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김유찬 II
토너먼트 결승전까지는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게.”
나강인이 피시방 밖으로 나가서 김유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유찬이 신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강인 씨도 기사 보고 전화한 거예요? 새로운 모습에 놀랐다는 연락이 자꾸 와서 말이죠. 뭘 이런 거로. 으하하하!
“아뇨. 우리가 같은 팀으로 매칭돼서 전화한 건데요.”
- 어? 강인 씨도 8차전까지 살아남았어요? 닉네임이 뭔데요?
“지원전문가에잇.”
- 이야아아아! 갑자기 등장한 에잇이 누군가 했더니 강인 씨였네! 우리 종종 듀오로 게임 해요! 실력이 딱 맞을 것 같은데!
“아니, 무슨 영화배우가 이렇게 게임을 잘합니까?”
- 내가 좀 하죠? 근데 무술감독이 영화배우한테 이상하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하하하.
“게다가 톱스타가 왜 정체를 드러내고 게임을 합니까? 유찬 씨 때문에 뉴스가 계속 쏟아지던데요.”
그것 때문에 하이 캐슬 침투 작전에 문제가 생길 판이다.
- 흐흐흐. 이번 대회 끝나면 게임 계정 하나 새로 파게 생겼어요. 앞으로 이 계정으로 들어가면 다 알아볼 거 같아서요.
“일부러 정체를 공개한 건 아닌가 보네요?”
김유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 후우. 팀원이 하도 답답하게 해서 마이크 켜고 몇 마디 했는데, 그 사람이 하필 개인방송 스트리머라서 시청자들이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대요.
“조심 좀 하시지.”
- 나야 그 팀원이 그냥 일반인인 줄 알았죠.
“후우.”
- 강인 씨는 왜 한숨을 쉬어요? 혹시 이번 경기가 유명해지면 안 되나? 헉! 이번에도 사건인가? 토너먼트 결승전은 그냥 질까요?
나강인이 하이 캐슬에 들어가려면 이번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
“져줄 거면 시작도 안 했죠.”
- 흐흐. 그렇죠? 우리 같이 최종 보스전까지 가보자고요!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문제는 김유찬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는 알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 광돌이! 토너먼트 결승전 방장 됐던데! 엄청 높은 사람이 됐어!
“넌 왜 결승전까지 남아있냐?”
- 내가 잘해서 그런 걸 어떻게 해? 일부러 져줄 수는 없잖아?
“너 이 게임 한 지 오래됐냐?”
- 아니.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했는데? 나한테 재능이 있더라고.
“도대체 얼마나 한 거야?”
- 호텔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했지.
나강인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넌 한국에 와서 게임 폐인이 됐구나.”
미국 팝스타 알레이나가 항의했다.
- 내가 그래도 폐인은 아니지! 나 알레이나 민이야!
“어. 그래. 미제 폐인.”
AI 전지인이 말했다.
- 김유찬과 알레이나가 같은 팀에 있습니다. 다시 분석해도 이번 작전은 망했습니다.
나강인도 작게 말했다.
“망했지.”
- 토너먼트 결승과 중간 보스전은 온라인에서 치르지만, 최종 보스전은 하이 캐슬에 본인이 직접 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종 보스전에 가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유찬 씨 때문에 기자들도 올 것 같은데, 그런 곳에 알레이나가 나타나면 반응이 폭발하겠지?”
- 다 망하는 겁니다.
“이번 작전은 그냥 때려치울까?”
- 차 이사를 찾을 단서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이 대회를 포기하면 자연스럽게 현장을 조사할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면 차 이사도 놓칩니다.
“공격적 침투 작전으로 전환하면?”
- 약간의 의혹만으로 민간인 시설에 공격적으로 침투하는 건 좋은 계획이 아닙니다.
바하테크가 정말로 미술관 사건의 배후라는 증거는 없다. 사실 확신도 없다. 지금은 단순히 그럴 수도 있다는 의심만 있다.
작전을 강행하면 다른 문제도 생긴다.
- 공격적 침투 작전에 민간인 안성환을 데려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나강인 혼자 그곳에 들어가면 내부 시스템을 조사할 때 한계가 있다. AI 전지인에게 제약이 걸린 부분은 해커 안성환이 처리해줘야 한다.
“방법은 천천히 생각해보고, 일단 이 경기부터 이기자. 여기서 지면 그런 고민할 기회조차 없으니까.”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알레이나 대신에 대타를 세우면 됩니다.
“광년이 비슷하게라도 하는 대타를 알아? 은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 요원님의 인맥 중에는 김유찬과 안성환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같은 팀이 됐지.”
- 그래서 망했습니다.
조용하던 알레이나 민이 갑자기 물었다.
- 뭐야?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전화가 끊어졌나?
나강인이 말했다.
“광년아. 너는 기사가 뜨면 안 되는 거 알지? 설사 게임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넌 절대로 마이크 켜지 마라.”
- 안다고.
나강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 게임에는 쪽지 시스템이 있다. 쪽지는 팀원이 아니라도 보낼 수 있다.
여기저기서 참관 신청 쪽지가 날아와 있었다. 많은 곳에서 두 개뿐인 참관인 자리를 원했다.
- 안녕하십니까? 신문사….
- KMTV 방송국 기자….
- 연예중계에서….
개인적으로 참관인 자리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 유찬 오빠 팬클럽 부회장이에요. 저에게….
돈으로 참관인 자리를 사려는 사람도 있었다.
- 계좌 불러보시죠. 100만 원 쏘겠습니다.
나강인은 신청 쪽지를 모조리 삭제했다.
“현재 상황만으로도 망했는데 뉴스 소스를 추가로 제공하겠냐고.”
그는 경기용 방을 새로 만들었다. 방장인 그가 방을 만들자마자 마지막까지 남은 아홉 명이 들어왔다.
토너먼트 결승전이 시작됐다.
게임이 영웅 매칭 단계로 넘어가면 채팅창도 쓸 수 있고 마이크도 켤 수 있다.
안성환이 얼른 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김유찬 형님! 팬입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다른 팀원도 환성을 질렀다.
- 오빠! 꺄악! 저 찐팬이에요! 햇살 좋은 날이랑 운명의 창 다 봤어요!
알레이나는 마이크를 켜지 않았다.
김유찬이 인사했다.
- 안녕하십니까? 김유찬입니다. 이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이겨서, 여러분과 함께 프로게이머 팀과 싸워보고 싶네요.
안성환이 얼른 말했다.
“형님!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은 팀 중에 나강인이 모르는 사람은 여자 목소리의 팀원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 방장님. 우리 경기를 참관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을 텐데 누구 받으셨어요?
나강인이 대답했다.
“다 거절했습니다. 우리 경기는 참관인 없이 갈 겁니다.”
- 어머. 그래도 돼요?
“됩니다.”
- 쿨하시다.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회 참가자 중 1%밖에 되지 않는다. 99%는 이미 탈락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안성환의 게임 내 티어가 결승전에 참전한 사람 중에서 두 번째로 낮습니다.
“제일 낮은 건 누구야?”
- 요원님입니다.
“이거 네가 만든 계정이다.”
이 게임은 개인 정보가 없어도 계정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AI 전지인도 자기 계정을 가질 수 있었다.
- 저는 게임 계정을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티어가 낮은 겁니다.
“너를 빼고 보면 상황은?”
- 그래도 우리 쪽의 평균이 낮습니다.
“망한 거야?”
- 편성만 보면 우리 팀이 불리하지만, 제가 캐리하면 됩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넌 사람 다 된 후로 실수를 많이 하잖아.”
- 그게 걱정이긴 합니다.
“야 이….”
마지막 경기는 꽤 치열했다.
여자 팀원이 외쳤다.
“빠졌다가 쳐요!”
알레이나는 마이크를 켤 수 없어서 핑을 열심히 찍었다. 그러다 여유가 생기면 채팅도 쳤다.
- 나 텔레포트 있어! 내가 갈 때까지만 버텨!
김유찬이 소리를 질렀다.
- 지금 밀어요! 돌격!
안성환이 호응했다.
“으아아아! 가즈아!”
AI 전지인은 중앙 라인의 영웅을 맡아 상대편 영웅을 압살했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서 다른 라인의 전투를 수시로 지원했다.
토너먼트 결승전은 결국 나강인의 팀이 이겼다.
안성환이 환성을 질렀다.
“으하하! 이겼다!”
나강인이 옆에서 물었다.
“좋냐?”
“좋죠!”
“뭐가 그렇게 좋아?”
“김유찬 형님하고 한 게임 더 할 수 있고, 프로 게이머하고도 싸울 수 있고, 그리고 이백만 원짜리 그래픽카드도 확보했잖아요.”
“그럼 중간 보스전도 이겨서 그래픽카드가 아니라 풀세트 PC를 받을 생각을 해라.”
하이 캐슬 침투 작전을 위해서는 중간 보스전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
“흐흐흐. 그럼 진짜 최고죠.”
“오늘 중간 보스전도 이기고, 내일 바하테크 본사에서 하는 최종 보스전에서 프로팀도 이겨봐. 그럼 천만 원을 추가로 준다며.”
“에이. 프로팀은 무리죠.”
팀원들이 감탄했다.
- 이야아. 이건 완전히 미드 차이로 이겼네요.
- 우리 미드 님 혹시 현역 프로 게이머세요?
- 아닙니다.
- 에잇? 그는 제가 본 미드 중에서 최고였어요.
김유찬이 웃었다.
- 흐흐. 진짜 미드를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강인도 한마디 했다.
- 난 김유찬 씨가 이렇게 잘하는 줄 정말 몰랐는데.
여자 목소리 팀원이 말했다.
- 유찬 오빠는 얼굴도 잘생기시고 게임도 잘하시고. 어쩜 이렇게 완벽하세요? 제 이상형이세요.
- 나 좋아하면 상처받아요.
- 까아아! 농담도 잘하세요!
나강인이 마이크를 끄고 말했다.
“잘생기면 저렇게 말해도 웃는구나.”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요원님은 그러지 마십시오. 생긴 게 다릅니다.
“지구연합군은 왜 나한테 신체 강화만 한 거냐? 얼굴도 강화해 주지.”
대회 주최자인 바하테크는 토너먼트 우승팀과 싸울 상대로 프로게이머가 지휘하는 팀을 준비했다. 팀 구성은 프로게이머 한 명에, 바하테크에서 따로 섭외한 게이머 네 명이었다.
그 경기는 단판이 아니라 먼저 두 번 이기는 팀이 승리하는 형식이다. 오늘은 중간 보스전까지만 한다.
토너먼트는 방금 끝났다. 중간 보스전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다. 토너먼트 우승팀은 그 시간 동안 식사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해야 환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자.”
안성환은 이미 윤아름에게 전화해서 자랑하는 중이다.
“당연히 이겼지. 내가 최소한 그래픽카드는 확보…. 김유찬 형님? 내가 같이 싸워봐서 아는데, 그 형님 매너 진짜 좋아. 실력도 쩔어. 장난 아니야.”
윤아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 기다려! 내가 간다! 유찬 오빠가 싸우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겠어! 목소리도 직접 듣고 싶어!
“중간 보스전은 너 야간 알바 할 때 진행될 텐데?”
- 그럼 널 대타로…. 아. 넌 경기 해야지. 아이 씨. 이게 아닌데.
***
신은하가 출연한 예능 토크 방송의 촬영이 끝났다.
오늘은 박우섭 실장이 그녀와 같이 움직였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출발한 후에 신은하가 물었다.
“박 실장 오빠. 주연 경쟁을 포기한 사람 좀 있어?”
“일단 최선희와 김성현은 문제가 좀 생겼나 보더라.”
조금 지쳐 있던 신은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가 확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무슨 문제인데? 빨리 말해봐.”
“최선희는 몸을 만들다가 무리라도 했는지 손목을 삐었대. 큰 부상은 아니지만, 깜짝 놀란 소속사에서 이 드라마를 꼭 해야 하냐고 말린다더라.”
“아싸아! 그리고?”
“김성현은 원래 유럽에서 여행하면서 찍는 힐링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잖아.”
“이 드라마 하려고 그걸 깠다며?”
“그랬지. 근데 그쪽 방송국에서 항의가 세게 들어왔나 봐. 그래서 거기도 소속사에서 말리는 중이래.”
“흐흐. 그럼 현주 언니는?”
박우섭이 대답을 망설였다.
“어….”
“뭐야? 그 반응은? 안 좋아?”
“남현주 소속사 사장이 KMTV 방송국에 찾아가서 직접 딜을 걸었다는 첩보가 있어.”
신은하가 발끈했다.
“아니, 그래도 돼? 공정하게 실력으로 경쟁해야지!”
“이 바닥이 언제 공정한 거 따졌다고.”
“우리 회사는? 얼마나 지원해준대? 우리도 사장님이 출동하시나?”
“어….”
그녀의 눈썹이 치솟았다.
“아니야? 사장님 진짜 이렇게 나올 거래? 나 계약 기간 끝나면 소속사 옮겨버린다?”
“야. 네가 다른 데로 가면 강인 씨도 갈 것 같은데, 그러면 회사에 타격이 좀 크지. 프프걸스나 천사전사단 애들도 그렇고, 댕댕 다음 음반도 그렇고, 곽찬석 작곡가님도 한소리 하실 테고….”
“그니까 박 실장 오빠가 사장님한테 그런 걸 어필하라고!”
“근데 사장님이 강인 씨를 좀 무서워하셔서 어필이 될지 모르겠다.”
“어? 아니, 왜!”
“우리 회사에 강인 씨가 국제 용병이나 해적단을 쓸어버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너랑 나, 사장님뿐이잖아.”
“그게 왜! 강인 오빠는 나쁜 놈들은 다 쏴 버려도 같은 편한테는 다정, 아니, 그건 아니구나. 하여간 좋은 사람이라고!”
“아무래도 그 다 쏴 버리는 쪽이 무서우신 거겠지?”
“사장님도 자기가 나쁜 놈인 거 아시나 보네!”
박우섭은 이 이야기를 계속하면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 같아서 주제를 바꾸었다.
“김유찬 씨 말이야.”
신은하가 운전석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차 시트에 묻으며 투덜댔다.
“유찬 오빠는 이미 주연 맡았잖아. 부러워죽겠어.”
“오늘 게임 대회에 참가했다고 기사가 떴더라.”
“응? 오늘? 혹시 하이 캐슬 게임대회?”
“어? 네가 그 대회를 어떻게 알아?”
“어제 사람들하고 밥 먹을 때 유찬 오빠가 그 이야기를 했거든. 그런데 그런 것도 기사가 나? 역시 톱스타는 다르네.”
“김유찬 씨가 그 대회에서 토너먼트 우승팀 다섯 명에 들었다더라. 그래서 기사가 많이 떴어.”
신은하는 감탄했다.
“와아. 그 오빠 게임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그렇게 잘할 줄은 몰랐….”
그녀는 문득 다른 게 생각났다.
“잠깐. 강인 오빠도 오늘 그 대회에 참가한다고 했는데?”
“강인 씨가? 잘해?”
그녀가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내가 옆에서 봐서 강인 오빠 실력을 좀 아는데, 못해. 그 오빠가 못하는 게 다 있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