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지원전문가에잇
스트리머 뇌절소녀는 두 개밖에 없는 참관인 자리 중 하나를 따냈다. 유명 BJ인 썬더K 쪽에 시청자가 더 몰렸지만, 그녀의 방송에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시청자가 들어왔다.
시청자가 유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 김유찬이 게임 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개별 경기는 스트리머가 같이 하는 것 외에는 중계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중간 보스전만 기다렸어요.
뇌절소녀가 활짝 웃었다.
“저도 엄청 기다렸어요. 제가 유찬 오빠 경기의 참관인이 될 줄은 몰랐거든요. 흐흐. 큰 회사는 역시 달라요. 사람 볼 줄 안다니까요.”
이 대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월례 행사다. 게다가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온라인 아마추어 대회다. 평소라면 아는 사람들끼리만 즐기고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참가자 중에 톱스타 김유찬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뉴스가 나오고 시청자가 폭증했다. 김유찬의 팀이 우승한 후에는 기사가 쏟아졌다.
- 유찬 오빠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건 팬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잘하는 줄은 팬클럽에서도 몰랐어요.
경기가 시작됐다.
중간 보스전은 단판 경기는 아니다. 세 번 먼저 이기는 쪽이 승리한다.
뇌절소녀가 경기를 보면서 열심히 말했다.
“여러분! 보세요! 유찬 오빠 실력이 엄청납니다. 안정적인 딜링과 적절한 치고 빠지기! 아군의 갱이 오면 놓치지 않는 집요함! 이 게임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어요.”
- 뇌절소녀가 마치 아나운서처럼 설명을 잘하는데요?
- 원래 아나운서를 준비했다더라고요.
- 그런데 왜 스트리머를 해요?
- 아나운서 시험에서 떨어졌으니까요.
- 잘하는데 왜 떨어져요?
- 지력이 딸려서요.
뇌절소녀가 말했다.
“영어 너 진짜 어디 사냐!”
다른 시청자가 얼른 응원했다.
- 그래도 개인방송으로 꿈을 계속 이뤄나가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뇌절소녀가 다시 방송에 집중했다.
“역시 우리 편 다섯 명 중에 유찬 오빠가 최고입니다!”
그녀에게는 김유찬이 소속된 팀이 우리 편이었다.
- 에이. 김유찬도 잘하지만, 최고는 역시 지원전문가에잇이지. 누가 봐도 에잇이 캐리하고 있는데요.
“에잇은 부캐가 틀림없습니다. 게임 계정을 만든 지 얼마 안 됐거든요. 프로게이머가 몰래 출전했을 거예요.”
- 여기서 이겨도 내일 본선에 가면 정체가 뽀록 날 텐데 설마 그럴까요?
“그래픽카드가 이백짜리인데, 여기서 적당히 하다 지면 정체를 들키지도 않고 수입이 쏠쏠하잖아요.”
- 일부러 지려는 사람치고는 지금 너무 잘하는데요?
- 그러게요. 프로게이머 상대로 저렇게 잘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한테 패작이라고 하면 누명이죠.
“어…. 그러네요? 그럼 진짜 아마추어인가? 아마추어가 왜 저렇게 잘해요?”
AI 전지인은 ‘지원전문가에잇’이라는 닉네임으로 중앙 라인을 맡았다. 상대 프로게이머도 중앙 라인에 있었다.
그런데 AI 전지인의 영웅이 상대의 영웅을 압도하는 중이다.
“피지컬이 에잇이 더 나은데도 프로게이머가 아니라고요?”
- 일대일로 싸울 때는 피지컬이 프로급으로 좋은 아마추어가 가끔 있어요. 그 케이스 같은데요.
첫 경기는 나강인의 팀이 이겼다.
신은하가 옆에서 물었다.
“아니, 왜 게임까지 잘해? 상대편은 프로게이머 아니야?”
“내가 원래 좀 한다.”
AI 전지인이 자랑했다.
- 훗. 오른팔의 봉인을 풀지도 않았는데 승부가 나다니. 내 상대로는 멀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또 중2병이 왔구나.”
신은하가 불평했다.
“진짜 하나만 더 잘하면 딱 좋겠다.”
“그 하나가 뭔데?”
“그런 게 있어!”
윤아름은 옆에서 안성환의 어깨를 주물렀다.
“꺄하하하! 이겼어! 이제 두 번만 더 이기면 컴퓨터 타는 거야?”
“당연하지! 컴퓨터 타면 네 너튜브 영상 편집용으로 쓸까?”
“당연히 팔아야지!”
“어?”
“팔아서 흥청망청 쓰자! 그 돈으로 놀러 가자!”
“반드시 이겨야겠네! 가즈아!”
두 번째 경기의 영웅 배치가 시작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로 영웅을 고르는 도중에 AI 전지인이 말했다.
- 상대 프로게이머가 포지션을 정글로 변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거는?”
- 상대 프로그래머가 공식 경기에서 정글 포지션을 맡을 때 주력으로 쓰는 영웅을 상대 팀이 선택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바꿔야겠네.”
그는 채팅을 직접 쳤다.
- 적 에이스가 정글로 가려나 봅니다. 제가 정글을 맡겠습니다.
김유찬이 당장 찬성했다.
- 프로게이머는 에잇 님이 맡아주셔야죠. 난 찬성합니다.
원래 정글을 맡았던 건 알레이나 민이다. 그녀도 채팅을 쳤다.
- 난 중앙 라인도 잘하니까 찬성.
옆자리의 안성환도 당연히 찬성했다.
벌써 세 명이 찬성이다. 여자 팀원도 반대하지 않았다.
***
김유찬은 1차전에서는 마이크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이크를 켰다.
- 이번 전투는 제가 오더 하겠습니다.
마이크 음성은 팀원에게만 들렸다.
여자 팀원이 채팅을 쳤다.
- 오빠 목소리 너무 좋아요!
대회를 중계하던 뇌절소녀가 그 채팅을 환성을 질렀다.
“꺄아! 유찬 오빠가 마이크 켰나 봐! 팬이에요!”
- 뇌절소녀님 목소리가 김유찬에게 들릴 리가 없잖아요.
“그건 알지만, 진심을 담아 외치면 이 마음은 전해질지 모르잖아요!”
- 역시 지력이 부족해서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진 듯.
“야! 영어 너 내가 잡으러 갈 거야!”
두 번째 경기는 정글 싸움이 치열했다. 양쪽 정글 영웅은 틈만 보이면 매복과 습격을 반복했다.
뇌절소녀가 말했다.
“방금 상대 정글 영웅이 매복했다가 아군을 습격하는 걸, 우리 정글이 역매복으로 잡는 거 봤어요?”
- 피가 빠졌을 때 뛰어들어서 순식간에 잡았네요.
- 정글만 믿었던 아래 라인 상대 두 영웅도 상황이 꼬여서 다 잡혔어요.
- 저걸 다 설계하고 역매복을 한 건가?
- 정글이 전장을 지배하네.
뇌절소녀가 감탄했다.
“와아. 유찬 오빠도 잘하지만, 에잇의 정글 수 싸움 실력은 아주 미쳤네요.”
- 프로게이머가 피지컬이 밀리더니 수 싸움까지 밀리네.
- 에잇 저 사람 진짜 프로 아니에요?
- 프로면 여기서 이겨봤자 내일 들통난다니까요. 그럼 대회를 주최한 바하테크에서 그냥 안 넘어갈 걸요?
- 그럼 재야 고수인가?
다른 의견도 있었다.
- 중간 보스팀은 원래 연습하던 팀이 아니잖아요. 아무리 프로게이머라도 팀과 연계된 플레이를 할 수 없으면 평소 실력이 안 나오죠.
- 맞아요. 그래서 전에도 두 번이나 중간 보스팀이 패배하고 아마추어팀이 최종 보스전에 진출했으니까요.
뇌절소녀가 말했다.
“그래도 에잇 저 사람은 너무 잘하는데….”
두 번째 경기도 나강인의 팀이 이겼다.
신은하가 말했다.
“강인 오빠. 나중에 나랑 게임 좀 하자. 이렇게 잘하면 좀 가르쳐줘야 할 거 아냐.”
“어….”
나강인이 가르칠 순 없다. AI 전지인이 신은하를 가르칠 것 같지도 않았다.
“게임은 그냥 취미로 해. 넌 요즘 캐스팅 때문에 중요한 시기잖아.”
“하긴. 그럴까?”
옆에서 안성환이 흥분으로 손을 떨었다.
“또 이겼어!”
윤아름이 안성환의 손을 꽉꽉 주물러주며 말했다.
“성환아! 한 판 남았어! 한 판만 더 이겨! 컴퓨터 팔아서 놀러 가야지!”
“나만 믿어!”
신은하가 그걸 보며 말했다.
“강인 오빠는 손이 떨리지 않아? 주물러줄까?”
“내 손은 괜찮은데?”
“그러시겠지. 괜찮으시겠지!”
***
세 번째 경기에서 상대 프로게이머는 다시 원래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나강인도 중앙에서 싸웠다.
뇌절소녀가 경기를 보며 감탄했다.
“와아. 진짜 에잇 님은 피지컬이 프로게이머를 압도하네. 아마추어가 저렇게 잘해도 되나?”
- 누군지 모르지만, 이 기회에 프로게이머 해도 될 듯.
- 이미 직업이 있으면 프로는 못 하죠.
- 나 같으면 그 직업이 뭐든 때려치우고 이거 할 겁니다.
- 나도.
중간 보스전은 먼저 세 판을 이기는 팀이 승리한다. 세 번째 경기도 나강인의 팀이 이겼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승부가 거의 확실히 결정 난 시점에서 김유찬이 환성을 질렀다.
- 으하하하하! 우리가 이겼다!
안성환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겼다아아!”
뇌절소녀가 말했다.
“와아. 유찬 오빠는 진짜 좋아하네요. 승리 아이콘 계속 띄우는 거 봐요.”
-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톱스타가 그래픽카드 하나에 저렇게 좋아해도 되나?
“당연히 이겼으니까 좋아하는 거죠! 우리 유찬 오빠가 얼마나 순수하신데!”
- 그런데 에잇은 진짜 정체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피지컬이 너무 좋은데?
- 내일 최종 보스전 할 때 알 수 있겠죠. 그때는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 나타날 테니까.
- 우리는 거기 못 가잖아요.
- 김유찬이 참전했는데 기자들이 안 오겠어요? 당연히 기사가 뜨겠죠.
- 하긴.
***
중간 보스전이 승리로 끝나자마자 윤아름이 환성을 질렀다.
“꺄아아!”
안성환도 주먹을 위로 높이 들었다.
“으아아! 해냈다!”
다른 자리에 있던 손님 중에 몇 명이 그쪽을 힐끗거렸다. 이 피시방은 평소에도 게임을 하다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가끔 있어서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손님 중에는 게임 대회 중계방송을 본 사람도 있었지만, 김유찬의 팬이 좋아하는 줄 알고 넘어갔다.
윤아름과 안성환은 서로 껴안고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이겼어!”
“이겼다!”
“최신형 PC! 그거 팔면 돈이 얼마냐!”
“그래. 그거 팔면 돈이…. 아니, 아름아. 지금은 승리를 기뻐해 줘야….”
“내일 프로팀도 이기면 상금이 천만 원이라며? 그것도 탈 수 있지?”
“어? 어? 그 팀을 이길 수 있으면 내가 프로게이머를 하지.”
“그럼 못 이겨? 실망이야!”
“해봐야 아는 거지! 최선을 다할게!”
신은하가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을 보다가 나강인의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강인 오빠도 기뻐서 막 춤추고 싶지?”
“아니.”
“그러시겠지. 아니겠지.”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집에 가라.”
나강인이 피시방 밖으로 휑하니 나갔다. 신은하가 따라갈 틈도 없었다.
그녀가 안성환과 윤아름을 보았다. 그 두 명은 이제 손을 잡고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좋을 때다. 좀 부럽네.”
***
나강인은 서울 외곽의 제작 거점으로 이동했다. 그는 4대의 모니터 앞에 앉아서 상황을 정리했다.
“내일 대회는 오프라인이야. 우리는 바하테크 본사 건물의 하이 캐슬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 일단 안에 들어가면 해킹으로 정보를 빼내야 하는데…. 가능하지?”
- 해킹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몇 개 따로 제작하겠습니다.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안성환에게 그 프로그램을 넘겨 방화벽을 뚫게 하십시오.
“성환이가 방화벽을 통과하면 그 후에는 네가 작업하고?”
- 적의 서버에 이미 침투한 상태라면 제가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작업을 그냥 성환이를 불러서 여기서 하면?”
- 제가 만드는 건 기본적인 기능 몇 가지만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안성환의 능력으로 이곳에서 그 회사의 외부 방화벽을 뚫을 확률은 낮습니다. 설사 뚫는다 해도 역추적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 내부에서 접속해야 합니다.
“난 그거 못 쓰냐?”
- 드라이버나 니퍼 수준의 기본 도구 프로그램이라, 능숙한 해커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환이는 그 프로그램을 쓸 줄 알까?”
- 당연히 모를 겁니다.
“지인아? 방법이 있긴 있는 거지?”
- 안성환에게 프로그램 사용법을 미리 보내십시오. 간단한 매뉴얼은 제공하겠습니다.
“이번 작전, 어째 불안하다.”
- 안성환을 믿으십시오.
“왜 널 믿는 게 아니라 성환이를 믿어야 하는데?”
- 그러게 말입니다.
“야 이…. 후우. 지금 문제가 이거 하나가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 하면 정보는 빼낼 수 있다 치자.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계획을 세우기 전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다.
“톱스타인 유찬 씨가 대회에 참가했다는 게 알려졌으니까, 내일 기자들이 올 거란 말이야.”
문제는 또 있다.
“거기서 알레이나가 유찬 씨와 같은 팀으로 참가했다는 게 밝혀지면?”
- 국제 연애 스캔들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하면 해명될 수 있을까?”
- 한국이나 미국에는 찌라시라는 게 있습니다. 프랑스 찌라시까지 같이 터질 겁니다.
“해명은커녕 장작에 기름을 붓듯이 활활 타겠네.”
-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요원님의 집이 기자들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알레이나는 나강인의 옆집에서 한동안 지내다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기자들이 그 집을 찾아내면 나강인의 집까지 노출될 수 있다.
“이사 갈까?”
- 이 시기에 이사 가면 더 의심받을 겁니다.
“그럼 선택지는 두 개네. 이 대회를 포기하거나.”
- 차 이사는 이라미드 태양전지 최초 개발자 권수연 납치 외에도 여러 사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위험인물입니다. 임무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찾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아니면 알레이나가 이 대회에 참석했다는 게 알려지지 않게 해야지.”
- 알레이나의 대타를 세우십시오. 어차피 대화 참가 신청서에 개인 정보는 입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바꿔도 못 알아볼 겁니다.
“대타를 세우자고 하면 광년이가 납득할까?”
- 알레이나는 그런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지. 그리고 설사 걔가 이해한다 해도, 우리 주변에 대타로 세울만한 실력자가 있나?”
- 없습니다. 요원님. 이번 작전은 망했습니다.
“아직 안 망했어. 방법이 하나 생각났다.”