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바하테크 II
합수부 형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의심은 가는데, 그 근거가 약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재벌 회장이 그 그림을 가지고 싶어 하니까, 거래 회사 사장이 뇌물로 쓸 목적으로 그걸 훔치려고 했을 거다? 그런 의심만으로는 수색영장 신청조차 못 합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어떻게든 영장을 신청하면요?”
“무리해서 신청해봤자 재벌 회장 이름이 서류에 들어있는데 영장이 나오겠습니까? 그 이름을 빼면 그 약한 근거조차 없어지니까 뺄 수도 없고요. 그래서 윗분들은 바하테크에서 손을 뗐는데….”
합수부 형사가 홍삼음료 병을 들었다. 대화하면서 이미 다 마셔서 비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은 몇 방울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바하테크가 의심스럽단 말입니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으니까 보자고 하셨을 텐데요?”
“딱 하나 있기는 있는데 말이죠.”
형사가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그런 후에 서류 파일을 불러냈다.
“이 문서는 못 보신 겁니다?”
“무슨 문서요? 너튜브 동영상 같은데요.”
“어이구. 그러고 보니까 이게 프프걸스 체조 동영상이네요?”
형사가 문서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바하테크에는 하이 캐슬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캐슬? 성이요?”
“진짜 성이 아니라, 일반 직원은 출입이 금지된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사장이 특별히 허락한 직원만 들어갈 수 있어서, 직원들은 하이 캐슬이라고 부른다더군요.”
“그러는 게 불법이면 그걸 핑계로 거길 이미 터셨을 테고.”
“불법은 아니죠. 통제구역을 어떻게 만들고 출입 자격을 누구한테 주는지는 회사 마음이니까요.”
“용도는요?”
“사장에게 따로 기술 브리핑을 하거나 기밀 회의할 때도 쓰고, 자기들끼리 놀 때도 씁니다. 내부에 술을 마실 수 있는 바도 있고, 피시방 시설도 있는데 작은 대회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라더군요.”
“그게 다가 아니겠지요?”
“이게 중요한 건데요. 그곳에는 소규모 제품 제작 및 테스트 시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 미술관의 위조 액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단서가 있을 겁니다.”
나강인이 홍삼음료를 마저 마셨다.
“하긴. 도둑질에 쓸 물건을 개발이나 생산팀에게 만들어오라고 시키진 않았겠지요.”
“최측근에게 지시해서 비밀리에 만들려면 거기서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의심은 가는데 거길 조사할 방법이 없고요.”
합수부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건으로 수색영장을 발부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아니면 유력한 단서라도 나와야 합니다. 어설프게 나서면 역풍만 맞습니다.”
“형사님 혼자 들이받았다가 잘못되면 골치 아파지겠군요.”
“저쪽에서는 증거를 더 꼼꼼하게 인멸할 테고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공식적으로는 프프걸스 동영상을 보는 거고요?”
형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 느낌으로는 분명히 바하테크 짓인데, 조사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의논이라도 하려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의논만 하려고 하신 겁니까?”
형사가 주변을 다시 슬쩍 둘러본 후에 목소리를 더 낮췄다.
“바하테크에서 조만간 CF를 찍을 예정이라더군요. 그 CF에 선생님이 무술감독으로 참여하시면 사장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범인을 워낙 잘 찾아내시니까 그때 뭔가 알아내시면….”
나강인이 거절했다.
“그 회사 CF는 안 할 겁니다. 그 CF가 잘 되면 사장이 돈을 더 많이 벌 테니까요.”
“아. 그건 생각만 해도 싫군요.”
합수부 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의심은 가는데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
나강인은 합수부 형사와 헤어지고 나서 레스토랑 페넬로페로 이동했다.
김유찬과 신은하, 이보라가 먼저 와 있었다. 신은하와 이보라도 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강인이 자리에 앉았다.
“좀 늦었습니다.”
김유찬이 물었다.
“해적단 하나쯤은 총으로 다 쓸어버리고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내가 맨날 총 쏘면서 싸우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냥 간단한 회의였어요.”
“아. 그렇구나. 난 또.”
대표 셰프 오규철이 나강인이 먹을 요리를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오늘은 유찬 씨가 드라마 주연을 맡은 기념으로 쏘는 거라면서요?”
오규철이 와인 한 병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이걸 가져왔습니다.”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오 셰프님의 축하 선물인가요?”
“설마요. 우리 탑스타 유찬 배우님이 주연 맡은 거야 당연한 건데 무슨 선물까지야. 이 기회에 얼른 파는 거죠.”
“당했다. 맛은 보장하겠죠?”
“어렵게 조금 구한 와인의 마지막 한 병입니다. 저 혼자 마시려던 건데, 자리가 자리라서 내놓는 겁니다. 이거 진짜 맛이 다릅니다.”
이보라가 얼른 와인의 이름을 검색했다.
“어머. 이거 국내에 들어왔을 때 뉴스에도 났던 와인이네요.”
김유찬이 생색을 냈다.
“뉴스에는 가십거리 정도로 간단히 난 거죠. 별거 아닙니다. 음하하하.”
네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로 올라온 건 최 피디와 도 작가의 신작 드라마였다.
신은하가 말했다.
“유찬 오빠는 좋겠어요. 주연이 확정돼서요. 난 아직도 경쟁이 치열한데. 지금쯤이면 한두 명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아무도 포기를 안 해?”
김유찬이 씩 웃으며 머리카락을 슬쩍 넘겼다.
“남자 주연 배역도 하려는 사람이 좀 있었어. 그런데 내 상대는 아니었지. 고만고만한 여자 주연 경쟁하고는 다르게 말이야.”
“고만고만해서 미안하네요. 아주 얄미워 죽겠어.”
이보라가 한숨을 쉬며 신은하에게 말했다.
“야. 넌 그래도 주연 경쟁 중이잖아. 날 좀 봐.”
“넌 확정됐잖아.”
“됐지. 근데 조연이라고.”
신은하가 씩 웃었다.
“넌 아직 내 상대는 아니잖아? 이 피 튀기는 주연 경쟁에 참전했으면 넌 초반에 학살당했어. 그럼 조연 경쟁도 불리해졌을걸?”
“니가 유찬 오빠보다 더 얄미운 거 알지?”
“너한테 배운 건데? 넌 평소에 더하잖아?”
“강인 오빠. 뭐라고 한 마디 해주…. 어? 무슨 고민 있어요?”
나강인은 음식을 먹으며 합수부 형사와 이야기한 걸 생각하고 있었다.
“음? 아니. 어떤 회사에 대해 생각했어.”
“회사요? 무슨 회사요? 주식 해요? 좋은 거 있으면 추천 좀 해줘요.”
“주식 안 해.”
“그럼 무슨 회사 생각인데요?”
“바하테크라고 있어. 알아?”
“아뇨.”
이보라가 아니라 김유찬이 관심을 보였다.
“게임 대회?”
이보라가 김유찬에게 물었다.
“회사 이름을 말했는데 왜 게임 대회 이야기를 해요?”
“작은 규모의 토너먼트 게임 대회가 있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대회인데, 그 대회를 주최하는 곳이 바하테크야.”
신은하와 이보라도 피시방에 자주 다니면서 게임을 종종 접해보았다. 그래서 그건 식사와 술을 같이 할 때 잡담으로 나누기 좋은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신은하가 물었다.
“무슨 게임 대회인데 매달 열려요?”
“작은 대회인 데다가 온라인으로 열리니까 가능한 거지. 그래도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대회야.”
나강인도 김유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 사람 다 김유찬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었다. 신이 난 김유찬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설명했다.
“공식 게임 대회는 아니고 바하테크에서 따로 진행하는 이벤트성 대회야.”
신은하가 물었다.
“무슨 게임인데요?”
“전설의 레전드. 온라인으로 참가 신청을 받아서 도전자들끼리 토너먼트를 시켜. 그렇게 살아남은 최종 다섯 명은 프로 게이머와 싸울 자격이 생기지.”
“그 게임 알아요. 그거 오 대 오로 편 먹고 싸우는 거잖아요. 프로 게이머 다섯 명을 일반인들이 어떻게 이겨요?”
김유찬이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당연히 못 이기지. 그래서 회사에서 준비하는 상대 팀 구성은 프로 게이머 한 명에 따로 섭외한 네 명이야.”
“아. 프로는 한 명이구나.”
“그 단계까지만 가면 설사 게임을 지더라도 상품으로 고성능 그래픽카드를 챙겨줘.”
“그거 비싸요?”
“상품으로 주는 건 이백만 원쯤 할걸?”
“와아! 다섯 명이면 천만 원이잖아요.”
“프로 게이머와 정식으로 경기도 해보고, 하루 경기해서 이백만 원짜리 그래픽카드도 받고. 꽤 괜찮지?”
“응? 하루에 그게 다 진행이 돼요?”
“경기장에 가서 하는 것도 아니고 집이나 피시방에 앉아서 하는 온라인 경기니까 되지.”
“참가자가 많지는 않나 봐요?”
“보통 천 명쯤은 참가할걸?”
“많네요? 그런데 어떻게 하루에 경기가 끝나요?”
“게임 한 판 할 때마다 절반씩 떨어져 나가니까 여덟 번만 이기면 다섯 명만 남아.”
“와. 온라인으로만 하니까 금방 끝나는구나.”
김유찬이 씩 웃으며 설명했다.
“사실 오프라인 경기도 하나 있어. 그 회사에서 준비한 팀은 중간보스야. 중간보스를 이기면 진짜 보스가 등장하지.”
“응? 보스가 또 있어요?”
“보스전에서는 진짜 프로팀하고 싸워.”
“프로팀? 와. 그건 진짜 이기라고 하는 경기가 아니네요?”
“프로팀과 경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포상이지. 그리고 거기서 지더라도 컴퓨터를 최고성능으로 아예 풀세트로 맞춰줘.”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근데 만약 이기면요?”
“최종전은 단판이 아니라 3선승제인데, 도전자 팀은 한 번만 이겨도 추가로 상금을 줘. 1인당 천만 원씩.”
“와아!”
“물론 아무도 못 받아본 돈이지.”
김유찬이 웃으며 설명했다.
“이 대회가 벌써 일 년째인데, 그동안 최종 보스전까지 간 팀은 두 번 있었지만 이긴 팀은 없어. 사람들도 최종 보스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개인 실력도 차이가 나지만 프로는 팀워크가 다르니까.”
신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바하테크에 프로 게임 팀이 있어요?”
“당연히 없지. 다른 회사에서 운영하는 게임 팀에 바하테크가 광고를 넣으면서 이런 이벤트 대회가 생긴 거라더라.”
“그럼 보스전은 그 프로 게임 팀이 있는 회사에 가서 해요?”
“아니야. 드물게 열리는 오프라인 경기인데 다른 회사로 보내긴 그렇잖아. 바하테크에는 진짜 시설이 좋은 게임룸이 있대. 거기 가서 사장이랑 인사도 하고 경기도 한대.”
나강인의 눈이 반짝였다. 바하테크에서 주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혹시나 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하이 캐슬?’
AI 전지인도 반응을 보였다.
‘바하테크의 하이 캐슬에는 소규모 게임 대회가 가능한 시설이 있습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거기 가면 액자를 만든 제작 시설도 볼 수 있을까?”
- 몰래 보면 됩니다.
“지인아. 넌 진짜 사람 다 됐어.”
나강인이 김유찬에게 물었다.
“그 대회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식 진행자는 없지만, 대회에 참여하는 스트리머나 BJ들이 있으니까 인터넷 개인방송으로 보면 돼요. 대회가 내일이니까 관심 있으면 봐요.”
“내일이라…. 대회에 접수하기는 늦었겠네요.”
“온라인 경기라 접수는 오늘 자정까지 받으니까 지금이라도 신청하면 되는데…. 왜요? 하게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재미있죠. 그런데 강인 씨 티어가?”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요원님의 게임 플레이어 등급은 심해, 심해 밑바닥입니다.
나강인이 둘러댔다.
“그냥 적당히 합니다.”
김유찬이 웃었다.
“어차피 재미로 참가하는 건데 심해만 아니면 되죠. 하하하.”
***
나강인은 저녁 모임을 마치고 피시방으로 갔다. 밤에는 윤아름이 일하고 있었다.
윤아름은 너튜브 채널이 꽤 뜨면서 알바 시간을 줄였다. 그래서 심야에는 다른 사람과 교대하는데 아직은 그녀의 근무시간이다.
그녀가 나강인을 보고 반갑게 말했다.
“앗! 강인 오빠. 오신 김에 밥이라도 좀 하시나요?”
“밤 열 시에 밥을 하겠냐?”
“그런가? 쳇.”
나강인이 포장해온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거나 먹어라.”
“이게 뭔데요?”
“저녁 모임이 있었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준 거야. 너 먹어.”
그건 오규철에게 이야기해 따로 챙긴 도시락이다. 어차피 돈은 김유찬이 냈다.
윤아름이 손가락으로 하트 두 개를 만들었다.
“앗! 강인 오빠! 알라뷰?”
“꺼져.”
“넹!”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다가오며 입맛을 다셨다.
“아름아. 나도 한 입만.”
“왜 이러셔? 고급 레스토랑 요리인데 나 혼자 먹어야지.”
“알바 하면서 심심하다고 날 불러내더니 손님 나간 자리 청소까지 시킬 땐 언제고?”
“같이 먹으려고 했어. 이리 들어와. 안에서 먹자.”
나강인은 도시락을 넘겨주고 그의 고정석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멈칫했다.
“알레이나?”
- 알레이나 민을 발견했습니다.
“쟤가 여기를 왜 와?”
- 전에는 자주 왔습니다.
“저번에 호텔로 옮겼잖아.”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 민은 나강인의 옆집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정체가 드러나는 바람에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나강인이 알레이나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네가 왜 여기 있냐?”
알레이나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람 잘못 보셨….”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앗! 광돌이다!”
“너 호텔로 간 거 아녔냐? 우리 동네는 그만 오는 거 아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