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대회
첫 번째 경기에서 나강인은 정글 영웅을 맡았다.
대회 참가자의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낮은 등급인데도 재미로 참가한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첫 경기는 쉬웠다. 다이아 티어인 안성환과 AI 전지인이 맡은 정글 영웅이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참가 신청만 하고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을 자동으로 탈락했다. 실제로 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천여 명이었다.
그중 절반인 오백여 명이 게임을 딱 한 판만 해보고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첫 경기가 끝난 후에 안성환이 나강인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우와아. 형 실력 진짜 장난 아닌데요? 완전히 전장의 지배자였어요.”
나강인이 자랑했다.
“내가 사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다 했습니다. 계정도 제 계정입니다.
AI 전지인은 최근에 이 게임 계정을 하나 만들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내 손이 저절로 했어. 난 뭐 키보드와 마우스에 손만 올려놓고 있었던 것뿐이야.”
안성환의 귀에는 그런 말도 멋있게 들렸다.
“우와. 나도 나중에 양학할 때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야지.”
두 번째 경기에서는 포지션 경쟁이 있었다. 새로 모인 팀원 중에 정글을 강력하게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 저는 정글만 해서 다른 라인은 할 줄 몰라요. 대신에 정글은 진짜 잘해요.
나강인이 물었다.
“지인아. 위쪽 라인으로 가도 이번 게임을 이길 수 있냐?”
- 경기 참가자 중 베스트가 저쪽 팀으로 가고 우리 팀에는 쓰레기만 모인 게 아니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도 괜찮겠네.”
나강인이 정글을 양보하고 위쪽 라인으로 갔다.
두 번째 경기 역시 AI 전지인이 나서서 손쉽게 이겼다. 정글을 잘한다고 주장하던 팀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경기를 더 압도적으로 이겼다.
나강인이 세 번째 경기를 앞두고 작게 말했다.
“지인아. 여기 애들이 좀 못하는 거 같지? 이런 수준이면 이번 판은 내가 해도 되겠는데?”
- 두 번의 전투로 참가자의 75%가 쓸려나갔습니다. 이번 전투는 상위 25%와 싸워야 합니다.
“나도 알지.”
- 요원님의 티어는 심해입니다.
“대신에 성환이가 다이아잖아.”
- 상대편에 최약체만 모인 경우가 아니라면 안성환이 도와줘도 무리입니다.
“해 보기 전에는 모르지. 잘할 수 있을 거야.”
나강인이 큰소리쳤다.
“어떻게 하는지 감이 왔거든.”
- 알겠습니다.
세 번째 경기는 나강인이 직접 게임 속 영웅을 조종했다. 그가 맡은 포지션은 정글 영웅이었다.
게임이 시작하고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팀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대회 참가 중이라 반말이나 욕은 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 우리 정글 뭐합니까?
- 그 실력으로 두 판은 어떻게 이겼습니까?
- 조회해 보니까 듀오로 참여했던데 다이아 버스 탔네요.
안성환도 옆에서 말했다.
“형. 이번 판은 갑자기 왜 이래요? 형 실력이 이럴 리가 없잖아요. 일부러 던지는 거예요?”
AI 전지인이 물었다.
- 감이 왔다고 하셨습니다만?
“야. 이건 현실과 게임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그런 거야. 게임 속 영웅이 내 감만큼 민첩하게 못 움직인다고.”
-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심해 티어이십니다.
“감이 조금만 더 오면 될 것 같은데….”
- 그러다 이번 판을 지면 하이 캐슬 침투 작전은 실패합니다.
“쳇.”
나강인이 안성환에게 둘러댔다.
“그냥 세 메타를 시험한 거야.”
“그쵸? 이유가 있었던 거죠?”
“당연하지. 이제부터 진짜로 할 거야.”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지인아? 믿는다?”
- 손의 제어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캐리하겠습니다.
세 번째 경기는 AI 전지인이 조종하는 정글 영웅이 활약하면서 역전승했다.
- 정글 차이 쩌네요.
- 진짜 너무 잘하세요.
- 초반에는 놀아주면서 했나 봅니다.
네 번째 경기가 다시 매칭됐다. 오전 경기는 이게 마지막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참가자의 87.5%가 탈락했습니다. 아군과 상대 모두 도전자 중 상위 12.5%에 든 사람들입니다. 심해 티어는 어지간하면 참전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하면, 남은 사람들의 실력은 전체 플레이어의 10% 위쪽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만 모였으니까 양측 전력은 비슷하겠지.”
참가자의 닉네임을 인터넷에서 조회하면 게임 등급을 알 수 있다.
- 그건 아닙니다. 아군 중에 버스를 타고 올라온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전체 평가는 상대편 팀이 더 높습니다.
버스를 탔다는 건 하수가 같은 팀의 고수 덕분에 게임을 쉽게 진행하는 경우를 말하는 은어다.
“그 버스 승객이 나는 아니지?”
- 제가 요원님의 손으로 플레이했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른 버스 승객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쪽이 더 높아? 서로 실력에 맞춰서 대진표를 짜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대회 주최 측은 무작위로 매칭합니다.
“일일이 검색해서 실력을 확인하는 것도 인건비가 드니까 그냥 자동으로 매칭을 돌렸구나. 그래서 이길 수 있어?”
- 물론입니다.
나강인은 이번에는 위쪽 라인 영웅을 맡았다. 문제는 그가 영웅을 선택하면서 생겼다.
그가 선택하자마자 같은 팀원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 대회에서 버섯돌이는 아니죠!
- 누가 버섯돌이를 경기에서 씁니까!
- 이번만 이기면 최소한 게이밍 마우스 확보인데!
AI 전지인이 채팅을 쳤다.
- 적에게 죽음의 천사 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 언제 봤다고 믿습니까?
- 검색해보니까 계정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데!
- 아니, 잠깐. 만든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전승인데? 패가 하나도 없는데?
- 그럼 부캐네. 본캐는 마스터급이겠는데?
- 진짜 믿어도 되는 거지요?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야생 버섯을 왜 함부로 먹으면 안 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AI 전지인은 기어이 버섯돌이를 골랐다.
안성환은 중앙 라인을 맡았다. 버스 듀오는 아래쪽 라인을 맡았다.
게임이 시작됐다. AI 전지인이 맡은 버섯돌이는 위쪽 라인에서 적을 압도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분이 일어났다.
아래쪽 라인은 듀오로 올라온 팀인데, 그 둘과 정글 영웅이 대놓고 싸웠다.
정글 영웅 플레이어가 채팅으로 화를 냈다.
- 야! 게임을 발로 하냐! 그 실력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와!
- 얻다 대고 반말이야!
- 실력이 사람이 아니잖아!
- 내가 못하는 게 아니야! 저쪽이 잘하는 거라고! 저쪽 상대는 마스터야!
- 그럼 사려야 할 거 아냐! 왜 들어가는데! 광돌이가 해도 너보단 잘하겠다!
나강인은 그 채팅을 보고 멈칫했다.
“어?”
광돌이는 알레이나가 나강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나강인도 그녀를 광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광돌이는 유니크한 별명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쓸 수도 있다.
나강인이 상대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레이 맥시멈?’”
AI 전지인이 장담했다.
- 경박한 말투와 사용하는 호칭, 닉네임을 종합해서 분석했습니다. 레이 멕시멈의 정체는 알레이나 민입니다.
“나도 알아. 얘가 왜 이 대회에 나와?”
- 그러게 말입니다.
나강인이 슬쩍 일어나 알레이나의 고정석을 보았다.
“얘 지금 여기 와 있냐?”
- 아닙니다.
***
알레이나는 호텔방에서 게임을 했다.
그는 나강인의 옆집에 살면서 피시방을 다닐 때 이 게임을 알게 됐다. 그 피시방에는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심심해서 손댄 게임인데, 해보니까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처음 하는데도 곧잘 했다. 잘하니까 더 재미있었다.
어차피 비밀수술을 받을 때까지는 공연이나 방송출연을 본격적으로 할 수 없다. 녹음실을 이용해도 안 된다.
그녀는 거처를 호텔로 옮긴 후에, 시간이라도 때울 생각으로 고성능 게이밍 노트북을 사서 이 게임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다. 그러다 점점 자주 하게 됐다. 나중엔 온종일 할 때도 있었다.
계정을 만들고 게임을 한 기간이 짧아서 공식 티어는 적당히 높은 정도에 그쳤지만, 그녀의 실제 실력은 이미 최상위권에 올라왔다.
“난 뭐 음악만 잘하는 게 아니네. 게임도 잘하네.”
그녀는 어제 피시방에 갔다가 나강인이 이 게임대회 출전 신청을 하는 걸 보았다.
대회 출전 신청은 스마트폰으로 접속해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제 피시방에서 나가자마자 출전 신청을 했다.
그녀는 지금 3승을 거두고 4번째 경기를 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래쪽 라인 듀오가 일방적으로 밀렸다. 한 명은 실력이 괜찮지만, 친구 덕분에 여기까지 온 다른 한 명이 문제였다. 게다가 상대편 아래쪽 라인에는 마스터 플레이어가 있었다.
정글 영웅을 맡은 그녀가 도와주러 갔을 때는 그나마 나은데, 그녀가 없을 때도 전투가 벌어지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이길 수 있는 전투까지 지게 되자 결국 폭발한 그녀가 싸움을 걸었다.
“광돌이도 너보단 나을 거야!”
갑자기 그녀에게 비밀 채팅 메시지가 날아왔다. 비밀 채팅은 당사자 외에는 볼 수 없다.
- 알레이나?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헉! 뭐야? 누구야?”
- 너 여기서 뭐 하냐?
그녀가 호텔방을 휙휙 둘러보았다.
“누가 나 감시하나?”
그녀가 비밀 채팅을 쳤다.
- 누구세요?
- 광돌이.
광돌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조금 전에 먼저 썼다.
- 거짓말! 내 채팅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거지? 정체를 밝혀라!
- 옆집 살던 광돌이.
알레이나가 나강인의 옆집에 한동안 살았고 그를 광돌이라고 부른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몇 명 없다.
“어? 진짜 광돌이잖아!”
그녀가 얼른 채팅을 쳤다.
- 우와!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 내가 참가하는 거 알았잖아.
- 광돌이는 일찍 탈락할 줄 알았지.
알레이나는 나중에 나강인을 찾아가서 대회 결과를 가지고 놀릴 생각이었다.
나강인이 비밀 채팅을 보냈다.
- 난 이 게임을 이겨야겠으니까 다른 놈들하고 싸우는 거 그만해.
- 하지만 저놈들이 너무 못하잖아!
- 내가 캐리할 테니까 넌 아래쪽 라인만 집중적으로 지원해.
- 쳇. 알았어.
알레이나가 툴툴댔다.
“큰소리칠 실력인지 어디 보자고.”
아래쪽 라인은 여전히 밀렸지만 알레이나가 대놓고 그쪽만 지원한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안성환이 맡은 중앙 라인도 밀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AI 전지인이 버섯돌이 영웅으로 위쪽 라인을 휩쓸었다. 상대 영웅은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아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적의 지원도 소용없었다. AI 전지인은 적이 틈을 보일 때마다 치고 들어갔다가 지원이 온다 싶으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AI 전지인은 특히 버섯을 잘 썼다. 적절한 순간에 터지는 버섯에 적이 쓸려나갔다.
알레이나는 그걸 보고 당황했다.
“어? 무슨 게임을 저렇게 잘해?”
아래쪽 라인은 환성을 질렀다.
- 위에 계신 형님 존경합니다!
- 누님이면 더 존경합니다!
- 이번 게임만 이기면 100명 안에 들고, 그러면 참가상으로 게이밍 마우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그 마우스를 꼭 받고 싶습니다!
- 가즈아!
상대편 팀에서는 화를 냈다.
- 내가 이래서 버섯돌이를 싫어한다고!
- 우리 편에 버섯돌이가 있으면 망하는데, 왜 상대편에 있을 때만 잘하냐고!
네 번째 경기도 나강인의 팀이 이겼다.
안성환이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래쪽 라인이랑 정글이 싸울 때는 졌다 싶었는데, 정글이 양보해서 살았어요.”
“양보 안 했어도 이겼을 거야.”
“어떻게요?”
“내가 잘해서?”
“하하….”
매 경기 사이에는 휴식시간이 잠깐씩 있다. 경기가 오래 걸리는 팀도 있기 때문이다.
경기는 한 시간마다 열린다. 한 시간이 넘게 승부가 나지 않아도 중단되지는 않는데 페널티가 들어간다. 게임 시간이 조정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게임에서 이겨도 탈락할 수 있다.
게다가 게임을 일찍 끝낼수록 다음 게임까지 쉴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 그래서 압승한 팀이 더 유리했다.
그런데 네 번째 경기는 다른 경기와 좀 다르다. 그 경기 후에는 점심시간 한 시간이 주어져서 더 오래 쉴 수 있었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안성환이 물었다.
“형. 점심은요?”
“여기서 시켜먹자. 내가 살 테니까 내 것까지 시켜”
나강인은 피시방 밖으로 나가 알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앗! 광돌이! 너 게임 좀 하던데!
“야. 너 설마 게임대회에서 네가 누군지 밝힐 생각은 아니겠지?”
- 에이. 설마. 그러면 연예면에 기사가 나갈 텐데 당연히 안 그러지.
“그걸 아는 사람이 닉네임을 왜 그렇게 지어?”
- 레이 맥시멈? 왜? 일부러 민의 반대로 지었는데.
“너 바보지?”
- 나 바보 아니다!
“어제도 똑같은 소리를 한 놈이 있었는데….”
- 응? 누구?
- 온달이라고 있어. 하여간 채팅할 때 영어 쓰지 말고 프랑스어도 쓰지 마라. 특히 마이크는 절대로 켜지 마. 네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리면 상대가 바로 눈치챈다.
- 알았다고. 그런데 그런 걸 왜 광돌이가 걱정해주는 거야?
그가 바로 닥터 노네임이기 때문이다.
“이 게임대회에 네가 참전했다는 게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옆집에 살았던 나도 좀 피곤해져.”
- 무슨 말인지 알았다고. 내 기사가 나갈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
하이 캐슬 게임대회가 있다는 걸 나강인에게 알려준 사람은 톱스타 김유찬이다.
김유찬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원래는 마이크를 켜지 않고 게임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참전한 4차전 게임은 박빙의 승부가 이어져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경기가 길어지면서 집중력이 떨어진 팀원의 플레이에도 자꾸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톱스타 김유찬이 결국 마이크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