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바하테크
이연지가 말한 아는 언니는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이다. 그녀는 지금 한국에서 비밀수술을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브레드 밀러와 고룡 엔터 사장 박지훈은 알레이나 민의 곁에 있던 나강인을 쳐내려고 강남 룸살롱 사장 조정철을 끌어들였다가, 모두 체포됐다.
고룡 엔터의 지분을 가진 투자자들은 박지훈이 체포된 이유를 알게 되자마자 그를 사장 자리에서 쫓아냈다.
스태프가 급히 변명했다.
“박지훈 사장은 잘렸습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룡 엔터는 이제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서 배우 숫자를 늘리려나 본데, 그렇다고 드라마 스태프가 방송국 회의실 앞에서 이렇게 영업해요? 그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여고생한테 고룡 엔터 따위의 명함이나 주다니.”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이보라가 다가왔다.
“어머어. 무슨 일이야? 누가 우리 연지 괴롭혀?”
이연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아니에요. 저분이 저를 고룡 엔터로 보내려는 거예요.”
이보라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뭐? 고룡 엔터? 왜 하필 거기야? 거긴 사장이 체포되기 전부터 안 좋은 소리 많이 들렸어.”
“좋은 곳으로 바뀌었다던데요?”
“걸레가 빤다고 수건 되니? 거기 가지 마.”
이보라가 스태프를 째려보았다. 스태프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이연지에게 말했다.
“언니 소속사로 와. 내가 말 잘해줄게. 은하네 회사는 가수나 챙겨주지 배우한테는 우리 회사가 더 잘해.”
“안돼요. 공부해야 해서 회사에는 못 들어가요. 부모님도 그것까진 허락 안 하실 거예요. 대학 가야죠.”
“하긴. 아직 고등학생인데 연기만 하기엔 네 성적이 너무 아깝지.”
이보라가 스태프를 다시 째려본 후에 이연지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공지현과 차은서도 따라 들어갔다.
나강인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 들어간 후에 물었다.
“혹시 연지한테 오늘 회의실로 오라고 연락했습니까?”
“연락은 최 피디 님이 시켜서 제가 쭉 돌린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함이?”
“네?”
***
회의실에는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연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과자부터 먹고 음료수를 마셨다.
이보라가 물었다.
“넌 카페에서 그렇게 먹었으면서 과자가 또 들어가니?”
“음. 이건 뭐랄까? 에너지를 저축해놓는 느낌이랄까?”
“배에 배터리라도 들어있니?”
“으하하핡. 진짜 같아서 더 웃겨요.”
“다른 배우들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 다들 너 쳐다본다.”
“넹.”
사람이 더 모인 후에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최진욱이 말했다.
“오늘은 배역이 확정된 분들끼리 서로 얼굴을 보면서 미팅을 하고 싶어서 모셨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모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못 오신 분들도 많지만, 일단 오신 분들이라도 미리 조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도주희도 인사했다.
“각자 맡은 배역에 대한 의견도 자유롭게 해주시면 참고할게요.”
두 사람이 나강인을 쳐다보았다. 나강인은 원래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액션 담당인 나강인입니다.”
배우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웅성거렸다.
나강인과 같이 일해본 스태프들은 그의 얼굴을 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배우 대부분은 그를 오늘 처음 본다.
주연급 조연 배역을 맡은 송인준이 옆자리에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나강인 감독님. 영광입니다.”
“제가 뭐라고 영광까지야….”
“제가 정말 나 감독님하고 액션을 하고 싶어서 이 드라마 배역 따려고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어…. 그렇습니까?”
“주인공이 목표였는데 그건 막판에 미끄러졌지만요. 그래도 주인공의 상대역은 제가 사수했습니다. 하하하.”
송인준이 웃으면서 더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 주연 김유찬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앞에서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길을 막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최진욱 피디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거죠.”
“아니, 진짜로 앞에서 사고가 나서 그거 도와주다가….”
“괜찮습니다.”
“안 믿으시는구나.”
배우들이 웅성거렸다.
“남자 주인공이 김유찬이었어?”
아직 누가 어디에 캐스팅됐는지는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유찬이 주연이라는 걸 미리 알았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헐. 지금 제일 핫한 영화배우 아냐?”
“운명의 창도 천만 돌파가 확실하다고 하잖아. 연타석으로 천만을 치는데 당연히 제일 핫하지.”
“그런 영화배우가 갑자기 드라마를 해? 와. 이 드라마 섭외력 쩌네.”
송인준이 나강인의 옆자리에서 말했다.
“경쟁자가 유찬이만 아니었어도 주연은 제가 따냈을 텐데, 진짜 아쉬웠습니다.”
김유찬이 송인준을 밀었다.
“야. 네 자리로 가. 여긴 내 자리잖아.”
“자리 맡아놨냐?”
김유찬이 회의 탁자 위를 가리켰다.
자리 대부분은 주인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 배역 자리에만 이름이 적힌 표가 올려져 있었다. 그 자리 하나만 예약석이었다.
송인준이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투덜댔다.
“특별대우 쩌네. 간다. 가.”
김유찬이 나강인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강인 씨. 오늘 미팅 끝나면 같이 밥 먹으러 가죠. 예약도 다 해놨으니까요.”
“어디로요?”
“당연히 자주 가던 거기죠.”
송인준이 옆에서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나도 가도 되나?”
“테이블에 자리 다 찼다.”
“의자만 하나 더 놓으면 되잖아.”
김유찬이 송인준을 밀어내며 최진욱에게 물었다.
“피디님. 그럼 우리 이제 섭외는 거의 다 된 건가요?”
“남자 쪽은 중요 배역은 거의 끝났는데, 여자 배역이 아직 확정이 덜 됐습니다.”
“하긴. 여자 쪽은 주연 경쟁이 어디 보통 치열해야죠. 아주 피가 튄다던데.”
남자 주연은 김유찬이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해서 주연 확정이 그나마 빨랐다. 떨어진 쪽에서도 상대가 김유찬이라 납득했다.
그런데 여자 주연은 비슷한 급의 스타 다섯 명이 경쟁 중이다. 누가 되든 떨어진 사람들은 불만이 생길 게 뻔하다.
최진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자 주인공을 다섯 명으로 늘릴 수도 없고….”
***
오세나가 신은하에게 물었다.
“근데 말이야. 설마 강인 씨가 너한테만 빽이라도 써주는 건 아니겠지?”
신은하가 발끈했다.
“이거 왜 이래요? 공정하게 경쟁 중이거든요?”
“아니, 빽을 쓸 거면 나한테도 좀 써달라고. 다른 셋을 어떻게든 쳐내야 하잖아.”
신은하도 나강인의 지원을 좀 받고 싶다. 그런데 슬쩍 찔러봤더니 나강인은 힘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오세나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는 싫었다.
“우리 부끄럽지 않게 경쟁하자고요.”
“알았어. 괜히 말 꺼낸 내가 부끄러워지네. 나 원래 배역 딸 때 빽 쓰는 사람 아니야. 알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오세나는 원래 출연작을 낙점하는 쪽이지 뽑히려고 애쓰는 쪽은 아니다.
“나 진짜 그런 사람 아니야.”
***
드라마 출연자 미팅 중간 휴식시간에 나강인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발신자가 합수부 형사였다.
“음?”
나강인이 전화를 받았다.
“혹시 무슨 곤란한 사건이라도 생겼습니까?”
- 아. 도움 쿠폰을 쓰려고 전화 드린 건 아닙니다. 그건 두 개밖에 없는데 아껴 써야죠. 차 이사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나강인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엿듣는 사람은 없었다.
“차 이사가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의심 가는 정황이 좀 나와서요.
드라마 출연자 미팅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일단 만나시죠.”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에 김유찬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찬 씨. 오늘 저녁 약속은 늦을지도 몰라요. 급한 일이 생겨서요.”
김유찬은 해적 사건이나 이보라 납치사건 등을 나강인과 같이 겪었다.
김유찬이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또 해적단이라도 잡으러 가요?”
“내가 매번 총 쏘고 그러는 건 아닌데….”
“자주 쏘던…. 늦으면 우리끼리 먼저 먹고 있을게요.”
나강인은 최진욱과 도주희에게도 이야기한 후에 방송국을 나갔다.
***
나강인이 합수부 형사를 공원 벤치에서 만났다. 형사는 이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편의점에서 산 홍삼음료를 형사에게 내밀었다.
“먼저 오셨네요.”
형사가 음료를 받아 병뚜껑을 딴 후에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보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그러게요.”
“매일 야근하느라 이렇게 여유 있게 하늘을 볼 틈이 없었는데….”
합수부는 나강인이 해결한 사건을 넘겨받아 마무리할 때 야근을 하곤 했다.
나강인이 미안한 마음에 물었다.
“어…. 다음에 뭐라도 좀 만들어드릴까요?”
“드래곤 플레이트 정도면 딱 좋은데요.”
“설마요. 도시락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농담입니다. 하하하.”
합수부 형사가 공원을 보면서 홍삼음료를 마셨다. 그러면서 설명했다.
“그 미술관에서 관장이 훔치려 한 그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건을 조사하다가 ‘왜 하필 그 그림을 노렸을까?’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제일 비싸서?”
“합수부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전화하셔서 차 이사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셨죠.”
“유나린 박사 사건에 차 이사가 개입한 걸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미술관 사건을 다시 짚어보니까, 정보와 장비를 제공하는 방식에서 차 이사의 냄새가 나더군요.”
“예. 저도 듣고 보니까 딱 차 이사가 생각나는 수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술관장에게 차 이사를 아는지 물었습니다.”
“인정하던가요?”
“화들짝 놀라더군요. 차 이사를 언급해서 놀란 건 아니었습니다. 이번 일에 브로커가 있다는 걸 들켜서 놀란 거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사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미술관장 말로는 차 이사가 그 그림을 지목했답니다. 사주겠다고. 백억에.”
나강인이 인상을 살짝 썼다.
“장물인데 시세를 다 쳐준다고요?”
“이상하지요? 그래서 저도 차 이사가 어떤 놈인지 미술관장에게 알려준 후에, 그럴 리가 없다고, 장물인데 최소한 반이라도 깎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관장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더군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나 보군요.”
“예. 그래서 제가 약을 좀 쳤죠. 분명히 그림만 손에 넣고 사람은 제거하려 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믿던가요?”
“믿더라고요. 제가 연기가 좀 되거든요. 다음에 단역이 급하게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기왕이면 교수나 과학자 역할로요.”
“저는 감독이 아니라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겁먹은 미술관장이 사건에 관한 걸 술술 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다 알아냈는데, 미술관장도 차 이사가 누군지는 모르더군요.”
나강인도 홍삼음료를 마시면서 말했다.
“차 이사가 그 그림을 자기가 가지려 했다기보다는, 이번에도 중개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구매자가 따로 있겠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차 이사가 지목한 그림을 누가 사려고 했을지 조사했습니다. 그러다 재미있는 걸 알아냈습니다. 우향 그룹 아시죠?”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우향 그룹 회장이 미술품 수집가입니다. 이번에 도난당할 뻔한 그림에 대해 알아봤더니, 우향 회장이 굉장히 가지고 싶어 하던 것이더군요.”
“재벌 회장이면 돈도 많은데 그냥 사면 되잖습니까?”
“그 그림은 그 나라에서 문화재급으로 취급하는 것이라서 팔지 않습니다.”
나강인이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미술품은 차 이사의 전문 분야가 아닐 테니까, 중간에 누가 또 있겠군요.”
“우리도 그걸 알아보기 위해 좀 더 팠습니다. 바하테크란 회사가 있습니다. 규모가 꽤 큰 중견기업인데, 영업 구조가 비자금을 만들기 쉽습니다.”
“비자금이 그 그림을 장물로 살 수 있을 만큼 많을까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요즘 우향 그룹은 자금을 대규모로 투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바하테크와 다른 회사 하나가 사업 파트너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중입니다. 두 회사의 기술 수준이 비슷해서 어느 회사가 파트너로 선정될지는 우향 회장 마음이라더군요.”
“그래서 그 그림을 회장에게 뇌물로 꽂고 경쟁자를 떨구려 한다? 회장이 미술품 수집가라면서요. 장물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미술품은 부동산이 아니라서, 자기들끼리 거래하면 기록이 남지 않습니다. 수집가가 개인 수장고에 보관하면 아무도 모르죠.”
“하긴. 그럼 경쟁 회사가 아니라 바하테크를 의심하는 이유는요?”
“바하테크는 기술력이 꽤 있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합수부에서 이번에 알아봤더니, 그 기술력을 쌓은 과정이 좀 수상합니다. 물론 증거는 없습니다만.”
“바하테크가 이전에 차 이사를 통해 다른 회사의 기술을 훔쳤을 수 있겠군요. 그건 그쪽에서 차 이사에게 먼저 연락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고요.”
“그렇죠.”
“합수부의 결론은 바하테크의 사장이 미술관 사건의 배후일 수 있다는 거고요.”
“블러드 아이스와 바하테크는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미술관 사건은 연결점이 있으니까요.”
나강인이 합수부 형사를 돌아보았다.
“저를 보자고 한 건, 문제가 생겨서였을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