데, 연락 담당 스태프가 배역 따라서 사람 가리네. 캐스팅이 자꾸 늦어지니까 배역 확정된 사람들만 먼저 간단히 미팅하는 거야. 우리 말고도 많이 올 거야. 바쁜 사람은 안 올 거고.”

모이라고 한 장소는 이 카페가 아니라 방송국 회의실이다. 그들은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회의실로 갈 예정이다.

이보라가 제안했다.

“우리 모인 김에, 이따가 어디 가서 연기 연습 좀 할까?”

“대본은 아직 안 나왔잖아요.”

“초고 1, 2편은 받았잖아. 그걸로 해야지.”

“그거 바뀔 수도 있다던데….”

“바뀌어 봐야 거기서 얼마나 바뀌겠어?”

차은서가 사과했다.

“연지야. 미안. 보라 언니가 저러는 건 나 때문이야. 보라 언니가 나한테 연기 연습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아항!”

이보라가 한마디 보탰다.

“겸사겸사 우리도 합 좀 맞춰보자는 거지. 이 드라마에 우리 네 사람이 같이 나오는 장면이 꽤 있잖아.”

이연지는 먹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녀가 차은서에게 물었다.

“전 좋아요. 근데 연습 도와드리면 피시방에서 밥값 좀 깎아줘요?”

“응? 난 알바인데?”

“사장님 조카라면서요.”

“내가 냉동 위주로 조리해줄게. 공짜로.”

“아싸아! 응? 근데 우리 이따가 어디서 연습해요?”

이번에는 이보라가 설명했다.

“은하한테 들었는데, 강인 오빠가 자주 대여하는 체육관이 있대. 회의실에서 만나면 거기 좀 빌릴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공지현은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럼 혹시 오늘 선생님이 오세요?”

“미팅이니까 오겠지? 왜?”

“저 화장실에 잠깐….”

“화장 고치게? 그냥 있어. 그런 거 신경 쓰는 오빠 아니잖아.”

“언니는 메이크업 제대로 했지만 저는 아니니까 조금만….”

나강인이 카페에 들어왔다.

“지나가다 보니까 아는 사람이 많이 있네?”

공지현이 얼른 일어나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이연지도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하이.”

“넌 고등학생이 공부 안 하고 왜 여기 있냐?”

“이만큼만 해도 전교 1등인데요?”

“어…. 그래. 넌 공부는 그 정도만 해도 되겠다.”

이보라가 말했다.

“강인 오빠. 혹시 우리 연기 연습 도와줄 시간 있어요? 자주 가신다는 체육관에서요.”

“거기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액션 훈련밖에 없는데, 정말 그게 받고 싶냐?”

“네!”

“보통 후회하던데.”

“에이. 후회를 왜 하겠어요?”

“알았다. 오늘은 거길 빌리기 어려우니까 나중에 체육관으로 가자. 지금은 일단 뭘 좀 먹어야지. 내가 요즘 헐벗고 굶주려서 밥이 필요해. 그러니까.”

나강인이 카페 벽에 걸린 메뉴판을 가리켰다.

“훈련비 대신에 저기부터 저기까지 사와.”

이연지가 옆에서 손을 뻗었다.

“저기부터 저기까지도요!”

“그치! 잘나가는 배우님 돈으로 먹는 건데 저거 다 먹어봐야지.”

“당연하죠!”

***

나강인과 이연지는 카페에서 이것저것 잘 먹었다.

다른 세 명은 피디와 작가, 다른 배우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렇게 속 편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커피만 마셨다.

차은서가 말했다.

“강인 오빠는 원래 많이 먹는데, 연지도 진짜 많이 먹는다. 둘이서 인터넷으로 먹방 하면 되겠다.”

이연지가 눈을 반짝였다.

“앗! 그럴까요?”

“거절한다.”

“쳇. 공짜로 실컷 먹을 수 있었는데.”

나강인이 이연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이연지의 식사량이 평범한 사람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게다가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지. 먹는 양이 점점 느는 것 같아. 이 과장님과 이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이연지가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이 과장님께서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시냐?”

“아빠는 이미 포기하셨어요.”

“아시는구나.”

차은서가 말했다.

“강인 오빠도 많이 먹으니까 연지를 그렇게 한심하게 볼 필요는 없잖아요.”

“야. 나는….”

아무리 군용 신체 강화 시술을 받았어도 먹지도 않고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나강인이 힘을 많이 쓰려면 그만큼 많이 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걸 말해줄 수는 없다.

“그렇게 본 게 아니라….”

이렇게 많이 먹는 이유가 케이타이거 증후군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았다. 그런데 나강인이 닥터 노네임이라는 건 알려줄 수 없다.

나강인이 이연지를 보며 말했다.

“한심해서 본 거 맞아.”

“아이 씨!”

“욕한 거냐?”

“아닌데요. I see. 영어인데요.”

***

그들은 먹을 걸 다 먹은 후에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실 앞에서 젊은 남자 스태프가 참석자와 명단을 비교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달려간 이연지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연지입니다.”

“교복이네? 고등학생?”

“넵!”

“예고?”

“아뇨. 일반고요.”

“소속사는?”

“없는데요?”

“그런데도 좋은 배역을 받았네?”

이연지가 평소처럼 웃었다.

“히히. 저도 깜짝 놀랐어요.”

“누구 빽이야?”

“넹? 그냥 제가 혼자 신청해서 오디션 봤는데요?”

“오디션으로 이 배역을…. 그렇단 말이지?”

스태프가 명함을 슬쩍 내밀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내가 좋은 기획사를 소개….”

나강인이 쓱 끼어들었다.

“기획사 영업을 제작 스태프가 방송국 회의실에서 고등학생을 상대로 하시네? 어느 기획사입니까?”

“헉! 나 감독님?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나강인이 이연지가 받은 명함을 도로 가져갔다. 그는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룡 엔터? 여기 아직도 안 망했습니까?”

“회사는 괜찮….”

“지금 하는 거 보면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이연지가 물었다.

“앗! 이상한 회사예요?”

“사장이 체포됐거든. 브레드 밀러라는 미국인과 함께 수작을 부리다가 체포됐지.”

“앗! 그 개…. 아니, 아는 언니가 그렇게 불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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